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교회는 목사만큼 큰다?

조회 수 1076 추천 수 109 2009.09.12 00:06:25

♣ 고전4: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노라).

교회생활을 할 때 수시로 듣는 권면 중에서 ‘목사를 존경하고 잘 대접하라.’는 말도 상위권에 속할 것입니다.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이들은 속마음을 감추며 은근히 강조합니다. 심지어 왜 존경과 대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대며 집요하게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목사 존경 및 대접’은 성도의 좋은 신앙자세라고 얼핏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우리 신앙을 왜곡시키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목사와 긴밀히 협력해야 하지만 도를 넘는 지나친 존경과 대접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중시주의(지도자를 과도히 의지하려는 사상)는 필연적으로 타락을 불러 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오해가 “교회는 목회자 이상 성장할 수 없고 교인은 목사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김병원, 기독교지도자론, p. 389)라는 억지로 비약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비유하는 말로서, 바람직한 가치로 받아들입니다. 당연합니다. 스승보다 못한 제자뿐이라면 세상은 전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나날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기득권을 지닌 스승들도 바른 권면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입니다. 후배가 선배를 극복하여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선배를 뛰어넘지 못하면, 무능력자요 무자격자로서, ‘후배’라 칭할 수조차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도 자식이 자신보다 훌륭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중국의 증자(曾子)는 효도의 끝을 이현부모(以顯父母)라 했습니다. 자식이 훌륭해져서 부모를 드높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후배(제자)의 성장가능성을 인정하고 부모도 자식의 성공을 소원하는데, 유독 교회에서만 ‘평신도가 목사보다 클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통탄스럽겠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스승을 많이 둘”(딤후4:3) 것이라며 “많이 선생 되지 말라.”(약3:1),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들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만, 오늘은 본문에 국한시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만”(뮈리오스)은 숫자를 의미함과 동시에 ‘무수한’의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하는 거짓 교사’를 고발하는 의미입니다.

“스승”(파이다고고스)은 지식과 삶을 지도하는 자입니다. 1세기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의 허락 하에 자식양육을 책임졌던 노예 신분입니다. ‘몽학선생’(갈3:24)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낳았노라.”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비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천명함으로써 참된 영적 아버지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은 ‘교회 내에 스승이 무수히 많기는 하지만 자칭 스승이 대부분이고 아비처럼 자녀의 영적인 건강을 챙기는 참 스승은 적다.’는 진단입니다. ‘자칭 스승’에 대한 경계로 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자칭 스승이 너무 많습니다. 신학 공부하고 안수 받아 겉모양은 갖췄지만 속사람은 전혀 아닌 자칭 목사 거짓 목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한탄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마르바 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학자나 목회자들에게 너무 많이 의지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학교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는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 앞에 온갖 지적 방해물을 쌓아 놓기 때문이다. 신학교육에 있어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이 배우는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가장 큰 교훈에서 멀어지곤 한다는 점이다. 이 교훈은, 우리가 약할 때에 인간적 지혜와 해답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장 잘 의지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일하실 때에 궁극적으로 믿음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약할 때 기뻐하라. p.197).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선동함에 있어 자신의 대리인인 귀신들과 불신자들, 그리고 심지어 진리와 관련된 사람들(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수단임)과 혹은 진리의 대리인으로나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자들(가장 최악의 경우)을 활용한다.” “때로 기독교 지도자들도 똑같이 배교한다. 그들은 권력과 명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심지어 배교할 때조차도 반드시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진리 전쟁, p.73 및 99).

어윈 W. 루처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특별한 대변자로 여긴다.” “거짓 선지자들은 교인들을 이용하고 통제하고 학대했다. 하지만 속기 잘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들을 추종했다. 인간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떤 교회의 목회자는 목회자의 권위를 이용해 거만한 태도로 신자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욕설을 퍼붓기까지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인들이 그 교회를 떠나면 저주받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목회자도 있다고 한다. 그런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과 개인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바울의 말대로 ‘뺨을 맞아도’(고후11:20) 여전히 그 교회를 출석한다. 그런 목회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NO!"라고 말하는 것들, p.57 및 99).

양심적인 학자 및 목회자들의 고백은 그만 인용하겠습니다. 주장하는 바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직능과 역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낮으며, 따라서 평신도들이 본을 삼아 죽도록 모방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 봅니다. 만약 평신도들이, 아방궁에 살면서 아들 사업자금 팍팍 대주는 목사, 팔자걸음 걸으며 사두마차 타기를 좋아하는 목사, 아들 사위에게 대물림하며 트림이나 해 대는 목사, 없는 수염 쓰다듬으며 목에 깁스한 것처럼 뻣뻣한 목사들과 목사들을 본 받아 그들을 닮아간다면, 교회는 뭐가 될는지요! 이미 그런 기미가 도처에 넘치는 현실이 애처롭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목사만의 일인플레이가 아닙니다(오늘날의 현실은 목사가 마치 스타플레이어인 것처럼 왜곡되었지만 이는 잘못입니다). 온 성도가 합심해야 하는 팀플레이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향한 지나친 경도(傾倒)는 옳지 않습니다. 목사와 평신도가 동등한 수준에서 합력하는 것이 교회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위 ‘목회자의 목사’라 불리는 스펄젼의 주옥같은 생각을 소개합니다.

“나는 아무 말이 없거나, 할 말이 있어도 목사는 왕(Lord Paramount)이고 자신들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평신도들이기 때문에, 조용히 있는 게 낫다고 말하는 교인들을 이끌고 목회하고 싶지는 않다.”(목회황제 스펄젼의 목사론, p.262)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교회는 목사만큼 큰다.”는 말은 기득권을 지녔으되 바르지 못한 이들(자칭 혹은 거짓 지도자들)의 자기합리화용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습니다. 점점 쪼그라들어 급기야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현재 자기를 지도하고 있는 목사를 뛰어넘는 영성(지식까지 포함하면 더욱 좋습니다)을 지향함으로써, 내일의 소망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합니다. 담임목사 정도의 수준에 만족하는 성도라면, 거룩한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한국의 모든 성도들이, 십이만(=현재 한국 내 시무 목사의 숫자가 12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압니다) 스승들보다 “갑절”로, 성숙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실 것입니다! ‘갑절로 성숙된다.’는 말이, 그들처럼 밖으로 들어나고 유명해지고 그래서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숨겨지고 덮여지고 드러나지 않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함을 말입니다. ♣  

김순희

2009.09.12 11:20:23
*.254.209.141

자칭 스승은 참 많은데 참 스승은 정금과 같이 귀합니다.
존경할 수가 없어 떠나기를 몇번 해 보았지만 어디를 기웃거려도 매 한가지의 슬픈 현실,
이 서글픈 현실이 참 슬플 따름입니다
또 가끔은 주변사람들의 비판처럼 내가 너무 교만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진주문

2009.09.18 04:44:54
*.249.233.130

안으로 숨겨지고 덮여지고 드러나지 않는 그런 갑절로 성숙된 믿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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