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두 렙돈의 진실

조회 수 3404 추천 수 114 2008.08.16 02:10:46

♣ 막12: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NIV : But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worth only a fraction of a penny).  

후손들은 조상들의 발자취인 역사 기록을 보고 선조들의 삶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른 역사해석의 관건은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오직 과거의 기준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우리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어 얼마나 배를 곯았는지!”라며 옛날을 회상합니다. 듣는 아이들은 “이상하다? 쌀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을 먹으면 될 텐데!”라며 고개 갸우뚱거립니다. 과거의 극한 가난을 체험치 못한 현대 아이들이 굶주림의 처참함을 모르는 것은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해가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체험치 못했고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할지라도 옳은 판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체험 한계 내에서의 제한된 이해력으로써 체험 범위 밖의 현상을 규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위 역사해석의 유의점은 성경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문화적 해석).


일부 학자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에 비례로 따지면 가장 많이 받쳤던 것이다. 과부는 희생적으로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과부의 예를 사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매끄럽지만 올바른 설명이 아닐 수 있습니다. ‘희생적 헌금’이나 ‘인과응보적 기대’라는 이해는 성경 본래의 의미와 동떨어진 오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생겨납니다. 신학교 시절, 위와 비슷한 교수의 설명을 들은 것 같다는 불명확한 기억에 근거하여, 상당수의 목사들은 괴상한 설교를 하곤 합니다. ‘칭찬받은 과부처럼 우리도 몽땅 헌금하여 더 큰 칭찬받자.’는 내용입니다(이런 류의 설교는 차고 넘칩니다). 아마 설문조사를 한다면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본문=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로 인식하고 있음이 밝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위의 주석이나 자주 듣던 목사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당시 과부(성도)의 애환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어야만 바른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따라서 오늘은, 과부의 실상을 참작할 때, 왜 본문을 ‘헌금 보증용 쐐기’로 오용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에 앞서, 본문에 나오는 당시 화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렙돈” (lepton)은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입니다(눅12:59절은 ‘호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1/2 고드란트이고 고드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 데나리온의 1/16입니다. 결국 1 렙돈 = 1/32 데나리온입니다(일부 학자는 1/64 데나리온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일당 10만원이라면 2 렙돈은 약 6,250원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가치 환산이야 어찌되었든, 실제적 가치는 100원짜리 동전 2개로 보면 될 것입니다(1991년 그리스 방문시 기념품으로 구해 두었던 렙돈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영락없는 10원짜리 동전입니다).

우선 2천 년 전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야 합니다. 과부는 서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입니다. 과부에게 ‘돈’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돈의 진면목은 ‘교환가치’에 있습니다만, 이것이 다시 ‘구매력’으로 표현되고 결국은 ‘영향력’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최하층민 과부는 돈을 사용함으로써 구매력을 과시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할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과부는 돈으로 거래한 경험이 전무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세대의 경험으로도 설명됩니다. 50대 이상 되신 분들은 잘 아십니다. 어린 시절 돈 쌓아놓고 생활비 사용했던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년 농사짓고 가을쯤 되어야 목돈 한번 만질 수 있었고, 평소 생활비는 항상 쪼들렸습니다. 책값이나 월사금 못 내서 쫓겨나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 기억될 것입니다.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돈이란 언제든 쉽게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현대사회는, 화폐 교환이 필요 없는 신용사회로까지 발전되었고, ‘화폐란 쉽게 만질 수 있는 물건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과부가 살았던 시대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과부 시대에는 돈이 늘상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최하층민들에게는 평생 한 번 만지기도 쉽지 않았다는 진실을 짚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과부는 항상 돈을 쌓아놓고 생활하다가 딸랑 두 렙돈만 남게 되자 부랴부랴 헌금했던 것이 아닙니다. 겨우 100원짜리 동전 2개에 불과했지만, 평생 처음 만져보는 돈이었고, 그것을 헌금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한 추정이라면 몇 가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부의 행위에는 말 못할 애달픈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첫째, 과부는 성전에 올 때마다 두 렙돈씩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헌금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실로 각박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본문 기사는 과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헌금이었을는지 모릅니다.
  
둘째, 그렇다면 과부에게는 어떤 절박함이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본문을 대할 때마다 오버랩되는 사건은 사르밧 과부입니다(왕상17:12). 마지막 밀가루로 최후의 떡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던 비장한 자살계획은 엘리야의 매우 철면피한 요구(찢어 붙일 것도 없는 소량의 밀가루를 자기가 먼저 빼앗아 먹겠다는)로 인해 좌절되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애처로운 순종이 목숨을 부지하는 은혜로 바뀌어 3년 기근 극복의 동인으로 작용되었습니다만, 사르밧 과부에게는 죽음과 대면할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본문의 과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두 렙돈이 과부의 마지막 남은 생활비였다면 과부는 그날 저녁부터 굶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비오스, bios) 같은 생활비(비오스, bios)를 투척했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절박함의 표출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그리고, 비록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데리고 가셔서 저녁을 대접하셨는지 모릅니다).  

셋째,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소유를 헌금했다는 사실은 ‘생명의 포기에 버금가는 아픔’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경우라면 본문을 가지고, 위의 주석처럼 ‘희생적 헌금이나 인과응보적 기대’로 해석하거나, 일부 목사들처럼 ‘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로 곡해하는 것은, 어설픈 겉멋일 수 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희생이나 보험 차원이 아닌 ‘전 생명’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부유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2천 년 전 각박했던 과부의 행위를 판정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를 살았던 과부 입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과부의 입장과 처지에서 본다면, 본문의 행위는 처절함의 극치일 수 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성경이 명백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본문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전 소유(생전 처음 만져보는 전 재산)를 헌금하지 않을 수 없는 과부의 처절한 상황과 심정을 아시는 주님께서, 과부의 그 애통하는 심령을 칭찬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아픈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본문은 흔히 듣는 바와 같이 편의주의적 ‘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다 깊이 깨우치신 지체들의 바른 이해를 기대해 봅니다. ♣  


주님과함께

2008.08.16 15:43:11
*.7.13.27

감사합니다~
생각의 지평을 널히는 좋은글 은혜받습니다(^-------------^)
제가 좀 담아갑니다.

정순태

2008.08.17 06:22:29
*.75.152.169

매일 주님과함께 형제님의 카페를 둘러보는 것이 습관입니다!
성경 보는 관점이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좋은 글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고 화려한 신앙모습들에 관심갖지 않기로 한 후,
오히려 성경의 참 맛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 땅 향하신 뜻을 깨우치라는 것이
성경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좋은 교제 계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201 [이의] 이새의 아들은 7명인가 8명인가? 정순태 2009-06-27 7551
200 [묵상] 언약궤와 성막의 생이별 사연 [3] 정순태 2006-12-06 7087
199 [묵상] 솔로몬은 과연 회개하고 구원받았을까? [5] 정순태 2008-03-08 6017
198 [묵상] 맛 잃은 소금 [4] 정순태 2007-03-10 5220
197 [단상] 지금이 원어성경 읽기에 가장 적합한 때!!! [1] 정순태 2012-03-10 4949
196 [이의] 100세 이상 차이 나는 사촌 오누이? [1] 정순태 2012-03-24 4863
195 [묵상] 천국체험 주장들 -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 [4] 정순태 2007-05-05 4742
194 [이의]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살아 있었는가? [6] 정순태 2009-06-27 4064
193 [단상] 오순절 다락방 사건과 방언의 상관관계(행1:1~2:13) 정순태 2007-11-24 3697
» [단상] 두 렙돈의 진실 [2] 정순태 2008-08-16 3404
191 [목자상] 05. 권위와 권세의 의미 정순태 2009-11-14 3387
190 [이의] 목사(포이멘)은 오역인가? 정순태 2012-02-11 3344
189 [의문] 에브라임 족보의 의문점들(대상7:20-27) [6] 정순태 2006-12-31 3301
188 [이의] 선지학교 창건자는 사무엘이다? [2] 정순태 2008-08-01 3199
187 [이의] 선지자 사무엘은 레위인이다? 정순태 2012-05-26 3136
186 [목자상] 06. 소명(사명/부르심) 신학의 오해(1) [1] 정순태 2011-03-26 3060
185 [묵상] 천사에 관하여 [2] 정순태 2007-01-20 2971
184 [서평] 교회생활은 평생 벙어리를 요구하는 시집살이? 정순태 2008-09-26 2930
183 [묵상] 성경 읽는 방법 – 어떻게 읽을 것인가?(1) [5] 정순태 2012-12-22 2859
182 [의문] 400세가 넘은 비느하스? 정순태 2007-02-03 2814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