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목사의 권위를 보증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해석과 개인적 이해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현대의 목사는 모세나 다윗에 비견할 위상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무어라 말씀하고 계실까요? 목사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울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 몇 곳을 살펴보고 개인 이해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오해하기 쉬운 대표적 구절들(신약편)

●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목사들은 롬13:1-7절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이 목사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호도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Omnis postestas a Deo)라는 명제로, ‘권위 또는 권세’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구절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여러 견해가 있고 따라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곳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은 흔히 ‘목사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전제된 직분이고 이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위에 있는 권세로서의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평신도가 목사에게 굴복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목사의 영적 권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세상 권세를 향해 취해야 할 성도들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목사들이 아전인수로 해석하듯 ‘목사에게 꼼짝하지 말고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 권력(권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달아 순종하라’는 일반론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아울러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권력자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권력자에게 제한적인 심판권을 위임한 것은 사실이나 무제한적인 범위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절대권은 영원히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만으로 보면, 거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 같으나, 만약 하나님께 불순종이 되는 경우, 세상 권력을 거역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행5:29, 계13장).  

● 다음으로 많이 인용하는 곳은 엡6:5-8절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냥 쉽게 평신도가 목사를 상전처럼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 해석 또한 온전하다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최소한 9절(상전의 임무)까지 확대하여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9절의 “이와 같이 하고”(do the same things to them)의 뜻은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과 같이 상전도 종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상전과 종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일방적 복종을 강조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더욱이 신약성경의 증거로 보건데 목사와 평신도는 상전과 종의 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전과 종이 아닌데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대입하여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해석입니다. 목사와 평신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는 관계입니다. 세상적 상전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본문은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 적용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 히5:4에 아주 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주의해야 할 말씀입니다.

목사들은 흔히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목사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목사 직분은 아무나 취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이다’라는 것이지요. 목사 직분의 신적 기원을 보장하는 말씀으로 받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치 천주교 쪽의 해석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과연 맞는 해석일까요?

그리고 이 부분을 해석하는 저의에는 ‘목사 직분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거룩한 것이므로 아무 불평 말고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이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본문 구절만 독립적으로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여겨집니다만 이러한 해석법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해석은 명백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5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으로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인간적인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별도로 정하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신적 권위를 지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정하신 레위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질서(기준)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 직분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5절 이하).

그런데 오늘날의 목사들은 이 구절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여 목사 안수 교리의 근거로 사용해 버립니다. 이쯤 되면 평신도들이 알지도 못할 것이고 또 뭐라 해도 승산이 충분하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나 예수님에게 적용해야 하는 히브리서 5장 말씀은, 오히려 오늘날의 목사 안수제도 자체가 ‘이 존귀를 스스로 취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으로부터 ‘목사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검증도 해 보지 않고, 신학교 졸업 조건이 마치 목사 직분 수행의 자격요건을 충족한 것인양 치부해 버리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목사들의 반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분명 오늘날 목사 안수제도의 문제점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매우 심장한 말씀입니다.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4절 말씀은 목사 직분의 근거나 권위를 보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5절의 예수님의 권위를 확증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 딤전5:17절도 심심찮게 인용되곤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목사들은 주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즉 ‘목사도 장로이다. 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라는 용어는 확실히 목사를 지칭한다. 따라서 장로를 배나 존경함이 마땅하고 특히 목사에게는 배 이상의 존경을 하라’는 식이지요. 평신도보다 목사가 최소한 배 이상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해석 역시 거부되어야 합니다. 위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디모데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목사인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지침입니다. 목회 측면에서의 권고사항을 기록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서신의 주 수신인은 디모데입니다. 주 수신인을 디모데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위의 목사들의 일반적인 해석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즉,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와 함께 일하는 잘 다스리는 일반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고, 너와 함께 가르치는 장로들은 그보다 더 많이 존경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됩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는, 교회에는 가르치는 직임을 수행하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장로는 다수입니다. 한마디로 이 구절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사역하는 복수 장로들을 존경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평신도들에게 디모데를 다른 평신도(장로)보다 2배 이상 존경하라고 권고한 적이 없습니다.

흔히 듣는 목사들의 해석은 성경을 아무 생각 없이 피상적으로 읽음으로써 바울의 의도와 동떨어지게 오해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인 장로가 목사보다 더 높다거나 더 존경받아야 할 직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누가 높으냐?’로 싸우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다면, 뭐 별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 벧전5:1-5절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목사들은 보통 5절만 뽑아서 강조하기 십상입니다. 아주 목사 입에 맞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에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5절만 해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5절의 중점은 젊은 자가 장로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며 이는 정확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다 서로 겸손으로’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전부 젊은 자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목사들은 ‘장로들에게 철저히 순복하지 않는 젊은 자는 교만한 자이며 하나님이 대적하는 자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목사는 하나님의 편이요 의견을 제시하는 젊은 자는 마귀쯤으로 정죄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젊은 자는 물론이요 장로들에게도 적용해야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젊은 자가 장로에게 순복함이 마땅하듯이, 장로들도 젊은 자에게 순복해야만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4절에 있습니다. 장로 직무 수행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 했습니까? ‘양 무리를 치되 자원하여 이익을 탐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며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본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대로입니다.

이러한 목사의 책무 바로 다음에 5절이 나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목사인 경우에 젊은 자는 장로들을 순복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본문의 강조점은 5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1-4절에 있습니다. 5절은 부속절로서 보강하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를 아는 목사라면 5절보다는 목회자의 책무(1-4절)를 더 강조하여 설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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