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쑥 캐는 남자

조회 수 572 추천 수 26 2012.02.04 14:40:43
                      
개나리 꽃봉오리가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다. 간혹 고개 내민 풀포기도 보인다.

집사람이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온천 좀 다녀옵시다. 가는 길에 냉이랑 쑥도 좀 캐고…”

사내대장부를 어떻게 보고 이런 망발이냐며 일언지하 거절한다. 그녀도 공감한다.

얼핏 ‘나물 캐는 아내 보디가드 하는 것이야 어떠랴.’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자고 한다.

아내의 나물 캐는 것을 지켜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봄나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쑥은 아는데 냉이는 미심쩍다. 냄새 맡아보고 나서야 겨우 구분해 낸다.

천하에 쓸모없는 잡풀을 보고 고민하는 모습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자연스레 거들게 된다. 냉이를 판별해 주고 쑥도 조금 캐준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봄나물 캐는 맛과 멋을 안다. 봄나물 캐기의 진수는 냉이나 쑥이 아니다. 그것은 달롱(달래의 고향 사투리)이다. 달롱이라야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른 봄의 들녘은 아직 황토 빛이다. 잡풀이 먼저 돋아나고 가끔 냉이도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여 살핀다. 달롱이다!

갓 돋아난 달롱 줄기는 아주 가늘고 연약하다. 색깔도 황토색과 비슷하여 발견이 잘 안 된다. 일종의 보호색인 것이다. 좀 더 자라야 초록색이 된다.

호미로 흙을 파낸다. 널찍이 파다보면 하얗고 동그란 달롱 대가리가 나타난다(고향에서는 머리라 하지 않고 항상 대가리라고 한다). 대가리를 잡고 뽑아낸다.

콧속으로 전해지는 진한 내음, 봄 향기이다! 이 향기를 맡아야 비로소 진짜 봄인 것이다.


사실 달롱 캐는 멋은 조금 다른 데 있다. 어린 시절의 비밀스런 추억이기도 하다.

아주 어릴 때는 주로 엄마나 누나가 봄나물 캐는 것을 따라 다닌다. 그러다 좀 더 자라면 남자 친구들끼리 온천지를 쏘다니게 마련이다.

가끔 나물 캐는 또래 여자애들을 만난다. 여자애들은 종알종알 수다 떨기에 여념 없다. 쪼그려 앉은 애들의 뒷모습이 아담하다. 보기 좋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부끄러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아랫집 순희가 있는지, 곁눈질하기에 바쁘다.

여자애들은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만 가라고 눈치를 한다. 좀 더 버텨보지만 점점 무리임을 안다. 자리를 뜰 수밖에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뜬다.

이것이 추억 속에 갈무리된 ‘달롱 캐는 숨겨진 멋’이다.


아내 옆에서 서성이다 ‘달롱 찾겠다.’며 오가지만, 때 이른 논두렁에서 발견될 리가 없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심풀이로 쑥을 뜯다보니 한 손 가득이다.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캐고 있는 아내에게로 갔다.

아내는 냉이를 제법 캤다. 작년보다 변별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다. 한 소쿠리(사실은 비닐봉지였다) 쯤 되었기에 그만 하기로 했다.

온천에서 나오는 길에 전통 곡차를 한 통 샀다. 집에 와서 냉이 된장과 쑥 국에 곁들여 한 잔 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봄맛과 봄향기를 즐겼다.


비록 ‘꽃을 든 남자’처럼 우아한 모습은 아니었을망정 ‘쑥 캐는 남자’ 역할 수행하며 한 나절 보낸 것도 좋은 추억일 듯싶다. 자주 끌려 나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올 봄 첫 들나들이는 이렇게 끝났다.

작은 미소 머금고 자리에 든다.


정순태

2012.02.04 14:47:37
*.75.152.52

복귀 신고에 겸하여
작년 봄 중학교 동창 카페에 올렸던 글을 옮겨봅니다.
수술 이후 특별휴가(病暇)를 얻어 쉼으로써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2월부터 다시 출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도 열심히 합력하기로 하겠습니다.

운영자

2012.02.04 15:16:22
*.104.233.248

연대장님이 우렁찬 승전가(?)와 함께 다시 등장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처럼 연약하지만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모습으로 오셔서
훨씬 더 보기 좋습니다. ^^

경상도에선 달롱개라고 하지요.
이곳 미국에 살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봄 향내 짙게 나는 달롱개나 쑥나물, 또 그것들을 넣은 된장국을 접하기 어렵고
(LA에는 한국슈퍼에 팔긴하지만 향이 한국만 훨씬 못함)
산자락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 꽃잎을 따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올 봄에도 사모님과 함께 온천에도 다녀오시고
달롱 나물 많이 드셔서 이전보다 더욱 강건해지시길 기원합니다. 샬롬!

이선우

2012.02.05 14:10:11
*.202.153.88

필~~~~승!!!
돌아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 그 속에서 배어나는 성숙함과 잔잔한 부부애..
와~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mskong

2012.02.06 10:41:17
*.226.142.23

회복 되셨다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집사님의 모습이 선하네요... 자주 뵙겠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2.10 22:21:12
*.109.85.156

'꽃을 든 남자' 보다 '쑥 캐는 남자'가 훨 멋져 보여요.
한국의 날씨가 어쩌면 이다지도 춥다냐 소리가 떠나질 않는 요즘
연대장님의 글을 보니 벌써 봄 내음이 솔~~솔 나는 듯 합니다.
건강 회복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도요.. 저주 뵙겠습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1 [묵상] 빼앗기지 않은 축복? 정순태 2012-08-04 626
180 [단상] 매스-미디어[mass-media]들은 교회를 칠 자격이 있나? [1] 정순태 2012-07-14 537
179 [묵상] 젖과 단단한 식물 [1] 정순태 2012-06-30 1118
178 [회상] 어느 부목사와의 교제 [1] 정순태 2012-06-23 731
177 [단상] 죽도록 충성하라! 누구에게? 정순태 2012-06-16 748
176 [이의] 성소 안에서 잠 잔 사무엘? 정순태 2012-05-28 1425
175 [이의] 선지자 사무엘은 레위인이다? 정순태 2012-05-26 3138
174 [단상] 빙산의 일각이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1] 정순태 2012-05-20 510
173 [단상] 어느 시골 고등학교의 별난 십계명 [1] 정순태 2012-05-12 636
172 [단상] 유혹은 이길 수 있어도 미련은 떨치기 힘들다? [4] 정순태 2012-05-07 715
171 [이의] 100세 이상 차이 나는 사촌 오누이? [1] 정순태 2012-03-24 4863
170 [단상] “단지 십 인”(only ten)이 없어서… [2] 정순태 2012-03-17 1353
169 [단상] 지금이 원어성경 읽기에 가장 적합한 때!!! [1] 정순태 2012-03-10 4950
168 [re] [스크랩] 신학하는 그리스도인 [6] 정순태 2012-03-10 1065
167 [re] [스크랩] 왜 서양 고전어를 배워야 하는가? 정순태 2012-03-10 894
166 [묵상] 사신공식(使臣公式)Ⅱ(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1] 정순태 2012-03-03 1056
165 [묵상] 신사적인 성도와 야만적인 성도?(2) [1] 정순태 2012-02-25 556
164 [묵상] 신사적인 성도와 야만적인 성도?(1) [4] 정순태 2012-02-18 638
163 [이의] 목사(포이멘)은 오역인가? 정순태 2012-02-11 3344
» [수상] 쑥 캐는 남자 [5] 정순태 2012-02-04 5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