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숙희 씨의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홍성사)를 읽고, 갓피플몰에 올렸던 독후감입니다.



요즘은 오히려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몇 세대 전만 하더라도 시집살이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귀머거리 3년, 당달봉사 3년, 벙어리 3년을 무사히 넘겨야 겨우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곤 했다. 잘못된 과거의 인생사였다.

이제는 노년층의 기억 속에나 자리하고 있는 구시대의 잔재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있다. 바로 교회가 그곳이다.

옛날 시집살이는 그나마 9년이면 어느 정도 숨통이라도 틜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기한조차 없다. 신앙 생활하는 한,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실제는 ‘평생 벙어리로 살라.’는 요구인 것이다.


미주한국일보에 근무 중인 정숙희 기자가 쓴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를 읽었다. 항상 첫 장부터 읽는 습관에 따라 머리말을 읽으면서, “아하, 이 양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나보다. ‘엄청나다’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수필처럼 짤막한 46편의 글을 모두 읽었으나 저자의 엄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난’ 이야기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고 또 안타까워하는 한국교회(이민교회 포함)의 반성해야 할 사실들만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들은 정말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사악한 내용들인가? 작금의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성도들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아니 필히 말해야 하는 그런 주제들이 아닌가?

두 번 읽을 만큼 난해한 주제들이 아니라서(무겁지만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라서), 머리말만 몇 번 다시 읽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서글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왜 한국교회는 이 정도의 비판(사실은 비판이 아니라 정신 차리자는 자성의 목소리다)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라는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저자의 머리말 가운데 3군데를 인용하고 간단히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칼럼이 한번 나올 때마다 그 반향은 엄청났다. 너무 엄청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속이 시원하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라며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감히 교회에 ‘대적’(?)하는 나를 용납하지 못했다. 전화로, 편지로, 독자투고로, 욕을 엄청 먹었고, 심지어 어떤 목사는 나를 망신시키는 신문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p.7).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의 주장에는 대단한 내용들이 전혀 없었다.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그런 내용들이었다. 이 정도의 자성(自省)도 감당할 수 없는 한국교회였는가? 이 정도도 소화할 수 없는 목사가 정말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동안 나를 격려하는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어떻게 그렇게 용기가 좋으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사실은 참으로 황당하고 속상했다. 나는 ‘용기’하고는 거리가 먼, 나약하고 평범한 신자일 뿐. 만일 내가 강하고 담대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은 날 쓰시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약하기 때문에 늘 겁이 났고, 아주 작은 공격에도 밤잠을 못 자고 고통 받았다. ‘다시는 이런 글을 쓰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수많은 순간들이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p.8).

왜 이런 반응들을 보여야만 했는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이만한 용기를 냈다면 오히려 격려하고 북돋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저자에게 꼭 한 마디하고 싶다. “자매님! 잘 하셨습니다! 보다 강하고 책임 있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해야 할 말들인데, 비겁하게 뒤로 빠져 있는 기득권자들 대신 보여주신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연약한 여성으로서 이만한 용기를 낸 저자에게 신문광고로 망신시킨 목사의 철면피한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김을 느낀다.


『슬픈 것은 10년 전에 일어났던 교회의 나쁜 일들이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미주 한인교회를 보며 쓴 글들이 나라와 지역을 불문하고 한인교회들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 또한 안타깝기 그지없다.』(p.8).

앞서의 반응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다. 반성해야 할 자들이 반성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개선을 기대할 것인가? 저자에게 드리는 위로와 당부의 말씀으로 대신하겠다. “자매님, 기회가 주어진다면 용기 잃지 마시고 계속하십시오. 다만, 대상을 알아듣는 소수의 평신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갱신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평신도가 많아질 때, 현재의 한국교회는 비로소 소생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자정과 갱신을 주제로 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이들에 대한 반응도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반감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기득권을 지닌 목사들과 장로들일수록 개혁 요구 목소리에 격한 감정을 보이곤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숨길 수 없는 실질적 역량이다.

따라서 교회개혁 요구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 주력세력들의 회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가버린 이들이다. 신앙양심이 살아있는 극소수의 목회자/신학자들 정도만이 제한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대상을 다시 선정하자는 것이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기대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이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 사고일까? 아니다. 주님 당시도 그랬고 종교개혁 당시도 그랬다. 개혁은 당대의 주류를 변화시켜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언제나 소수의 비주류를 통해 거대한 개혁이 실현되었다. 역사적 사실이다.


저자의 외침도, 필자의 서평도, 서글프다.
“마땅히 해야 할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곳이 교회라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우리 신앙은 ‘평생 벙어리’를 요구하는 시집살이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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