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랑(1) (마5:21-48)

조회 수 808 추천 수 28 2011.04.23 07:04:07
                        

▣ 들어가기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한가지는, 용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할 때, ‘성경용어는 하나님 관계적 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즉,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어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성경은 뒤집어서 또는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다’라고도 말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는 성경말씀(사55:8)을 액면 그대로 순진하게 믿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가 무척 좋아하는 단어, ‘사랑’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먼저 우리 모두가 포근한 감정을 느끼도록 해주며,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더욱이 신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에 대하여 모든 신학자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 정의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고, 특히 사랑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포괄적인 속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럼, 이 ‘사랑’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듯 그냥 좋고 가슴 설레는 그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성경이 의미하는 바 ‘사랑’의 진정한 뜻의 일부를 4회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랑의 종류

신학자들은 사변적인 헬라어를 사용하여, 사랑을 보통 4가지로 설명합니다. 자칫 신학 영역으로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단지 설명을 위해 간략히 정리만 하겠습니다.

  ○ 먼저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소위 ‘에로스’(eros)라고 합니다. 육체적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대부분 우리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가슴 설레고 붕~ 뜨는 감정이 느껴지는 그런 사랑이지요. 영성이 형편없는 제가 그나마 조금 이해할 듯한 사랑이 이것입니다.

  ○ 다음은 친구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필레오’(phileo or philia)라고 합니다. 우정입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니 수어지교(水魚之交)니 하는 관용어들과 맥이 통하는 개념입니다. 담담한 교감이 특성이고 상당한 희생이 전제된 사랑입니다.

  ○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스톨게’(stolge)라고 합니다. 아주 희생이 강한 사랑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예:가시고기)에게서도 발견되는 종족애가 대표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그럴듯한 숭고한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가페’(agape)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인데, 알쏭달쏭한 사랑입니다. 막연하기만 하고, 그 의미가 얼른 이해되지 않는 그런 사랑입니다.

  ※ 더 세심하신 분들은 2가지 정의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 필라스톨게(Philastorge) : 우정(롬12:10). 친구 사이의 우정이 마치 피로 맺어진 것처럼 단단하게 결속된 상태.
   ○ 필라델피아(Philadelphia) : 형제자매의 사랑. 신앙 공동체에서 “형제자매”라 부르며 느끼는 사랑.
  
위에서 살펴본 신학자들의 분류는 대충 타당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한가지 미흡한 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사랑을 4가지 종류로 확연히 구분 짓는 것으로서, 이게 조금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가페(하나님의 사랑)는 분명 별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3가지 사랑의 속성을 아예 배제한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에로스와 필레오와 스톨게적 의미를 포괄합니다. 오늘은 이 구분된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간단히 설명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에로스적 측면 :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종종 부부 관계로 표현합니다. 특히 아가서가 대표적입니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가페에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도 포함됩니다(빗나간 ‘이성애’로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부분이며, 단지 순수한 ‘부부애’ 정도로 받으면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 필레오적 측면 : 신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친구’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절친함과 동류의식이 포함된 의미이지요. 이것도 아가페 속에서 찾아지는 개념입니다.

  ○ 스톨게적 측면 : 성경에 보면, ‘눈동자같이 보호한다, 날개 아래 품는다’ 등등의 표현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모성애적 표현이지요. 아가페 속에는 이 같은 의미도 포함됩니다.  

여하튼 ‘하나님 사랑’(아가페)은 나머지 3가지 사랑의 의미까지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의 용어라는 것만 기억하며 넘어가겠습니다.


▣ 하나님 사랑은 다름 아닌 율법, 그것도 율법보다 더욱 철저한 율법이다.

참 큰일날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써 애써 폐기하신 율법을 사랑이라고 강변하니 어쩌면 망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이 지키지 못한 율법 대신 ‘조금 쉽고 조금 가벼운’(마11:30) 사랑을 주셨는데, 오히려 율법보다 더한 것이 사랑이라니요? 율법 폐기론자들이 듣는다면 거세게 반발할 그런 생각입니다.

하지만 진실입니다. 사랑은 율법입니다. 아니, 율법보다 더 광범위하고 실행하기가 곱절로 힘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쉬운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바로 우리)이 처참하게 실패한 율법준수가, 예수님이 명하신 사랑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소위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5장의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팔복을 말씀하시고(3-12절), 성도의 역할인 빛과 소금(13-16절), 율법의 정신(17-20절)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17-20절을 가만히 읽어보면 황당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발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이 요구는 48절에 가서 절정을 이룹니다. 잠시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21절부터 47절은 율법과 사랑을 묘하게 대비(對比) 시키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한 바”는 구약(즉,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신약(즉, 새 계명 또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주십니다. ①살인과 형제에게 화내는 것, ②간음과 음란한 생각(이혼 포함), ③헛맹세와 맹세치 않는 것, ④동해복수법과 한없는 양보(왼뺨, 겉옷, 십리, 꾸어주는 것), ⑤이웃사랑과 원수사랑 등을 대비시키면서, 강조점은 전부 후자(사랑)에 두고 계십니다. 어찌되었든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습니다.

45-47절은 문단이나 문맥적으로만 보면 ‘원수사랑’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는 위에 나오는 모든 예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받아도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앞에 제시된 율법은 세리나 이방인들도 행할 수 있는 것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입지가 점점 좁아집니다. 우리는 죄인들도 지킬 수 있다고 하시는 율법을 10% 정도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제자들, 성도들)가 죄인보다도 한참 못 났습니다!  

점입가경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핑계치 못하도록 48절에서 아예 대못을 박아 버리십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미를 반추하면 우리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정도로 거부반응이 생겨야 정상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예 중에서 하나라도 자신 있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요구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무슨 뜻일까요? ‘온전’(perfect)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앞에서 대비시킨 5가지 예를 ‘대충’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하라는 의미입니다. 한계는? 없습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만약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20절). 우리의 편의에 따르는 선택조항이 아니라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필수조항인 것입니다. ‘무한범위를 무조건적으로 준행하라’ - 이것이 아가페에 관한 하나님의 요구인 것입니다.

앞의 것(율법)이 쉬울까요? 뒤의 것(사랑)이 쉬울까요? 얼핏만 봐도 율법보다 사랑이 최소한 2배 이상 힘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율법도 못 지키는 우리보고 사랑을, 그것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우습게 봐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워 온 것과는 다른 해석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따라서 선뜻 동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까짓 사랑이 뭐 어려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육체적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괜히 겁주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감정적으로 쉽게 하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고, 눈물 흘리며 은혜스럽게 복음송으로 찬송하는 곳입니다. 바로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소위 사랑의 속성 15가지가 나옵니다. 오래 참음, 온유, 투기, 자랑, 교만, 무례, 유익, 성냄, 악함, 불의, 진리, 참음, 믿음, 바람, 견딤 등이지요. 오늘은 이 용어들의 뜻을 해석해 보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몽땅 뭉뚱그려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 사랑의 속성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보고 ‘지렁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만약 우리가 이 사랑을 이루려 한다면, 지렁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능력도 없는 지렁이가 되지 않는 이상, 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지렁이’ 개념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비밀과 연계된다는 점입니다.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지렁이가 된 것과 동일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지요. 이것이 아가페사랑입니다. 이걸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이쯤 되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어마어마한 말씀의 의미를 일부분이나마 이해했다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이해할 수도, 준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까 아가페는 에로스/필레오/스톨게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라고 했습니다.

자,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남편이나 아내를 제대로 사랑합니까? 목숨을 대신 내어놓을 우정이 있습니까? 참 사랑을 베푸는 부모입니까? 이 3가지를 온전히 다 행하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이것보다는 최소한 2배(사실은 무한대임) 이상 힘든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고 계십니까? 원수를 정말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이제 절망의 순간입니다. 상대적으로 더 쉬운 율법준수에도 실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결코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결코 행할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을 잘못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perfect)하게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분명 절망입니다!


▣ 숨고르기

성도에게 있어서 절망은 곧 소망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사랑을 인간의 몫이라고 말씀하신 곳이 한곳도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아가페)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입니까? 포도가지이지요. 사랑을 이루시는 주님께 꼭 붙어있어야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는’ 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포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아가페)의 의미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마디로 ‘이타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사랑이며, 나를 포기한 전인격이 요구되는 그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지렁이가 되어야 겨우 따르는 흉내 정도라도 낼 수 있는 것이 아가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아가페 사랑 - 그 깊은 의미를 더 많이 깨우치는 은혜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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