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믿는데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조회 수 2558 추천 수 212 2008.11.03 21:09:40
귀신은 믿는데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


흔히 듣는 이야기로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특정한 장소가 있다. 그것도 교통이 혼잡하지 않는 시골 길에서 빈발하며 사고가 나는 상황도 거의 비슷하다. 예컨대 우중충하고 바람 불고 비오는 가을날 오후처럼 이전에 사고가 난 날짜까지 일치한다. 심지어 그런 날에 근처를 지나는 운전자가 귀신을 보았다는 증언도 한다.

점쟁이 가운데는 정말로 귀신이 들린 자가 있다. 젊은 처녀가 늙은 남자 목소리로 과거지사와 현재 일어나는 일을 신기하게도 잘 맞춘다. 또 박수무당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둥실 둥실 춤을 잘도 춘다. 본인의 능력으론 그럴 수 없다. 귀신이 무당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다.  

또 일반인이 귀신에 들린 경우도 있다. 수시로 눈이 돌아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 마치 헐크처럼 변한다. 간질 같은 질병으로 인한 발작 증세와는 다르다. 그 사람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정신병으로 분류하여 치료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기도하여 쉽게 낫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무당도 그런 자를 고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체험의 증언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는 믿는다. 또 모든 증언들이 부정적 결과와 영향력을 이야기하므로 귀신을 두렵고 무섭게 여긴다. 한 마디로 귀신은 악한 영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악한 영의 존재는 인정하고 또 그 영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다 못해 아예 그 영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선한 영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아니 그런 존재가 있는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이처럼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문제마저도 자기가 보고 듣는 한도 내에서만 판단한다.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아예 사고의 문을 닫아 버린다. 모든 분별과 추론을 지금껏 배운 지식과 체험에만 의존한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항이 아니면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쉽게 말해 남의 말에는 그저 귀가 쫑긋하지만 논리정연하고도 합리적으로 스스로 철학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무조건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해버린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 받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귀신은 믿고 선한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귀신이 이 땅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실제로도 얼마나 많은 불신자가 점쟁이를 찾아가 자기 인생의 앞길을 의탁하려 드는가? 주로 개업, 취직, 결혼, 입시, 출산 같은 대사(大事)를 앞두고 점쟁이를 찾아가니까 큰일일수록 더 귀신의 조종을 받겠다고 자청하는 꼴이다.

미신을 믿지 않아 점은 절대 안 본다는 사람들도 단지 확률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하거나 비지성적 행위인 것 같아 싫어할 뿐, 귀신의 존재를 믿는 데는 크게 차이 없다. 그 대표적 증거가 바로 조상 제사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상을 추모 감사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며 가족 간의 화합을 추구하는 선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혹시 잘못 모시면 그 원혼들이 자기들 일을 훼방하고 복 주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럼 귀신의 존재 뿐 아니라 귀신이 자기 삶을 조종하는 것도 믿는 셈이지 않는가?  

혹시 불찰로 또는 도무지 여유가 안 되어 조금 성의 없게 제사 드릴 수도 있다. 그런데도 토라져 죽어서도 후손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드는 조상귀신이라면 과연 제사 드리며 공경할 만한 대상이 되는가? 결국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하거나 안 해도 분명 악한 영의 조종을 받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또 거의 대분의 사람이 제사를 지낸다면 세상 전체가 사단에게 묶여 있지 않는가?

동일한 장소, 상황, 시간에 교통사고가 빈발한다면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힘들다. 그런 곳인 줄 미리 알고 겁먹은 자가 아닌데도 귀신을 보았다면 단순한 환각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장소인줄 잘 아는 자라면 사전에 조심하기에 사고도 나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죽은 원혼이 구천에 올라가지 못해 현장을 배회 한다 쳐도 사후 세계와 심판과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지 않는가? 그럼 사후세계마저 귀신이 전부 관할한다는 뜻인가?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지성적인지 미신적인지를 따지는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적 신념에 관련된 주제도 아니다. 자기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에 귀신의 개입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여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 모두가 이미 실제로 악한 영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렇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가르쳐 주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드니까 너무나도 어리석기 짝이 없지 않는가? 아무리 지성적으로 똑똑한 자라도 영적인 문제에서 만은 완전 까막눈이니 더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 모든 불신자의 꿈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눈에 안 보이는 방해 세력만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치는 등 실제로는 귀신의 조종을 받고 있으면서도 귀신의 훼방을 받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꼴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선한 영에 대해선 전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인생을 마쳐 버린다. 그야말로 귀신에게 마지막 영원한 운명까지 맡기는 꼴인 줄도 모른다.

그럼 과연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고 또 우리 후손들이 계속 살아야 할 이 지구가 귀신들만의 천국 내지 놀이터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귀신을 두려워하는 이상으로 선한 영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실체를 반도 알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셈 아닌가 말이다.  
  
성경의 놀라운 지적

놀랍게도 위에서 지적한 내용들이 성경에는 이미 다 진술되어 있다. 인간의 영적 실태를 있는 그대로 너무나도 정확하게 해부 진단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고 불신자들은 귀신의 조종을  받아 세상 풍속만 좇는다고 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단의 조종을 받은 결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즉 오직 자기 기분대로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원인도 바로 사단이 그 마음을 혼미케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사실은 귀신의 조종을 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귀신의 훼방을 막는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특별히 십자가에서 사단을 이긴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절대로 귀신의 방해를 물리치지 못한다. 그 반대로 무차별적으로 당하기만 한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자는 평생 점에만 의존한다. 무당에게 굿을 하면 처음 얼마간은 상황이 호전되지만 점차 다른 더 큰일이 발생해 굿의 단가만 올라간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신자더러 죄의 유혹에 빠질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경고인데 사단이 배고파 우는 사자처럼 먹이만 나타나면 집어 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깨어있지 않는 불신자는 백이면 백 다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무당이 귀신을 쫓아냈다고 선하거나 옳은 측면이 있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비방했다. 당시에도 무당들이 간혹 귀신을 쫓아내는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늘날도 미개한 지역에 가면 주술사들이 그런 이적을 보이기도 한다.

그 비방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언뜻 보면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러고서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 대답의 초점은 예수님 당신이 결코 사단일리 없다는 데에 있다. 또 사단도 항상 자기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그 논쟁 끝에 이렇게 말씀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한 귀신이 쫓겨 나가도 나중에는 일곱 귀신이 들어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당이 주술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다음에 더 큰 귀신을 집어넣기 위한 일시적 눈속임이다. 사단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사기술이다. 점치고 굿하러 오는 자들에게 더 큰 두려움으로 올가미를 씌워 완전히 노예로 삼으려는 짓이다. 심지어 무당이 굿하면 사업이 형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마찬가지로 반드시 더 큰 다른 문제가 터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단이 사람들에게 병을 낫고, 사업이 흥하고, 귀신을 쫓는 것 같은 좋은 일도 일으키지만 어디까지나 가장(假裝)일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단의 일군인 무당들은 마땅히 심판 받지만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자들도 마지막에는 큰 낭패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수님의 귀신 쫓음과 무당의 그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무당은 자기 노예로 묶으려는 목적이므로 잠시 치유된 것처럼 속인 다음에 더 큰 귀신을 집어넣거나 다른 불행을 겪게 만든다. 진짜로 치유해주는 것이 목적이 결코 아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의해 한 번 쫓겨 나간 귀신은 그 본인이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절대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

거룩한 목적으로 점쟁이를 찾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주 된 이유는 자기 계획하는 일을 소원대로 이뤄달라는 것이다. 역으로 따지면 인간의 일을 제 멋대로 훼방하는 막강한 힘을 두려워 한다는 반증이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세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왜 방해꾼의 존재만 인정하는가? 그 반대로 선한 영적 세력은 왜 믿으려 들지 않는가?

그 이유는 한 가지다. 귀신은 항상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을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선 점쟁이나 무당 집을 가보라. 배경 그림, 조명, 향냄새 등으로 얼마나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가? 또 작두 위에 맨발로 춤추는 모습도 보라. 우선 옷이나 음악부터가 혼을 빼 놓는다. 왜 하필 작두 위에서 맨발이어야만 하는가? 가장 기묘하고도 신비하게 보이려는 눈속임이다.

귀신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임에도 때때로 자기를 드러나게 만듦으로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도록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예컨대 돼지 머리가 크면 클수록, 차린 음식이 풍성하면 할수록, 복채가 많으면 많을수록 병이 잘 낫고 점괘도 좋게 나온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이유도 한마디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자에겐 당연히 크고 풍성한 것이 더 나아 보이기 때문이지 않는가?

결국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 물어 보는 것은 오직 재물을 더 많이 획득하는 방안과 개업 결혼 취직 같은 큰 결단을 요할 때의 주의 사항뿐이다. 한 마디로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풍요와 개인적인 안락이다. 아무리 굿의 단가가 올라가도 큰 불평 않고 지불하는 것은 어차피 구하는 것 자체가 돈이니까 그 정도쯤은 투자를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손님이 점쟁이에게 묻는 것 이상으로 점쟁이가 손님에게 가르쳐 주는 대책도 요상한 것뿐이다. 몇 대 독자인 아들 부부가 아직도 손자를 못 보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지금 며느리에게 마가 끼었으니 그 며느리를 내쫓고 새로 결혼하든지 아니면 첩이라도 얻으라고 한다. 동업자나 동료직원을, 심지어 약혼할 상대를 믿지 말라는 주문은 다반사다.

점집에서 논의되는 질문과 해법 둘 다 오직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에서 풍요와 안락만이 주제다. 다른 말로 “어떻게 하면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있을까?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면 좋을 것인가? 영원한 진리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묻는 법은 절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며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헌신이나 결단을 바치는 법은 결코 없다.  

예수님이 지적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나는 점쟁이나 무당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고 모든 종교가 다 싫다. 법을 잘 지키고 남에게 절대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양심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또 내 형편 닿는 대로 남들을 도와준다. 정말 인간끼리 서로 양보 사랑하며 이 땅을 잘 보존하면 인간 사회를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들도 많다.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고 삶의 터전인 지구를 잘 보존하자는 것은 너무나 선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인간끼리 잘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사상은 단지 고상한 표현을 했다 뿐이지 따지고 보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생관의 가장 대표 케이스다. 여전히 이 땅이 전부이자 최고로 간주하는 바탕에서 나온 사상이지 않는가?  

나아가 인간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다른 어떤 힘도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끼리 유사 이래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 경주했어도 유토피아를 성취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최소한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가? 아니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가? 정말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따져 보면 그 답이 전부 “No”라는 것을 상식이 있는 자라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다고 수긍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간디가 임종 며칠 전에 “내게는 어둠 밖에 없다. 나는 빛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알다시피 평생에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무저항 운동으로 일관하여 인도의 독립까지 쟁취한 영웅이었다. 도덕적으로 그만큼 의로운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영원한 구원을 원하기는 했지만 얻지 못했다. 아니 마음의 평강조차 없었다. 그마저 영적 문제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는 증거다.

반면에 초등학교 밖에 졸업 못한 구두수선공이었다가 하나님을 만나 복음 전도자가 된 디엘  무디는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 날은 나의 승리의 날이다. 나의 대관식 날 영광스러운 날이다” 처형을 목전에 둔 바울도 자신에게 하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딤후4:8) 인간의 노력으로는 궁극적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노력은 인간 세상에서만 통할 뿐이다. 죽음 이후 천국의 세계는, 나아가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세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관여한다.

간디가 평생에 이룬 일이 소용, 필요, 가치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 아무리 존경을 받았어도 정작 본인은 참다운 평강과 안식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온전한 안식은, 다른 말로 인간으로서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곳은 오직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품 안 뿐이다. 간디는 평생을 두고 그곳은 외면하고 오로지 자기가 정한 목표를 자기 힘에 의존해 이루려 노력한 것뿐이었다.

비록 자기가 소원했던 목표는 달성했겠지만 막상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할 시점에서, 다른 말로 정상에 올라 와봤더니 그 정상이 텅 비워져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선하고 의롭게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목표를 둔 대표자였다. 다른 말로 귀신은 믿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 일반인들과 같은 부류였을 뿐이다.  

지금껏 무당과 점쟁이나 미신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초등학생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귀신같은 나쁜 영적 세력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실체를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조종에 놀아나고 있는 인간의 영적 실태가 너무나 불쌍하다는 뜻이다. 점쟁이를 찾아가 묻고 받은 해법대로 하는 것은 정말로 귀신 장난에 춤추는 짓이지 않는가? 돈을 바쳐 가며 자기 영혼을 귀신에게 팔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간혹 점은 치지 않지만 제사 지내는 것은 옳다고 주장하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사후세계와 영적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찾지 않으면 결국 영적 차원과 사후 세계를 오직 귀신이 지배하고 있기에 살아생전부터 귀신에게 잘 보이겠다는 뜻 밖에 더 되는가?

반면에 선한 영적 존재, 즉 하나님은 일상에서 당신의 실체를 보이게 드러내는 법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사단과는 다르게 인간을 겁주어 협박하지 않는다. 창조 당시 에덴의 동산에서부터 그랬다. 우선 그분은 진정으로 기꺼이 당신을 찾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또 구태여 당신의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천하 만물에 당신의 신성을 보여 알게 했고 또 인간의 양심에 당신을 닮은 형상을 심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고 그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 놓은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신다.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참 정체성을 회복하고 충만하게 인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눈에 안 보이는 성령을 통해 당신께서 직접 이끄신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풍요와 안락만을 집착하지 않게 하신다.

죽기 직전에 가서야 헛되고 헛되다는 실토와 함께 지난 인생을 후회로만 마치는 영혼들을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여기신다. 그래서 살아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라고 오늘도 쉴 새 없이 그들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며 구원으로 초대하신다. 당신의 품 안에 겸비하게 들어오기만 하면 영혼의 풍성한 평강과 안식을, 물질의 풍성함 대신에, 주시려고 말이다.    

철학자 버나드 쇼는 자기 무덤의 비석에 이런 글을 써놓았다고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인생은 짧고 단 한 번뿐으로 반복이 절대 불가능하다. 그만큼 덧없이 순식간에 흘러갈 수 있다. 반면에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하고도 귀하게 보낼 수 있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는 사실상 아주 간단하다. 귀신을 믿고 실제 그 조종을 받음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전자의 인생이 된다. 반면에 귀신이 있다면 반드시 선한 영적 세력도 있을 것이라고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진지하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후자로 가는 고속도로는 눈앞에 나타난다.  

11/3/2008

김순희

2011.02.19 13:03:47
*.165.73.38

ㅋㅋ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진리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름 묻는다
상상을 하니 너무 웃겨서요ㅋㅋㅋ

신자로서 선하려 노력하고 공로 쌓으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해 주시어 영생을 선물로 주신 그 은총을 앉으나 서나 찬양을 하는
그리고 너무도 감격하는 하루 하루가 되길 소원하고 소원합니다.^^

목사님은 둘째 아드님 매일 업고 다니셔야겠어요.
그 아들의 기도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셨으니요.^^

하태광

2011.02.22 15:59:47
*.32.182.220

하나님께서 둘째 아드님 입술 네비게이션을 통해 목사님을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의 고속도로로 인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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