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교사의 고백 - 그 마음 한 조각

조회 수 1545 추천 수 119 2007.02.17 12:09:23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는 대다수의 교사들에게는 매주 반복되는 씁쓸할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기도와 열정으로 준비한 말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난주의 약속과 전화를 통한 다짐도 헛수고, 먼저 참석인원부터가 흡족치 않다. 예배 참석을 약속해 놓고도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여럿 눈에 띈다.

편치 않은 마음을 추스르며 분반공부를 시작하고 말씀 한 마디라도 더 증거 하려 애쓰며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영 아닌 것이다. 곁눈으로 스쳐보는 학생들의 교재는 어찌 저리도 깨끗한지, 마치 주인의 마음을 닮은 듯, 글자 한자 쓰여 있지 아니하다.

“그래,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주님의 자녀! 아무렴, 당연히 깨끗해야지!” 억지로 마음을 달래보건만 문제는 주님을 알아가는 길은 그게 아니기에 마음이 개운치 못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체념을 하며, 준비한 질문을 해 본다. 교사의 불편한 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학생들은 머리를 떨구고 입을 닫는다. 설명을 해도 질문을 해도 한결같이 묵묵부답이다.

“대답이라고 좀 시원시원하면 안 되나? 목소리나마 좀 크면 안 되나?” 피리를 불든 애곡을 하든 무반응으로 일관했던 사람들(마11:17)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이 시기쯤부터 교사의 마음은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한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화를 낼 수도 없기에 불편한 마음은 내부적인 원망으로 싹튼다.

“왜 우리 반은 이럴까? 좀 더 활기차고 갈급한 심정으로 사모할 수는 없는가?” 침체된 분위기의 원인이 학생들에게로 전가된다. 교사의 열정은 쓸만한데, 학생들의 자세가 잘못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학교공부를 핑계 대며 단 한 번의 QT도 하지 않고, 해당주일 공과에 단 한 자의 글씨도 쓰지 않은 체로 교회에 나아오는 학생들의 태도는 결코 권장할만한 하다거나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교사의 자세는 학생보다는 훨씬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교사로서의 사명을 항상 인식하고 있고, 잘 가르치려는 열정 또한 뜨겁다.

이제 생각은 학생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모아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학생이다. 학생들이 변해야 한다. 학생들의 자세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정리해 가고 있는데, 뭔가가 찜찜하다.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듯 느껴진다. 그게 무얼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너는 내가 귀히 여기는 이 영혼들을 비방하지 말라. 내가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너를 돌아보라.”  

침묵 속에서 서서히 눈이 밝아진다. ‘오, 이럴 수가?’ 교사인 내가 그렇게도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임을 어느 순간엔가 깨닫게 된 것이다. 나를 답답해하시며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눈길 속에서, 옳은 생각과 자세로 사역을 감당해 왔노라 자부하던 내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자기 최면이었던가를 발견하게 된다.

성전에서 당당히 기도하던 바리새인이 드디어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보고 세리와 같이 자신의 죄를 깨우치는 은혜의 순간이 온 것이다.

‘소위 교사로서 나는 나를 합리화하는 외에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받고 있는 압박을 이해하고 있는가? 사회환경에서 받고 있는 유혹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가? 가정생활에서 오는 신앙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있는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 본 적이라도 있는가?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갈무리되어 있는 믿음에의 갈망을 짐작이나마 해 보았는가?’

부끄럽게도 나는 학생들의 어느 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오직 나의 가치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며 무관심/무응답/무열정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 입장만 내세우며 학생들의 자세만 탓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운 마음 가눌 길이 없어진다. 원인은 학생에게가 아니라 바로 내게 있었다. 가슴을 찢어 회개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릎 꿇는 외에는……

성령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은 이처럼 내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감사하게도 점차 예수님을 조명하는 수준으로 진행된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3년 사역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으나, 그중에서도 제자훈련의 가치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귀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든 것을, 심지어는 심령 속의 부족함과 아픔 등 모두를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연약함까지도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이다.

제자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의 원인을 제자들에게 돌리려 생각지 아니 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이시고 눈물로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사랑으로 양육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의 모든 것을 알고 가슴으로 품어 주셨다.

잠시 수제자인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양육법을 생각해 보자. 베드로는 성령강림 이후 수제자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했던 우리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사도였다. 그러나 그도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났을 때까지도 아직은 형편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주님을 3번 부인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끝까지 주님을 잘 몰랐다. 부활하신 주님을 2번이나 뵌 후에도 그는 여전히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심스러운 수준의 인간이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만나러 오셨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이 3번의 물음은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 상태에 관계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성령께서 오시면 비로소 네가 알게 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을 너에게 부탁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현상태를 보고 실망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이 땅에서의 모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흡족하신 상태로 승천하신다. 무얼 믿을 게 있는 제자들이라고 예수님은 이처럼 당당히 행동하셨을까? 오늘의 교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참으로 놀랍고도 고마우신 교사직분을 우리에게 감당케 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주님의 이 제자양육 방법을 우리가 이해하고 따르기를 바라고 계신다!

교사인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제자훈련의 주체는 교사도 아니요 학생도 아니라는 점이다. 교사의 유능함이나 학생들의 우수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제자훈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성령강림 후에라야 베드로가 온전하고 굳건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말씀 듣는 순간에 변화될 수는 있지만(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베드로처럼), 굳건해지려면 결실의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봄철에 심은 씨앗은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요점은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성령강림)를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끝으로, 교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교사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교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오직 눈물과 애통함이다. 학생들을 주님께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눈물어린 간구 밖에는 없다. 눈물과 사랑만이 좋은 교사의 유일한 요건인 것이다.

<주님! 지극히 어리석은 자가 이제야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탁하신 교사직분의 고귀함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시고, 학생들의 무표정에 상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주소서. 이를 위해 오직 눈물로 제자들을 가슴에 품으신 예수님의 그 아픈 마음이 다만 한 조각만이라도 우리에게 있게 하소서. 먼 훗날 이 아이들의 좋은 밭에서 맺혀질 생명 열매들을 인하여 감사드리니이다. 아멘!>

김문수

2007.02.18 09:15:51
*.91.0.140

순태 형님 !!
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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