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스크랩] 신학하는 그리스도인

조회 수 1065 추천 수 31 2012.03.10 00:34:31

                      [스크랩](신학) 신학 하는 그리스도인
                (출처:http://www.kirs.kr/ 칼럼 이환봉 교수 칼럼)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신학하는 사람이 되자! -


한국 교회는 그 경이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문화 속에 보다 완숙한 차원의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복음과 문화를 분리하여 생각하고, 영적 부흥과 실제적 삶을 연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적 신앙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 또는 역동화하지 못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 내지는 화석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앙과 생활 속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자신의 실재적인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신앙과 생활의 이중적인 틀 속에서 끝없는 갈등과 혼동 그리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서의 “아멘!”이 일상생활의 현장에서의 “아멘!”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영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유아들은 자신의 생활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거나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형성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없다. 성숙하여 장성한 사람들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상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으로 성숙하여 온전한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충만에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우리는 단순한 믿음과 전적인 신뢰를 특징으로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막 10:15)은 늘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나 항상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히 5:12) 유아적인 신앙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로 부터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할 유아들이 많이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말하고 깨달으며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날로 새롭게 배워가는 자이다. 그래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장성한 자들이 되어 단단한 식물도 먹으면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히 5:13-14)이 되어야 한다.

특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보다 성숙하여 갈 것을 권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곧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학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우리 영혼의 양식을 제공한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영혼은 먼저 그 지성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먼저 내 머리 속에 있지 아니한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속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을 우리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보다 더 온전히 알면 알수록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더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을 때에 그 “뜻”은 “생각하는 기능, 지성, 이해”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하여 신학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하나님 지식의 추구를 위한 신학연구의 노력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지식이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이라는 것은 아니다.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기 위하여 꼭 있어야만 하는 조건을 말한다. 그것 없이는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산소(oxygen)는 불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산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사실상 우리에게 천만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산소가 자동적으로 불을 일으킨다면 온 세상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소는 불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불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체계적 지식(신학적 지식)은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영적 성장을 위해 꼭 있어야할 필수조건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속에 불 붙여 주셔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참된 하나님 지식이 없이는, 신학하지 않고서는, 신학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영적 성장도 온전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며 구원(성화)을 온전히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을 먼저 바로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한 것이다(요17:3).

그 외에 성경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롬10:17, 롬1:16, 마28:19-16, 요17:17, 엡6:17, 살후2:16).


하나님은 우리가 부지런히 신학을 연구하도록 명령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교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은혜 안에서 날로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숙한 지혜는 성숙한 생활을 위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적 생활을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장성해 갈 것을 명령하신다(엡4:13).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영원히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며 만족을 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자랑할 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나를 아는 것과...깨닫는 것이라”(렘9:23-24).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거룩한 의무이기도 하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하나님의 율법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서 하나님의 계시에 능한 자들이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보다 더 분명하고 높은 수준의 성경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전체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진리에 대한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연구(요5:39), 상이한 부분들의 비교와 조화(고전2:13), 그리고 계시의 큰 중심적 사실(골1:26-27)에 유의함으로 보다 온전한 하나님 지식에 이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이 대부분 교회의 성경공부가 성경 개별 본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구체적인 적용에 치중함으로 성경전체와 하나님의 포괄적인 뜻(the whole counsel of God)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교회들의 새로운 인식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삶이 없어도 건전한 신학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건전한 신학이 없이는 건전한 삶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의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건전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 그 이상의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로 신학연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적인 존엄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이선우

2012.03.12 14:13:37
*.187.97.1

(극비- 모년 모월 모일 모처, 강호일검과 강호일심이 회동하여 나눈 대화록의 일부임)

일심: 형님, 오랜 만입니다. 지난 섣달 일원지회 이래로 좀 소원했습니다.
일검: 그러게 말이야, 아우님. 그동안 내공은 많이 늘었는가?
일심: 아, 늘기만 했다 뿐입니까? 기세충천하니 뵈는게 없습니다.ㅋㅋ
일검: 나도?
일심: 윽, 당근 아니지요. 태산북두와 일검, 일권, 일의, 일미님이야 제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거지요.
일검: 흠, 당연히 그래야지. 하여튼 나는 지난번 2차 주화입마에서 겨우 회복했을 뿐이라네.
일심: 제가 보기엔 이제 오기조원을 넘어 등봉조극의 상태에 오른 것 같은데요?
일검: 아니야,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 남으려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네.
일심: 그래도 기왕에 만났으니 논검은 해야겠지요?
일검: 그래, 어디 아우님의 새로운 공력을 볼까? 시작하게나.
일심: 옙! 자 갑니다. 노에마, 프로네마, 누스, 그리고 싸륵스!
일검: 헙, 앞의 세 개는 정공인데 마지막은 사공이구만.
일심: 일검에게 이기려면 꼼수 좀 써야지요.ㅋㅋ
일검: 좋아. 싸륵스는 프뉴마로 막고, 소마 상태에서 카르디아, 프쉬케, 루아흐!
일심: 앗, 비블로스의 비전 무공이 나오다니.. 큭, 졌습니다.
일검: 아우님, 별거 아니네. 나는 비블로스 뿐만 아니라 파라독소스와 스타우로스 비전서도 가지고 있네.
일심: 아, 그렇게나 방대한 무공을 다 익히셨단 말입니까?
일검: 뭐, 다 익힌 것은 아니고.. 내 창원서고에 차곡히 쌓아놓고 있지.
일심: 대단하십니다. 다시 한 번 존경의 염을 표합니다.
일검: 훗, 태산북두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일심: 하긴, 넘 볼데를 넘 봐야지요. 강호말학 저 일심, 한 수 잘 배웠습니다.
일검: 뭘. 그나저나 자네같은 후진들을 위해 이번에 내 비전서고를 개방할 생각이네.
일심: 와, 큰 결심 하셨습니다. 절말 감사합니다.
일검: 열심히 갈고 익히게. 무공의 길은 끝이 없는 거야.
일심: 오로지 정진과 수련이 중요하겠지요. 충성!

그렇게 강호일검은 후진들을 위하여 그의 방대한 창원서고를 개방하고
끊임없는 무공 정진과 후진 양성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의 크나큰 결심으로 후학들은 새로운 무공의 길에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나 강호일심은 그의 뜻을 기려 여기에 그 날의 극비 대화록도 공개한다.
.
.
.
.
(ㅋㅋㅋ 웃으면 복이 옵니다~ㅇ 웃을 분만 웃으세여~~ ^^O^^)

운영자

2012.03.12 15:00:52
*.104.233.248

죄송스럽게도 이젠 그예다 무림 강호들의 이름마저 다 잊었는데
오랜 만에 두 고수의 대화 장면을 읽으니 저절로 웃음이 ㅋㅋㅋㅋㅋ

이선우

2012.03.12 23:23:24
*.222.244.147

ㅋㅋㅋ 태산북두님께서 잼있다 하시니 저 일심이 용기를 내어 위 대화록의 해설편을 붙입니다. 그냥 재미로만 보세요..^^

- 해설편 #1:
그예다 무림 강호의 탄생은 아마도 2010년 8월에 그동안 잠정 은거(?)했던 강호의 고수 강호일검이 무림 재출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때로 회고합니다. 바트 어만 비록을 발견하고 나서였지요.^^ 그래서 저 강호일심이 무림특보를 때맞춰 발간했습지요. 그 당시 2010년8월9일자 무림특보를 그대로 여기에 다시 옮깁니다.

<강호일검의 무림 재출도에 즈음하여>

장풍과 도검이 난무하는 강호무림의 세계..
아, 사마(邪魔)의 세력은 갈수록 창궐해 가는데,
정의의 힘은 약해져만 가고 있으니..

이에 태산북두(泰山北斗) 박신님은 뜻한 바가 있어
어지러운 무림 세계에 정의를 실현코자 동지를 모았고,
여기에 강호삼객(江湖三客)이 정의의 칼을 높이 들었나니.

검술의 달인 강호일검(江湖一劍) 정순태님,
권장(拳掌)의 달인 강호일권(江湖一拳) 김유상님,
화타의 화신이라 불리우는 강호일의(江湖一醫) 김계환님.

그 중 강호일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한다면,
그의 신검합일(身劍合一) 동작과 어검술(馭劍術)의 공격으로
사마외도는 맥을 못추고 싸움터마다 추풍낙엽이었으니.

그외 무림계의 뜻있는 인사들이 태산북두를 돕고자 모였는데
절륜쌍모(絶倫雙母), 출해신룡(出海神龍), 강호오기(江湖五奇) 등
이들의 위명도 만만찮지 않은가?

정과 사가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어느 날,
아, 강호일검의 갑작스러운 무림 세계에서의 은퇴 선언,
주화입마(走火入魔) 직전까지 가는 대접전으로 인한 후휴증이었으니..

이에 태산북두 박신님은 강호일미(江湖一美) 원의숙님을 추가 영입했고,
이어 초청한 무림계의 무명소졸(無名小卒)인 이선우님은
별다른 명호가 없어 임시로 강호일심(江湖一心)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강호일검은 은거 중에도 꾸준히 무공 증진에 힘쓰던 중,
동료 강호일권의 도움을 받아 어만(蓹滿)이란 상고비급(上古秘笈)을 발견,
쌀로별님과 장필희님 등 은거 기인들의 격체전공(膈體傳功)으로 기사회생..

이제 강호일검은 목하 새로운 신공을 완성하여
과거 신검합일, 어검술의 경지를 넘어
심검(心劍)의 최후단계인 무형검(無形劍)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그가 조만간 정의지검(正義之劍)을 다시 들어올리기를 기대한다.
태산북두를 비롯한 다른 江湖四客(강호일권, 강호일의, 강호일미, 강호일심)과
‘그예다’라 이름하는 정의군단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줄 것임을 확신한다.
(무림특보 끝)


- 해설편 #2:
강호일검의 2차 은거는 뜻하지 않는 육체의 주화입마로 인한 것이었으나, 태산북두를 비롯한 강호 동도들의 한결같은 격체전력(= 중보기도^^) 덕분으로 이번에도 기사회생한 바 있었습니다. 일원지회는 제가 몇몇 회원님들과 함께 작년 12월 서울 일원동의 삼성병원으로 병문안 간 것을 일컫습니다.


- 해설편 #3 (원어 설명)
노에마(Noema)- 고후10:5 참조, 단순한 일상적 생각
프로네마(Phronema)- 롬8:6 참조, 이성적, 논리적 생각
누스(Nous)- 롬12:2, 엡4:23 참조, 마음씨 또는 마음의 자세
싸륵스(Sarx)- 롬7:14 참조, 죄의 본성이 거하는 육 또는 육신
프뉴마(Pneuma)- 영 또는 성령 (영어의 Spirit)
소마(Soma)- 몸 (싸륵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육체를 말함)
카르디아(Kardia)- 마음 또는 마음 밭 (영어의 Heart)
프쉬케(Psyche)- 혼 (프뉴마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루아흐(Ruach)- 히브리어로 프뉴마와 같은 개념 (영, 호흡, 숨)
* 루아흐를 제외한 모든 원어는 헬라어임.
(제가 평상시 묵상했고 좋아하는 단어들을 대충 여기저기 집어넣었습니다.^^)

mskong

2012.03.13 02:42:12
*.226.142.23

많이 웃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시니...오늘도 주님의 복이 가득할 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순태

2012.03.17 02:43:45
*.75.152.242

하이고~~~이런 회합이 있었습니까? 전, 도통 금시초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형제님 내공이 생사경을 넘었고 혜광심어에 능통하심으로
영안(이건 순수한 무협 용어입니다. ^^)으로 제 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고 극비 대화를 하신 것이겠군요!!!
이 형제님의 조화경(생사경보다 한 단계 높은 내공 수준) 내공을 격체전공 받았으므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ㅎㅎ 나는 언제 무협지 주인공 한 번 해보나???????????

이선우

2012.03.17 12:57:13
*.222.244.147

ㅋㅋ 이번 주인공은 당근 순태 형제님이신데....
지난번처럼 노화자로 변신하여 36계 하시려구요? ^^
강호말학인 저로서는 혜광심어보다는 전음입밀 수준이요,
생사경 조화경 보다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 검기상인 수준입니다요.

하여튼 형제님의 폭넓은 성경 지식과 무한 탐구의 자세가 저로서는 너무나 부러워
무협세계를 빙자하여 그 심오한 경지를 글로 표현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장난기 어린 제 잔재주를 너그러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충성!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1 [묵상] 빼앗기지 않은 축복? 정순태 2012-08-04 626
180 [단상] 매스-미디어[mass-media]들은 교회를 칠 자격이 있나? [1] 정순태 2012-07-14 537
179 [묵상] 젖과 단단한 식물 [1] 정순태 2012-06-30 1118
178 [회상] 어느 부목사와의 교제 [1] 정순태 2012-06-23 731
177 [단상] 죽도록 충성하라! 누구에게? 정순태 2012-06-16 748
176 [이의] 성소 안에서 잠 잔 사무엘? 정순태 2012-05-28 1425
175 [이의] 선지자 사무엘은 레위인이다? 정순태 2012-05-26 3138
174 [단상] 빙산의 일각이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1] 정순태 2012-05-20 510
173 [단상] 어느 시골 고등학교의 별난 십계명 [1] 정순태 2012-05-12 636
172 [단상] 유혹은 이길 수 있어도 미련은 떨치기 힘들다? [4] 정순태 2012-05-07 715
171 [이의] 100세 이상 차이 나는 사촌 오누이? [1] 정순태 2012-03-24 4863
170 [단상] “단지 십 인”(only ten)이 없어서… [2] 정순태 2012-03-17 1353
169 [단상] 지금이 원어성경 읽기에 가장 적합한 때!!! [1] 정순태 2012-03-10 4950
» [re] [스크랩] 신학하는 그리스도인 [6] 정순태 2012-03-10 1065
167 [re] [스크랩] 왜 서양 고전어를 배워야 하는가? 정순태 2012-03-10 894
166 [묵상] 사신공식(使臣公式)Ⅱ(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1] 정순태 2012-03-03 1056
165 [묵상] 신사적인 성도와 야만적인 성도?(2) [1] 정순태 2012-02-25 556
164 [묵상] 신사적인 성도와 야만적인 성도?(1) [4] 정순태 2012-02-18 638
163 [이의] 목사(포이멘)은 오역인가? 정순태 2012-02-11 3344
162 [수상] 쑥 캐는 남자 [5] 정순태 2012-02-04 5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