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소명신학의 오류(미비점)

앞서 살핀대로, ‘소명’이라는 단어를 오직 목사에게만 배타적으로 잘못 적용함으로써 야기되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목사의 위상’입니다.

현대신학은 목사를 교회의 유일한 단독리더십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를 준천사급에 속하는 별종의 존재로 오도합니다. 이 묵상의 목적이 ‘목사 준천사연화(準天使然化)의 위험’을 경계하고자 하는 데에 있으므로, 이 문제는 묵상 전체에 걸쳐 천천히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목사의 단독리더십의 오해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목사가 교회 리더십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분명 리더십에 속합니다. 문제는 이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단독리더십’으로 비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왜곡된 소명신학’입니다. 한 마디로, 목사만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엄청난 착각인 것이지요.

뒤에서 별도로 짚어볼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히 요약만 하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목사는 교회의 단독리더십이 아니라 복수리더십에 속하는 지체입니다! 이를 극명하게 증거하는 구절이 딤전3:2-7절 및 딛1:7-9절입니다. ‘감독과 장로’의 자질 내지 자격을 선포하는 이 구절이야말로 목사의 복수리더십을 천명하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해 목사의 단독리더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목사는 성경의 감독 및 장로에 해당되는 직분이며 이는 명백한 복수리더십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 제시된 자질들은 총 23가지입니다. 추후 이 부분은 헬라어 검토를 통해 다시 살필 것입니다만, 이 모든 항목들은 전부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 자질’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란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자질을 은사로 얻은 자들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자질을 지닌 자들을 목사로 택하여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신학의 미비점이 식별됩니다. 즉, 그것은 부르심을 지나칠 정도로(성경의 한도를 넘어) 목사에게만 한정 적용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목사됨은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것이다.”라고 하면 아무 반론도 제기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기득권을 보유한 신학자/목사들의 교회 직분 내지 리더십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거의 대다수가 목사 중심적 사고로써, ‘소명’을 목사 직분에 강조 적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이 문제 역시 별도로 짚겠습니다만, 미리 한마디 하면, 이는 목사들이 하나님을 등 뒤에 업고 하나님의 권위를 불법적으로 차용(악용)하는 행위입니다. 흔히 말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로서 절대 옳지 못한 현상입니다.

▣ ‘소명신학’의 실제 적용상 주의사항

지금까지 살핀 논리(단어의 의미 및 다른 학자들의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적으로는, ‘소명’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소명이란 ①하나님의 의지에서 발현된 부르심이며, ②이는 개별적 사명(임무)임과 동시에, ③모든 성도들을 염두에 둔 공동체적 선물이다!』

이 개인적 ‘소명관’에 대해 약간의 부연설명과 현실에서 적용할 때의 주의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①“하나님의 의지에서 발현된 부르심”이라는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 소명의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주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②“개별적 사명(임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직업(vocation=광의로 해석하면 모든 ‘세상 직업’ 포함)입니다. 소명의 개인성이라 할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문자는 ‘개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반드시 ‘공동체적’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③과의 접점을 지녀야 합니다.

세 번째, ③“모든 성도들을 염두에 둔 공동체적 선물”이라는 말은 주님의 몸(교회)의 공동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먼저 개인을 부르시고 이를 토대로 민족(다수)의 부르심으로 확대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수’에 무게중심을 두고 서술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는 하나님의 계획상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도, 에덴동산도, 교회도, 모두 ‘다수’ 공동체입니다.

아울러 ‘선물’이라는 용어의 일차적 의미도 되새겨야 합니다. 즉, 선물은 무조건 값이 없어야 합니다. 단 일푼의 반대급부라도 필요하다면 이는 절대로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용어에서 더 기억해야 할 점은 받는 자에게는 절대로 권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받는 자는 그냥 받을 뿐입니다. 자랑할 수 없고 자랑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선물’이라는 말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은사”입니다. 은사가 곧 선물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으므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소명신학’은 ①은 충분히 강조하는 반면, ②를 간과하면서, ③을 특정 직분에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소명관’ 때문에, ‘오직 목사에게만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이 작용하고 나머지 성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싹트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대 소명신학은, 위의 세 가지 강조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소명’에 대한 개념을 ‘신학적’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오해’란 ‘특정 개인을 강조하는 부르심 해석’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명’에 관한 바른 이해를 가질 때라야 바른 믿음 위에 설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위장하기 위해 굴절시킨 ‘유사소명론’(=목사성직론)에 발목 잡혀, 실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2회에 걸쳐 ‘소명’의 개념을 살폈습니다만 좀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요약하겠습니다. 성경이 보증하는 ‘소명’이란 ‘성도로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정 직분에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장로도 안수집사도 권사도 서리집사도 권찰도 세례교인도 모두모두 ‘소명’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목사만 소명 받는 게 아닙니다!

정양호

2011.04.02 03:53:22
*.25.255.195

This article is very good insight for me.
I agree with you as a pator.

All of christian is full time minister in all marketplace to preach Good News through their job for God's glory.
Maybe church ministers are fulltime minister in their church community only.
You are a wonderfull fulltime God's minister (not part time) in your any occupations
from our God's calling.
Some of pastor's understanding causes imbalaced leadership as you commented.

But be careful to judge them. If you judge them only, you will be break to harmony, unity of church community.

정순태

2011.04.03 03:10:51
*.75.152.191

정양호 선교사님!
눈팅만 했는데, 댓글 대화는 처음입니다. ^^

걱정하신 바처럼,
저는 판단하거나 정죄할만한 신급(信級)이 못됩니다..............


구약성경의 교훈 중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구약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정식 제사장들과 정규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과 정확히 반대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매우 싫어하셨다는 증언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신약교회의 정식 목사/교수들은
구약교회의 제사장/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존재들이며
보다 우수한 자질(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콜링을 받은)을 지닌 이들인지요.
구약 제사장/선지자들은 어리석은 이들이었고
신약 목사/교수는 슬기로운 이들인지요.

속칭 ‘교회’라는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행위들(특히 지도자들의 소행)을 볼 때,
성경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강한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보지만 제대로 답해 주는 이가 별로 없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채
영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평신도들의 지친 모습들!!!

이것은 잘못된 현상이라고 이야기하면(고치자 말하면)
모두 ‘비판한다. 정죄한다.’며 경계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오늘날 제도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이지요.


앞으로 이 주제(목자상)의 글들이 수십 편 정도 더 올라올 것입니다.

글들의 표현이 어떠하든(비록 비판이나 판단처럼 보일지라도)
그 진정한 속내는
현실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평신도의 가슴 치는 고언(苦言)으로 이해해 주실 수 없으신지,
아니면 인내의 한계에 이른 독백(獨白)으로 수용해 주실 수 없으신지,
정중히 여쭤 보고 싶습니다.


선교사님!
선교 현지에서 체험한
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드려 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형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정양호

2011.04.03 12: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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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님은 상당히 성경적 통찰력이 있어 보입니다.
소명에 관한 갈등 역시 내 경험과 너무 많이 비슷하기 때문에 도움이 될것 같아 좀 부끄럽지만 아주 간략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성경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당시 성경 통신강좌를 13개 수료했었습니다.
자연히 학교 공부는 등한히 했지만 우리 주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로 학교공부는 염려가 없었어요.
성경을 공부할 수록 마음이 뜨거워 전도하고 싶어 견딜수 없었고 가방속에 늘 전도지를 듬뿍 넣고 다녔어요.
당시 주님이 기회주시면 전도자가 되겠다고 약속 했어요. 고등학교때 이미 중고등부 설교는 물론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고,
대학에 다니면서 농촌의 개척교회에 설교를 하며 박윤선 목사님 주석을 재미있게 모두 읽었어요.

주님과 약속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라는 말씀 때문에 직장을 잡은 후에도 이 소명에 대한 개인적인 갈등은 계속되었어요.
그 약속을 잊기위해 소위 열심을 더 내었고 직장에서 개인전도하여 제자훈련반을 운영했고, 교회에서 각종 미니스트리에서 목사님을 도우며 땀을 흘렸어요.


지금은 일 만명이 넘는 대형 교회이지만 초창기 개척 하시는 목사님과 함께 성가대 지휘, 교회신문을 비롯 각부서의 통반장 다했어요.
심지어 담임 목사님은 부목사님들이 열이 넘는데도 개인적으로 정집사가 주일학교 설교를 했으면 좋겠다고 당회에 올리기까지 했어요.
남이 시켜서 마지못해 일하는 것처럼 보였던(실제로 잘못된 관찰일수 있음) 부목사님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가까이에서 많이 보며 "이건 아니다. 나는 아니다."라는 생각했어요.
독서를 통해 신학에 관한 지식들을 섭렵했었고, 가끔 교회문제나 제자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기독 신보에 기고하기도 했어요.
제가 담당한 부서는 늘 부흥을 했어요. 주일에는 예배, 주일학교, 성가대를 다 마치고 오후에는 저녁예배전까지 3-4가정씩 심방을 하고 저녁예배에 임했어요.
다들 정집사는 목사님보다 더 바쁘다고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 증거에 대한 카리스마가 생겼는지 모임의 회원들이나 교사들은 절 잘 따라 줬어요.
물론 "정집사가 너무 설친다. 교만하다"는 질투에 가까운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내 중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관 없었어요.


이런 에너지는 다 그 부르심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목회자는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고 현재 직장인으로 그저 열심히 봉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열심으로 봉사를 한다고 했지만 마음 속 에 자리잡은 전도자로서의 소명의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평안이 없었어요.
자세한 사연은 생략하고 어느날 단도직입적으로 주님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금식기도를 했어요.
주님은 음성으로 들려주셨어요. "왜 순종하는데 머뭇머뭇하느냐?
그리고 육체적인 신비하고 큰 고통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하심을 체험 하고 즉시 사표를 냈어요.
갈등이 끝났어요. 다들 졸리는 신학 공부 시간은 내게 부흥의 시간이었어요.
신학공부을 마치고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선교사 파송을 받으며 나이가 사십이 넘어버렸어요.


소명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구구하지만 정순태님이 이야기한 모든 것이 옳다고 봅니다.
평신도라는 용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지만 평신도들이 어떤 면에서 목회자들 보다 실력과 믿음이 월등한 분들도 참 많아요.
한국적 문화와 사고방식이 투영된 목회자들의 편견과 독선적 리더십으로 인해 많은 평신도들이 소명이 사장되고 있음은 안타가운 일이예요.
평신도들이 개척도 하고 설교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담임 목사님이 저의 열정과 달란트를 인정해주셨고 커갈수 있도록 격려했던 좋은 맨토였어요.


많은 사연 끝에 남아공에서의 선교사로서 소명 역시 간단치 않았어요.
과연 누가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릴 것인가? 라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현재의 필드가 과연 주민이 원하시는(부르시는) 선교지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갈등했어요.
갈등에도 불구하고 "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 앞에 "선교지의 갈등"이라는 배부른 변명은 통하질 않았어요.
예수 영화를 들고 초중고를 순회하며 땀을 흘리는데 주님은 어느날 이 일을 기뻐받으신다는 싸인을 받고 그 갈등도 끝났어요.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은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로 지적한 목사님들이 자기자신에 대한 소명을 너무 우월한 것처럼 강조하고 마치 교인들의 소명이 열등한 것 처럼 오해케하는 것은 실력없는 리더십들이 굴림하여는 자세일 뿐
다 함께 주님의 종들로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교육에서 이 부문을 잘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우리 신학교에서도 반드시 교육 할 거예요.


정순태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따라, 위에서 부르신 그 상급을 보며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힘차게 나가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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