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08:1-13 새벽을 깨우리로다.

조회 수 102 추천 수 1 2018.06.23 06:25:56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기도설교 (5)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108:1-13)

 

 

비탄이 찬양으로

 

시편은 역사시, 비탄시, 찬송시, 예배시 등 주제별로 분류하는데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이 지은 찬송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유래를 살피면 그런 분류와 조금 걸맞지 않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지은 기존의 두 시편에서 인용하여 하나로 편집한 것이다. 먼저 1-5절은 시편 57에서 발췌했고, 6-13절은 시편 60편에서 인용했다. 그런데 이 두 기존의 시는 비탄시에 속한다. 비탄시 두 개를 모았더니 찬송시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고난이 격심해 비탄하고 있는 중에도 감사하고 찬양할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의무로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다. 찬양을 많이 하면 감정이 고양되어서 기쁨과 평강을 얻는다는 뜻도 아니다.

 

찬양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높으심을 칭찬하는 것인데 정말로 그 높으심을 체험하여서 진정으로 감사할 거리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간절히 목청 높여서 온 힘을 다해 찬양을 해도 실은 찬양이 아니다.

 

고난 중에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본문 안에 있다. 먼저 내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1절) 무슨 의미인가? 오래 동안 고뇌 갈등 묵상한 후에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연유는 당연히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극심한 고난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였다.

 

또 새벽을 깨운다고 했다.(2절) 밤새 뒤척이며 잠을 못잘 정도로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 고뇌 끝에 얻은 해결방안이 결국은 찬양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고난을 이기는 방안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바꾸면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뜻도 아니다. 밤새 갈등했으나 새벽녘에 이르러 자발적으로 기꺼이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진정한 찬양의 근거

 

그런 찬양을 할 수 있는 근거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가 하늘보다 높고 주의 진실도 궁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궁창은 하늘과 동의어다. 따라서 주의 인자와 진실 둘 다 너무 크고 완전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인이 지금 고난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에서 ‘인자’와 ‘진실’을 찬양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면 백이면 백 다 그분의 전지전능하심만 찬양하지 않겠는가?

 

주의 인자는 무슨 뜻인가? 자격과 공로라곤 하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함에도 그 벌을 취소하고 끝까지 품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자녀가 된 관계와 신분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건져주신다고 고백한 것이다.(6절)

 

주의 진실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데 절대적으로 순전하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분의 사랑은 더 그러하다. 그 사랑을 받는 대상에게 그분의 온전한 뜻이 실현되도록 이끄신다. 당신의 뜻에 거짓, 추함, 왜곡, 모순, 불합리, 불공평 등은 단 하나도 개입되지 않는다. 완전히 100% 순수하고 완벽하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하다. 고난이 때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정의와 공평에도 어긋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혹시 이 일만큼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곤혹스럽다. 그러나 그 모든 의심 오해는 우리 쪽의 100% 잘못일 뿐이다.

 

고난이 생기는 근거와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차원에선 오직 완전한 인자와 진실뿐이다. 신자를 고난에서 빠져나오게끔 구출하는 과정도 그렇다. 빠져나온 후의 결과에도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어지는 6-9절에서 보듯이 그분은 세상 족속을 오직 둘로만 나누신다. 길르앗 유다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반면에 모암 에돔 블레셋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이다.

 

그렇게 나누는 기준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인이 아닌지 뿐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이 이방 족속을 무조건 미워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인자와 진실로 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했다. 다른 우상을 섬기고 죄악과 쾌락을 즐기기에 바빴고 또 그래서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도 완전하지 않다. 죄 중에 빠질 때가 많고 심지어 우상을 여호와 함께 겸해서 숭배하기도 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결국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분께로 눈을 돌렸다.

 

오직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고 언약을 맺은 후로는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 후손들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사랑을 베풀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백성은 당신을 찾기만 하면, 긴급한 때만 찾아도 혹은 비록 죄 중에 있더라도 아니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더욱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밤새 고뇌한 내용은?

 

그럼 다윗이 밤새도록 고뇌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전의 고난들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주셨는지를 회상하되 그분의 능력이 아니라 성품에 비추어봤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돌아봐도 하나님에게 기쁨을 얻을 만큼 잘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새벽을 깨운다고 했다. 밤새도록 혼란스럽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조차 그분의 마음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대신에 그분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뜻이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 왜 이런 문제 하나쯤 바로 해결해주지 않지 의심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문제나 고난이 겹쳐서 힘이 들 때는 누구라도 정신이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그렇다. 가장 먼저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지고 그저 당황되고 곤혹스럽기만 하다. 특별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걱정, 염려, 의심, 불만, 불신, 분노, 저주, 억울한 생각 등이 겹쳐 도무지 올바른 사고의 틀을 형성할 수 없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우리 모두 항상 절감하는 대로다. 감정적 혼란과 이성적 고뇌를 한참을 거친 후라야 겨우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기도 중에도 여전히 감정과 사고는 무질서 속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도와 달라 구해달라는 기도부터 먼저 하다가 차츰 그분이 어떤 분인지 생각이 모아져야만 비로소 겨우 평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 평강이 사실은 기도의 첫째 응답이다.

 

다윗이 밤새 고뇌 기도한 결론이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평강을 넘어선 것이다. 그분의 자신을 향한 기쁨에 이제 자신도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변 상황에 나아진 것은 전혀 없다. 겨우 하루 밤새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당연하다. 여전히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다윗 외부에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반면에 변한 것 오직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내면이다.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보다 성품을 붙든 것뿐이다. 새롭게 깨달은 것이 아니다. 평소에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을 되살려 재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 같고 함께 가지 않은 것 같았지만(10,11절)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우리를 이끌고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고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고 고백했지 않는가?(13절)

 

흥미로운 것은 지금 다윗은 모압, 에돔, 블레셋 같은 주변 대적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전날 밤이다. 군사력으로 그들보다 열등하지 않다. 많은 전쟁 경험이 있다. 철저하게 준비 훈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밤새 불안하고 걱정에 떨었다. 그러다 새벽에야 승패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 하나 다시 확인했다. 참으로 우리의 연약함은 끝이 없고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은 그에 비례해 끝이 없다.

 

고난을 이기는 길은?

 

우리도 고난 중에 밤새 잠을 못자고 새벽까지 뒤척일 수 있다. 고난을 이기는 길은 그분을 찬양하는 것뿐이다. 억지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승리는 그분이 주신다는 맹목적 신뢰도 아니다. 그분의 성품을 생각해보라.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은 두말할 필요 없지 않는가?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은 항상 하나님은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런 때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따져보라.

 

만약 우리의 고난이 일일이 우리가 잘못한 것 때문에 받는 벌이라면 역으로 말해서 잘난 것이 있다면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내가 잘해서 받는 보상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그렇다면 또 나쁜 일로는 반드시 고난을 받되 달게 받아야 한다. 또 응당 받아야 할 벌이라면 그 고난을 없애 달라고 그분에게 기도할 필요나 이유는 애초부터 전혀 없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그분 앞에 당당히 내세울 만한 것을 평생을 두고도 제대로 쌓지 못한다. 영적으로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한 채로 일생을 보낸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이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럼 고난 중에는, 그 원인이 어느 쪽에 있던지 간에 더더욱 그러하지 않는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가? 어서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만 해선 안 된다. 어서 빨리 해결하라는 것은 바로 그분의 능력만 발휘하라는 뜻이다. 아니다 그분의 인자와 진실을 생각하면 반드시 언젠가는 그분의 방식대로 선으로 이끄시고 그것이 오히려 나의 유익이자 그분의 영광이 된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럼 나에게 평강이 임하고 그분에게는 찬양 밖에 올려드릴 것이 없게 된다. 밤새 잠을 못 잤더라도 새벽에는 목청 높여 그분을 기뻐할 수 있다. 당신은 새벽을 깨우는가? 새벽까지도 염려하는가?

 

4/2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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