매 맞고도 정신 못 차리는 이스라엘 

새벽기도 설교 (3)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스 9:1,2)

 

에스라가 행한 유일한 개혁

 

에스라서의 결론 같지 않은 결론인 맨 마지막 구절은 어떻게 끝나는가?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스10:44) 구약성경 책 한권의 결론으로는 너무 싱겁고 이상하지 않는가?

 

에스라서를 읽으면서 성전 재건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데 그보다는 그 재건으로 인한 영적부흥에 더 주목해야 한다. 영적으로 부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지난 죄를 참회하는 운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신자들 삶의 모든 측면에서 거룩해지는 모습이 반드시 드러난다. 에스라서의 주제도 바로 이것이다.

 

성도나 공동체가 거룩해지지 않고 양적으로만 성장하는 것은 참 부흥이 아니다. 그럼 에스라를 통해 일어난 개혁 운동은 무엇이었는가? 첫 번째이자 유일한 개혁이 바로 그 결론대로 이방인 아내를 쫓아낸 것이다. 그것도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용서해주셨고 또 아내를 멋대로 내쫓기 위해 이혼증서를 남용 내지 악용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가 다시 젊은 남자와 동거하는 한 사마리아 여인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죄인 취급하며 아예 상종도 않으려고 그 지경은 통과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님은 남자도 아닌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서 먼저 말을 걸었고 그녀의 험난했던 과거 개인사는 전혀 따지지 않고서 구원까지 베풀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이방 여인을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쫓아냈다. 두 분의 역사가 너무 상충되는 것 아닌가? 기독교 교리를 따질 것 없이 일반적인 윤리와 상식에 위배되는 조치가 아닌가?

 

성경에는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비윤리적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종종 등장한다.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뜻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석연치 않다. 그러나 성경은 정미한 기록이다.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독선적이고 종교적 계명을 강요하고 조금만 위반하면 엄청난 벌을 주는 분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폭군이 아닌 까닭

 

본문 1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결혼했다가 내쫓은 아내들은 전부 가나안 족속 출신이다. 앗시리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본토인들을 이주시켜 히브리인들과 결혼시키는 혼혈 정책을 펼쳤다.

 

그들이 바로 복음서가 말하는 사마리아 인들인데 그 결혼에 대해선 하나님이 문제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의 절대 권력의 강요 때문에 항거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결혼으로 간주한 것이다. 앗시리아를 뺀 가나안 모압 애굽 족속들과의 결혼은 유대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한다고 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부터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다. 율법이 금하는 줄 알고도 결혼했으니 더더욱 가증한 일을 행한 것이다. 거기다 이방의 음란한 우상숭배의 관습을 동경했거나 알게 모르게 오염시키는 죄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에겐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사실보다 결혼의 동기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정치적 목적과 개인적 탐욕으로 이방 여인들로 후궁을 채웠다. 그들이 결혼하면서 자기들 고유의 우상을 들고 와서 섬기는 바람에 후궁은 이방신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유다의 상황이 그와 같다는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 일을 행한 이가 백성들뿐이 아니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가담했다.(1절) 그러니 대제사장 집안 출신인 스룹바벨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망연자실 가만히 앉아 있었다.(6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생각해도 같은 제사장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워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제사장도 인간이다?

 

제사장들도 같은 인간이고 오늘날 목사들도 죄를 저지르고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스9:10)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시기가 문제다. 하나님이 무엇을 행한 후인가?

 

앞의 9절에서 말하는 바대로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하나님이 바사 왕을 움직여 포로 생활에서 귀환시키고 또 성전을 재건까지 하게 한 후다. 포로귀환에서 그들은 아무 한 일이 없다. 그런 선물을 받을만한 공로 자격 조건이 전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이었다. 제 2의 출애굽이 일어났고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수리한 후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이방인과 통혼한 것이라면 에스라는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그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께 이미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라서를 읽을 때에 주의할 점은 에스라 본인은 성전이 재건되고 약 60년 후(BC 516년)에 귀환한 자라는 점이다. 성전 재건은 에스라와 아무 연관이 없는 일로 책의 전반부에 기록되어다. 자칫 책 이름만 보고 성전재건도 그가 행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성전재건이 완공되고 에스라가 돌아온 그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히브리인들은 불행했던 지난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회개 운동을 일으키고 말씀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가증한 일에 앞장섰으니 하나님에게 더더욱 가증한 일이 되었다.

 

육십 년의 기간은 포로에서 귀환하여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까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도 남는 기간이다. 두 세대가 지났다. 그럼 이런 새 세대들에게 신앙교육을 더 철저히 시켜서 자기들이 범한 잘못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거꾸로 율법을 어겨가며 우상숭배로 흐르는 모습을 제사장들이 보여주었다.

 

에스라 개혁의 교훈

 

이제 다시 에스라서의 결론으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까지 쫓아내야 할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가? 하나님은 죄를 범한 그대로 어김없이 벌주신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징벌이다. 정확하게 벌을 주시는 까닭은 그 당사자들로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으라는 뜻이다.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에게 율법을 바르게 가르치고 삶으로 본을 보여서 자기들의 전철을 절대 밟지 말게 했어야 했다. 새 세대가 거룩하게 성장하는 것 이전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바로 그 타락의 길로 다시 걸어갔다.

 

이런 죄에 대해 6절은 어떻게 묘사하는가?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을 향해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보시기에 인간들 위에는 죄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온 땅이 완전히 죄로만 덥혔다. 선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했는가?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8절) 얼마를 남겨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세우고 특별히 눈을 밝혀서 이스라엘 소생의 책임을 맡긴다고 한다.

 

에스라가 특별히 잘나서 다른 이들의 멀쩡한 가정을 나눠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율법 즉, 그분의 뜻대로 순종한 것뿐이다. 그는 그분만 붙들고 그분의 은혜 안에 살고 있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신자의 유익과 성장을 위한 것임을 절감했다. 율법 준수만이 후대 자손들로도 자기들 과오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바벨론 포로의 체험으로 확신하기에 그대로 행한 것이다.

 

그의 종교개혁을 오늘날 우리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거창하게 종교적 교회적 차원의 개혁운동까지 벌리지 않아도 된다. 신자 각자가 진정으로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일상 삶에서 행하면 된다. 그분의 자녀답게 반드시 최소한으로 행해야 할 바만 행해도 된다. 정말로 그분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면 말과 행동도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따라 나오게 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신세대 자녀들과 주변의 청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삶에서 전한 그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그들로 체험케 하여서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앞에 항복하게 해야 한다. 당연히 자신부터 완전히 낮추고 다른 이를 살리는 주님 은혜로만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에스라처럼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며 주님 맡기신 소명에 충성해야 한다.

 

4/17/2018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5 신 8:11-14 하나님을 잊지 말라. master 2018-06-28 111
94 신 2:30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master 2018-06-28 84
93 시108:1-13 새벽을 깨우리로다. master 2018-06-23 102
92 시105:12-19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master 2018-06-21 74
» 스 9:1,2 매 맞고도 정신 못 차리는 이스라엘 master 2018-06-20 67
90 스5:1-5 하나님의 일이면 현행법을 무시해도 되는가? master 2018-06-01 165
89 히 9:11-15 새벽이 가장 어둡다. master 2018-05-11 206
88 애 1:1-11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가? [2] master 2018-03-13 226
87 행 13:32-43 안식일마다 전해야 할 말씀 master 2018-02-17 240
86 행 13:13-31 올바른 설교의 판별 기준 셋 master 2018-02-17 244
85 행 13:1-12 성령 훼방 죄의 실체 master 2018-02-16 255
84 행 12:18-25 신자에게 억울한 일은 결코 없다. master 2018-02-16 140
83 행 12:1-17 기도해놓고 믿지 못하는 신자 master 2018-02-15 105
82 행 11:19-30 신자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가? master 2018-02-14 69
81 행 11:1-18 선물보다 포장지를 자랑하지 말라. master 2018-02-14 60
80 행 10:34-48 관용의 복음과 화평의 복음 master 2018-02-13 71
79 행 10:17-33 성령 안에서 연합하라. master 2018-02-12 54
78 행 10:1-16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master 2018-02-09 65
77 행 9:32-43 남을 위해선 기적을 빌어주라. master 2018-02-09 74
76 행 9:19b-31 불신자들을 당혹하게 하는가? master 2018-02-02 8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