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맛 잃은 소금

조회 수 5219 추천 수 125 2007.03.10 09:52:14
♣ 막9:49-50(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들어가기

  ▲ 앞서 나누었던 단상 ‘빛과 소금’의 요점은 ‘빛과 소금은 모든 성도의 위상으로서 실제적 사명은 자신을 소모(희생)하여 타인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지만 공적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에 대해 허경조 형제님께서 “이 글에 있는 의미로 본다면 마가복음 9장 49-50절은 어떻게 묵상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으셨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은 운영자이신 박 목사님 같으신 분께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 따라서 허 형제님의 요청은 명백히 무리한(?) 것입니다만, 비전문가의 견해가 궁금하여 하신 질문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한번 더 귀중한 말씀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 이후의 글에서 성경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발견된다면(신학적인 잘못은 크게 괘념치 않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용기 내어 시작하겠습니다.


▣ 막9장의 주요 사건 정리

  ▲ 막9장을 주제별로 보면 적어도 6가지의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변형 사건(2-8절). ②하산 시의 대화(9-13절), ③하산 후의 제자들의 실패 사건(14-29절), ④변화산 아래 마을에서 갈릴리로의 이동(30-32절), ⑤가버나움에서의 토론(누가 크냐)(33-37절), ⑥축사 행위에 관한 처리 방안 토의(38-50절) 등이 그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 사건(주제)이 다수 기록되었다는 점을 참작하면, 질문 구절인 49-50절 말씀이 9장 전체와 관련된 것이냐 아니면 마지막 사건인 축사와 관련된 것이냐의 확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야 보다 정확한 의미 해석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물론 신학자들의 공통된 이해와 같이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나머지 복음서에서는(공관복음은 물론 요한복음까지) 막9장 사건들이 연속된 일련의 사건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즉, 막9장만 읽으면 연속 사건 같지만 실제는 불연속 사건들로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 막9장처럼 정리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시간적 선후(先後)가 전도된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만, 오늘 묵상에서는 이 점(연속 사건 여부와 선후 문제)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 아무튼 저는 49-50절을 막9장 전체의 기록 의도와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 및 지면 관계상 범위를 조금 줄여서 마지막 제⑥사건(38-50절)을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축사 사건(38-48절)의 개략적 정황 해석

  ▲ 38절에 의하면 귀신을 내어 쫓은 자는 주님을 따라 동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익명인의 축사행위를 금지시켰다고 보고합니다.

  ▲ 이에 주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42절에서 “이 소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축사 사건에 있어서 ‘소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님의 진의가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①견해 : 41절만 보면, ‘소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특히 42절을 41절의 종속절로 볼 경우 이렇게 받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듯합니다.

    ○ ②견해 : 그러나 42절을 41절의 종속절이 아니라 병행절로 볼 경우, ‘소자’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현실적으로 동행하지 않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는지 모릅니다. 즉, 사도 요한에게 꾸중 들었으나 주님께 인정받은 자를 가리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주제에서 벗어납니다만, 어떤 목사님께서 41-42절을 ‘평신도의 목사 존경’ 근거 구절로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는 ‘목사’(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므로), “저”는 ‘평신도’, “소자”는 ‘목사’를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목사에게 물 한 그릇만 바쳐도 천국의 상을 얻는데, 보다 큰 것을 가져다주면 오죽하겠느냐는 설명이었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평신도는 속하지 않았다는 설명도 그렇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속내도 그렇고, 매우 엉뚱한 해석이라고 웃어 넘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 아무튼 축사 사건(38-48)에 있어서 ‘소자’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인 것 같아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셔서, 만약 소자를 실족시키면(죄에 빠트리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48절) 지옥에 떨어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 저는 위의 2가지 견해 중, ②견해에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38절의 ‘주님을 따르지 않았던 축사 시행자’를 의미할 가능성이 상당히 열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38-40절의 뉘앙스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놀랍지만, 주님 당시 실제 주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처럼 느껴집니다.

    ○ 먼저, 주님은 주님을 따르지 않은 축사 시행자(38절)를 믿는 자로 인정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40절). 축사 행위는 성령을 힘입어야만 행할 수 있는 일로서 귀신의 능력으로는 실행되지 않는 현상입니다(마12:22-28). 따라서 주님은 이미 축사 시행자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축사 시행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사도에 비해 약자의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사도 요한은, 자기들은 명백한 제자이면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제③사건), 이 축사 시행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축사에 성공한 것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질투로 인해 축사행위금지를 요구했을 수 있습니다(38절).

    ○ 이러한 모든 정황과 상대적 위상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퇴출 위기에 처한 축사 시행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소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축사 행위를 통해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된 미약한 자(소자)를, 단지 주님을 직접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 49-50절의 의미 해석

  ▲ 학자들의 견해를 확인해 보니, 49절과 50절은 난해한 구절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문자 자체의 의미 해석도 어렵지만, 48절 이전 구절과의 연결 여부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 먼저 49절은, 앞의 절에 연결되어, 48절의 “(지옥)불”이 곧 49절의 “불”이라는 해석입니다. 실제 헬라어 성경에는 한글개역에 누락된 ‘가르’(gar=영어의 for)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49절 하반부의 “소금 치듯 함”은 ‘지옥불의 격렬함’을 상징하는 비유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극한 고통을 강조한다는 의미입니다.

    ○ 성경에는 소금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멜라오’(melach)라 하며, ‘불변성/영원성’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민18:19절 및 대하13:5절의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 또 소금은 제물을 성결하게 만드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출30:35; 레2:13절 등).

    ○ 한 가지 더 짚어봐야 할 것은 흠정역(KJV)입니다. KJV는 49절을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타 역본에 비해 ‘and' 이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소금으로써 제물을 성결케 한다.”는 뜻을 첨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은 부분적 고찰들을 종합한다면, 49절은 48절 이전과 연계하여,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지옥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이는 소금처럼 변개되지 않는 선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다음은 50절로서, 이 구절은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소금의 기본적인 역할(기능)을 재강조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 여기서는 소금의 ‘조미(맛) 기능’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소금의 주요 기능인 ‘부패방지=정결 기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반절의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신앙의 맛’을 의미한다기보다 ‘불변하고 영원한 말씀 즉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로스’(analos)라고 하는데, 이는 ‘소금이 없는/소금 성분을 잃은’의 뜻입니다. 상당수의 영역본들도 ‘lost its salti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의 “맛”은 ‘조미 기능과 정결 기능’을 함께 암시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 어떤 학자는 본문에 나오는 소금의 의미를 33-42절까지 포괄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섬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겸손/사랑/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절제/경건 등으로 나타나는 삶이 필연적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50절의 의미를 ‘심판 때에 불로 소금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 속에서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50절 하반절에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이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금’은 앞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약속 즉 언약’을 의미합니다. 소금(언약)의 기능은 ‘신앙의 맛을 유지하고 신앙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나아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좀 전에 말씀드린 자기희생/겸손/사랑/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절제/경건 등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평소 삶 속에서의 ‘희생’(소금의 중요 특성)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이상과 같은 의미와 해석을 참작하여, 저는 일종의 전의(轉義) 개념으로서 “소금”을 먼저 된 제자들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막9장에서는 사도들이 해당되겠지요. 오늘날에는 목사와 장로 등 영적 성숙자들이 될 것이고요.    

    ○ 그렇다면 50절의 “그 맛”과 “화목”이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50절에 담긴 영적 요구는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소모)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화목)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 종합 해석(38-48절 해석과 49-50절 해석의 통합)

  ▲ 이 문제는 앞에서 제법 상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쉽게 정리될 듯합니다.

  ▲ 즉, 38-48절에서 “소자”는, 사도들처럼 주님의 측근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축사 시행자처럼 주님으로부터 다소 멀리 떨어진 자로 인식되는, 소외자들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물론 앞에서 약간의 토의가 있었으나 이 소외자의 범주는 주님을 믿는 자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또, 49-50절에서 “소금”은, 맛과 부패방지 기능을 고려할 때, 먼저 주님을 믿어 성숙된 자들(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이라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따라서 축사 사건의 뜻은, 먼저 믿어 성숙된 자들이 나중 믿어 미성숙된 자들을 잘 섬기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49-50절의 의미는, ‘만약 이러한 제자의 기본 사명에 실패하면 응분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나가기

  ▲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를, ‘못 말리는 승귀 욕망’(누가 크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적을 쌓고 이를 근거로 명예 누리는 삶이 옳다.’는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세상에서 인정되는 가치체계입니다만 성경마저 이에 동조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성경이 성도들에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신 뜻은, 소금의 기능인 맛과 부패방지를 완수하라는 것인데, 이는 당연히 소금 자신의 소모(희생=없어짐)를 전제한 개념입니다. 소금이 남아있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증명일 뿐입니다. 따라서 공로가 있는 성도(목사든 장로든)가 그 공로의 덕을 계속 본다면, 이는 사라지지 않은 소금과 다름없기에, 본연의 사명을 완수했다 평가받기 곤란합니다.

  ▲ 두 번에 걸쳐 살펴본 소금의 비유는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정리하면, 50절은 하나님의 약속인 소금언약을 마음에 품음으로써(소금의 희생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상호간의 평화(화목)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소모(희생)되어야 부패가 방지되고 바로 이 상태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화목”인 것이지요. 만약 이에 실패하면 49절의 경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비극에 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지난번 단상(빛과 소금)의 요지와 맥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많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보다 좋은 깨우침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김문수

2007.03.11 09:36:17
*.74.63.27

마태복음 5장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나님사랑-이웃사랑]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역할 [신자의 역할]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복이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너희는[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가복음 9장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하나님사랑-자기사랑]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자기이름을 높이고자---자기가 더높다 -너는 나에비하면... 세상의 명예 자기 이름]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이웃사랑]--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사랑[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십자가사랑 그 사랑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성령] 이웃사랑
인간의 사랑과 정신으로는 절대 실현불가능한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의 완벽한일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신만이 빛과 소금의 역할 감당함
세상속에서 자기의 이익을위해 자기를 드러내기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충실히하면--[하나님은 다알고계심]--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소금이 아님-[십자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오직 예수 십자가 사랑 !!!!!!!!!!!!!!!!!!!!!!!!!!!!!!!!!!!!!!!

김 계환

2007.03.11 12:21:43
*.219.71.34

형제님과 같이 진지하시고 훌륭하신 분과 늘 교제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니 더욱 감사합니다.
아래 복사한 부분은 제가 자주 참고로 하는 netbible 의 주석입니다.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해서...
형제님의 견해가 더 좋아보이지만 군더더기로 붙여보았습니다. 감사

61 tc The earliest mss ([א] B L [W] Δ 0274 Ë1,13 28* 565 700 pc sys sa) have the reading adopted by the translation. Codex Bezae (D) and several Itala read “Every sacrifice will be salted with salt.” The majority of other mss (A C Θ Ψ [2427] Ï lat syp,h) have both readings,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will be salted with salt.” An early scribe may have written the LXX text of Lev 2:13 (“Every sacrifice offering of yours shall be salted with salt”) in the margin of his ms. At a later stage, copyists would either replace the text with this marginal note or add the note to the text. The longer reading thus seems to be the result of the conflation of the Alexandrian reading “salted with fire” and the Western reading “salted with salt.” The reading adopted by the text enjoys the best support and explains the other readings in the ms tradition.

sn The statement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is difficult to interpret. It may be a reference to (1) unbelievers who enter hell as punishment for rejection of Jesus, indicating that just as salt preserves so they will be preserved in their punishment in hell forever; (2) Christians who experience suffering in this world because of their attachment to Christ; (3) any person who experiences suffering in a way appropriate to their relationship to Jesus. For believers this means the suffering of purification, and for unbelievers it means hell, i.e., eternal torment.

62 sn Salt was used as seasoning or fertilizer (BDAG 41 s.v. ἅλας a), or as a preservative. If salt ceased to be useful, it was thrown away. With this illustration Jesus warned about a disciple who ceased to follow him.

63 sn The difficulty of this saying is understanding how salt could lose its saltiness since its chemical properties cannot change. It is thus often assumed that Jesus was referring to chemically impure salt, perhaps a natural salt which, when exposed to the elements, had all the genuine salt leached out, leaving only the sediment or impurities behind. Others have suggested the background of the saying is the use of salt blocks by Arab bakers to line the floor of their ovens: Under the intense heat these blocks would eventually crystallize and undergo a change in chemical composition, finally being thrown out as unserviceable. A saying in the Talmud (b. Bekhorot 8b) attributed to R. Joshua ben Chananja (ca. a.d. 90), when asked the question “When salt loses its flavor,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s said to have replied, “By salting it with the afterbirth of a mule.” He was then asked, “Then does the mule (being sterile) bear young?” to which he replied: “Can salt lose its flavor?” The point appears to be both are impossible. The saying, while admittedly late, suggests that culturally the loss of flavor by salt was regarded as an impossibility. Genuine salt can never lose its flavor. In this case the saying by Jesus here may be similar to Matt 19:24, where it is likewise impossible for the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sewing needle.

정순태

2007.03.12 08:10:49
*.95.73.2

부끄럽습니다.
지식이나 영성으로 보아 함부로 성경해석에 나설 위인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봐 주시는 형제님의 아량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려주신 자료는 참 고맙습니다. 해석이 어렵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구체적인 해석사례가 궁하던 차에 형제님께서 귀한 자료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잘 활용하겠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오히려 형제님의 글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한때 창조과학회 연구물들에 대히 관심이 많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속적인 도움주시기를 부탁드려 봅니다. ^^

허경조

2007.03.12 23:25:24
*.183.39.252

먼저 정순태집사님꼐 이런 글을 올리게 됐음을 사과드립니다. 사실 게속해서 집사님의 글을 접한 저로서는 웬만한 교역자들 보다 신뢰했기에 무리한 것을 알면서도 글을 올렸읍니다.
또한 평신도의 눈으로 묵상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었읍니다.

한주 넘게 아버님을 비롯해서 큰형님이 병원 응급실로 가는 상황이 벌어져 이제야 숨을 돌리게 되어 답글을 올립니다.

30대 초반에 미국으로 이민온 저는 한국의 총신 대학 출신의 목사님들의 설교와 성경 해석에 익숙해졌고
이곳 뉴욕에서도 1세 목사님의 교회에서 몸담고 있다가 교회의 명확한 부조리에 다른 곳으로 두번을 옮기고 현재의 1.5세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교회에서 9년째 지내고 있읍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많은 부분의 해석이 1세 목사님과 다름을 느꼈고 저 자신으로서는 이 분의 말씀해석에
더욱 은혜를 받고 있읍니다.

집사님의 윗글을 보던 주일날 아침 설교가 제가 질문드렸던 본문이었고 (사순절을 맞아) , 그래서 집사님의 글을 읽은후에 이 본문이 떠 올라 글을 올렸읍니다만 부담을 드린 점에 다시금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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