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 주님의 사역개시 나이는?

조회 수 2788 추천 수 186 2006.12.10 07:37:11
        
♣ 눅3: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요8:57(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 들어가기

   ◉ 거의 모든 성도들은 주님께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어 3년간의 사역 후 33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믿습니다.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생각은 기독교 역사 2천 년 간의 흔들림 없는 지식이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데, 일부에서는 주님의 공생애 활동개시 시기가 그보다 훨씬 늦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십세 정도로 추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일부 성도들의 추정이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된다면 우리의 신앙 지식은 크게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이 견해는 저도 처음 접하는 새로운 것이라 아직 나름대로의 견해를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이러한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 주님은 40대 후반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 이러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일본의 엔도 슈사쿠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분의 견해를 이재철 목사님이 인용하면서 이 목사님도 동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출처:요한복음설교집 요한과 더불어 세 번째 산책/홍성사/이재철/pp.274, 385-391)

     ○ 눅3:23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기서 ‘쯤’이란 헬라어로 호세이(hosi)로서 문제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즉, 대단히 조직적이고 분석적인 두뇌를 소유한 의사 누가는 아무 생각없이 30세쯤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리하여 엔도 슈사쿠는 많은 히브리 문헌을 확인한 결과, 유대인들은 나이든 사람이 마치 젊은이처럼 왕성하게 일할 경우 그를 가리켜 ‘30세쯤 되었다’라고 묘사한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즉, ‘청년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에 엔도 슈사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는 30세가 아니라, 적어도 40대 초반, 아니면 40대 후반이거나 50대였을 것으로 추정했답니다. 이렇게 추정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펴볼 때, 이 정도의 원숙한 나이가 아니고서는 마치 인자한 아버지와 같은 언행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답니다(이상은 이재철 목사님이 인용/설명한 내용입니다).

     ○ 이재철 목사님은 엔도 슈사쿠의 견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견해를 추가합니다.

        - 만약 주님 나이가 30세였다면, ‘고작 30밖에 안 된 주제에’라고 했을 것이다.

        - 만약 주님 나이가 40 초반이었다면, ‘이제 겨우 40밖에 안 된 처지에’라고 했을 것이다.

        - 만약 주님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면, ‘아직 오십도 안 된 주제에’라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오늘 본문(요8:57)의 유대인들의 반박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으며, 그렇다면 당시 주님의 나이는 50세에 근접한 48-49세 정도였을 것이다.

        -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탈진한 것과 십자가에서 일찍 돌아가신 것 등의 사항들은 주님의 초로의 장년의 체력과 관련된다.  

     ○ 상세한 내용은 직접 이 목사님의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엔도 슈사꾸의 견해에 대한 신뢰성 검토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 새로운 견해를 제기한 엔도 슈사꾸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사가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소설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가도 올바른 글을 쓰기 위해 정확한 사실을 알려고 노력은 합니다. 특히 역사소설 같은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크게 손상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흥미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픽션’이라는 절대적 요건을 피해갈 방도는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상당한 살을 붙이게 마련입니다. 이때 활용되는 인간적인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직관력입니다. 소설가에게는 지극히 필요한 재능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소설가인 김성일 장로님의 경우,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김성일 장로님의 기독소설들은 재미도 있고 직관도 우수합니다). 예수님의 활동개시 연령을 40대 내지 50대로 추정한 슈사꾸의 견해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또 한 가지는, 슈사꾸가 히브리 문헌을 연구했다고는 하지만 연구의 기간과 강도(깊이)에 큰 신뢰를 보내기는 쉽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써야 하는 직업적 필요를 제쳐두고 성경 연구에 몰입하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수년 정도의 연구만으로 위와 같은 주장을 펴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한 마디로, 엔도 슈사꾸의 주장은 전문가가 아닌 한 사람의 평신도의 개인적 견해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겠습니다.

   ◉ 하지만, 이재철 목사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목회 경력을 지니신 목사이고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신실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의 신앙과 경륜과 인격을 고려할 때, 그분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목사님도 동의하신다는 슈사꾸의 견해 - 수용할 수 있는 견해일까요?

▣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개시시기 및 기간과 관련된 표현은 앞에서 인용한 눅3:23절과 요8:57절 밖에 없습니다.

   ◉ 따라서 성경을 통해 이 문제를 추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것입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이처럼 제한된 말씀을 근거로, 인간의 건전한 추론만으로 이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평신도의 능력에 비추어 매우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평신도로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 나가기

   ◉ 이처럼 난처한 경우, 평신도에게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 한가지 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여쭈어 보는 것이지요. 잘 모르는 것을 붙잡고 끙끙대 봐야 거둘 것이 없으니까요.

   ◉ 이 글을 읽으시는 목사님 또는 신학자들께서 전문가다운 타당한 답변을 해 주신다면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꾸벅~~~ ^0^

김문수

2006.12.10 10:14:54
*.74.149.4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인간의 짬밥 인정 안해주심
어릴때 부터 인간의 지혜 압도해버리심(영적 권세)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 2:40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절대 지존 다우십니다!!

순태 형님!
제가 쓴거 답변아닙니다!!
그냥 댓글입니다!!
필승!!!!!!!!!!!!!!!



조재춘

2006.12.11 05:37:47
*.29.165.87

샬롬!!
예수님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주님의 보혈과 은혜의 말씀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형제님의 나눔에 대해서...

저희 교회 지체가 나눈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간증으로
저의 짧은 견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누렸던 간증이라...

사랑의 예수님!!

일요 예배에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요일 들려온 말씀은 예수님이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과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선명한 말씀이었다.
성경 속에서의 예수님이 성경 밖에서도 입증이 되었고 AD와 BC를 나눌 정도로 유명한 역사적인 분이었다.
그리고 4대 성인 중 한 분으로 명망을 떨치셨던 분이었다.
그 당시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해서 동요가 있었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성경에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인 것을 가리고 사람이지만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라는 교묘한 생각으로 사람들 속에 침투해 있었다.
예수님을 못 보도록 혼미케 해 놓은 것이다.
그 역할이 시간이었다.
악한 영들은 세월이라는 시간을 이용해 그 당시 예수님의 생애를 흐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예배 시간에 다시 정립시켜 주셨다. 사람이 이렇게 속아 올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역사적인 분이시고 부활이 사실인 것을 통해서
성령님의 존재도 사실인 것이 부각이 되어 다가왔다.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분인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님,
그분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존재하신 것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사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비추어졌다.
역사적인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정말 추상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게 하는 것을 막아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너무나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한다는 그 말씀도 사실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내가 어떻게 이런 존재가 되 버렸는가?
삼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이 분이 사실이었던 것이 확실한 만큼 이분만이 진리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면 이 세상은 가짜라는 것도 확실해 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악한 영이 존재한다는 것,
정말로 악한 영이 죽이고 멸망시키고 말씀을 빼앗아 사람의 힘을 빼앗아 간다는 것을
26년에 걸쳐 모르고 지내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점점 내 신분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 땅이 얼마나 진리가 없는 곳인지.
얼마나 거짓 투성이인지 그 진리 앞에 한숨과 함께 이 분이 오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은혜에 깊은 감사가 나오게 된다.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이 너무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고뇌와 사랑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님과 내가 한 몸, 한 생명이 되버린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람으로 사셨다는 의미가 가져다 준 것은
예수님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 느끼고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그 분이 느끼시고 겪으신 일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 내 생애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보면 눈물이 난다.
이렇게 가까이 그분을 체험할 수 있다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다니....
그것은 그분이 이땅에 사셨을 때 그래도 우리와는 다르지.
하나님이니까 이 런 생각이 가져다 주는 오해가 풀리면서 알게 된 것이다.
너가 오십도 안되어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했을 때
그 오십이라는 나이에 갑자기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고생을 하면 얼굴이 그렇게 되셨을까?
젊은 청년의 모습이 오십의 나이로 비추어진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눅 1장은 너무 고생을 많이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것을 묵상하고 있으면
또 마음이 아파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수욕을 가하는 장면에서는 예수님 자리에 내가 들어가
그분과 오버랩되면서 눈물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나라면 피하고 싶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 모욕을 당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을 다 느끼셨을 예수님에게로 내 마음이 향하게 되었다.
왜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지 다 아시는데 왜 그순간 입을 다무셨을까?
그것이 사랑이었는데, 그분의 온 생애가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몸부림이었는데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어둠, 이땅.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셨던 예수님.
심한 통곡으로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생애가 가슴이 시리게 다가왔다.
내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난 것이다.
엄청난 십자가 형을 대신 받으심으로 대신 살아난 것이다.
구원이 값싼 것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 전에 예수님이 치룬 희생의 대가는 눈뜨고 못 보는 엄청난 고난과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분과 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속의, 역사속의 예수님의 발자취가 너무나 가까이 내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발자취를 우리 공동체가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한참 이것을 생각하다 스데반 집사와 용필이의 죽음을 생각했다.
집회 가운데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라는 것이 들려왔었다.
스데반 집사가 죽어 가는 가운데 주여 저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용필이가 사형장으로 끌려갔을 때 보인 행동들,
즉 눈이 풀리고 다리가 인형처럼 힘이 없이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용필이가 중보 기도 뒤에
보인 그 엄청난 행동들을 생각해 보았다.
거짓말 같은 그 행동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 있었던 일이었다.
엄청난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용필이를 붙잡았던 그 능력,
죽음의 공포를 덮었던 그 놀라운 능력이 스데반 집사님에게 그리고 용필이에게 임했다.
성령님이 다가왔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성령님이 다가왔다.
예수님도 사람이었고 나도 사람이다. 나에게도 성령님이 계신다. 예수님과 동일하다.
예수님과 그래도 무엇인가 틀릴거야라고 했던 그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구나를 알면서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너무나 놀라웠다.
이분과 내가 동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에 처했다니......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2년전에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은 그 말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성령님의 관계를 알면서 말이다.
예수님의 삶이 내 삶이 되고 동일한 성령이 계시다는 것이 내 지식의 한계로는
인정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이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부활이 사실인 만큼 성령님의 존재도 사실이고 내가 예수님과 동일한 조건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따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싶다. 성경속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날마다 쫓아서 그분을 만나고 싶다.
아! 사랑의 예수님!
아멘!!

참고로 용필이는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 "하나님은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려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0)

성경을 통한 메시지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모든것을 생각나게 하심에 아멘!!!

늘 좋은 묵상과 귀한 만남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안에서 강건하십시요!!


국중후

2006.12.11 13:33:13
*.147.129.77

이글을쓰신 지체분은 마치 스데반 집사를 보는것 같습니다.

김 계환

2006.12.12 00:40:04
*.219.92.91

안녕하세요 정 순태형제님
또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질문을 띄워 놓으셨군요
정답은 아니지만 제가 지금까지 발견한 가설중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씀드리지요
다시 Herold Camping의 책인데요 제가 이분이 주장하는 교회시대의 종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다른 많은 그분의 가르침들에서 정말 놀라운 것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이부분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의 책 Time Has an End에 페이지 309-330을 참고로 하세요(WWW.familyradio.com 에서 Literature를 여시면 이책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 결론만 말씀드면 예수님의 탄생하신 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되는데 기원전 7세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셨고 기원후 29년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의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언됬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의 나이가 37세(7+29-1: Year 0가 없으므로)가 되겠네요
자세한 설명은 그 책을 참고로 하세요 감사

정순태

2006.12.12 12:02:11
*.75.152.120

우리가 성경이 명백히 밝히지 않는 부분까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분은 왜 이렇게 해 놓으셨는가에 대한 답변으로서, 보다 깊은 은혜 주시기 위해서라고도 하더군요.

주님의 사역시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0세든 40세든, 성경이 밝히지 않은 것은 우리 구원의 필수 사항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모른다 해서 우리 신앙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성을 주신 하니님의 뜻에 비추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까지 제한받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으신 답변들(댓글), 감사합니다.
특히 김계환 형제님의 추천은 더욱 고맙습니다. 영어 실력이 짧아 대충 읽기만 했습니다만, 처음 접하는 설명이군요.
시간을 갖고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는' 맛은 기대 이상으로 달콤한 것 같습니다. ^^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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