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여 구원 받은 에녹과 노아.

 

하나님께 은혜 입은 노아

 

예정론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 논의에 앞서 과연 성경의 인물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스스로 결단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면 예정구원이 옳다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자명한 원리를 따르자는 뜻입니다.

 

최초 인간부부 아담과 이브와 그 의로운 아들 아벨을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했음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에녹과 노아입니다. 그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아주 간단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데 앞선 글에서 밝힌 대로 아직은 구원진리를 명백하게 계시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정구원이었음을 드러내주는 언급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고 성경은 에녹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반의 설명은 엘리야 선지자를 불 수레와 불 말에 태워서 회리바람으로 승천시켰듯이(왕하2:1&11), 여호와가 에녹도 살아있는 채로 천국으로 데려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지막 천국입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그럼 동행하기 전에 즉, 처음 그가 여호와를 믿고 따르기로 한 구원의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동행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따져봐야만 하는데 마침 노아에 대해서 성경이 동일한 설명을 하므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또 그 추정을 정확히 하기 위해선 노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8,29) 에녹의 손자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에 믿음으로 고백한 말입니다. 노아가 자라서 스스로 노력하여서 어떤 사람이 되기도 전에 라멕은 그를 인류를 구원할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부모로서의 소원을 말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간주해선 안 됩니다. 아무리 자기 아들이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성령의 감동이 먼저 없었다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진술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키우겠다고 소원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것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전 인류를 구원할 자가 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결코 없는 법입니다.

 

여호와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여 홍수로 심판을 내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말합니다. 여호와 쪽에서 노아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씨앗을 보존케 하려고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노아 혼자서 자기 힘으로 전 인류를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감히 마음먹은 게 결코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이어서 노아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6:9)고 부연 설명합니다. 그가 술에 취해 자식들로 범죄 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행적(창9:18-27)을 보면 완전한 의인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 외에 완전한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에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며 순종했다는 면에서 의인이자 완전한 자였다는 뜻입니다.

 

당시는 아직 공식적인 종교도 성경도 없을 때입니다. 가정에서 구전으로 계승되어온 믿음을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이 신앙 교육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동일한 부모 아래 동일한 환경에서 자란 가인과 아벨마저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믿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정 신앙교육 외에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영감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홍수 심판을 대비해 엄청난 크기의 방주를 지어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노아 스스로 묵상해서 고안 유추할 성격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너무나 심각하고도 진지한 계시를 직접 받은 위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 쪽에서 영적 감화까지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모든 것을 희생하며 순종한 노아의 삶을 두고 하나님께 은혜 받아서 그분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럼 에녹을 하나님이 동행했다고 표현한 것 또한 동일한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는데 그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11:5)고 선언했습니다. 에녹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구체적인 행위는 성경이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음,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도 그의 믿음에 근거하여 구원해주었다는 뜻이지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거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에녹이나 노아 둘 다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어야만 구원된다.

 

동행을 예정 구원과 연결시켰다고 해서 견강부회(牽强附會)식 해석이 아닙니다. 동행(同行)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walked with God)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분이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주고 또 함께 걸어주지 않고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소원, 기도, 노력한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인간에게 당신을 열어 보여주시면서 만남을 허락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시고 그 손을 발견한 인간이 그 손을 기꺼이 잡아야 합니다. 거기다 그분이 먼저 앞서서 가고 인간은 그 뒤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인간이 가고 싶은 대로 그분이 따라 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이 미리 정해 놓은 어떤 목적지로 향해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신자를 이끌어갈 뿐입니다. 신자는 비록 그 갈 바를 모르지만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따라가는 것이 동행입니다.

 

동행은 그래서 출발지와 목적지가 반드시 같아야 합니다. 가는 방향과 속도도 같아야 합니다. 출발지가 같으나 목적지가 다르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해 가는 것이라 동행이 아닙니다. 목적지는 같으나 출발지와 방향이 다르면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출발지 목적지 방향도 다 같으나 속도가 다르면 미처 도착하지 못하는 자도 생깁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종교들이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즉, 종교가 다 구원을 제공하니까 자기에게 적합한 종교를 택하여 믿으면 된다는 주장만큼 불합리한 말은 없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동행 아니 모든 종교가 동행의 4대 요소인 출발지, 목적지, 방향, 속도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기독교 내에서도 이 네 요소로 따질 때에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협력 구원 둘 중에 하나만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이란 하나님이 한 인간에게 찾아와서 그의 손을 잡고 천국까지 동행하여 이끄는 일입니다. 그 도착지는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 실제로 보여주었 듯이 하늘 나라입니다. 노아는 에녹과 엘리야와는 달리, 실은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연사한 후에 같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구원 아니 동행의 출발지는 신자에게 주님이 찾아오고 신자가 그분의 손을 잡은 곳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그분을 대면하여 손을 잡으려면 우선 그 자리에서 소멸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값을 다 감당하심으로써 그 죄를 다 사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은혜를 먼저 베풀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이 그 동행의 출발지입니다.

 

하나님이 내민 십자가 은혜의 손을 어쨌든 인간이 잡았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에 협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할 한 특정 인간을 반드시 정해야만 합니다. 또 먼저 찾아와 주셔서 그분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을 대면해도 죽이지 않고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거듭나게 하는 그분의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판국에 인간이 그분의 손을 잡았다고 해서 그 구원에 끼친 자격 조건 능력 심지어 영향이란 아예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그분을 먼저 찾아가서 자기 의지로 그분의 손을 잡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우선 그분이 인간의 손을 잡아줄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분 쪽에선 그와 끝까지 동행해줄 의무나 책임이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인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의로든, 주변 여건이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든, 그 손을 잠시 놓게 되면 하나님이 다시 그 손을 잡아줄지 보장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분의 손을 잡은 것이 구원의 전제가 되면 필연적으로 구원이 유보되거나 - 시간적으로 연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 행위에 따른 조건적으로 - 혹은 취소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 보완되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와 과정과 방식이 어떻게 되었던 중도에 취소 포기될 수 있는 구원이란 엄격히 말해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에는 그런 일이 가능하고 타당하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입장에서 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일생일대의 일을 그렇게 경솔하고도 무책임하게 주관할 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주적 구원이므로 예정 구원이다.

 

작금 기독교인들 스스로 구원의 정의와 범위를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만 축소시켜서 극히 부분적으로 접근 이해 해석 수용합니다. 인간이 이신칭의 교리에 동의하고 믿기로 결심하고 앞으론 죄를 짓지 않고 예수님의 삶을 본 받아 착하게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구원입니다. 한마디로 죽은 후에 천국 입장권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믿은 후 신앙생활도 스스로 제한시켜버린 그 구원관대로만 이어집니다. 교회에 참여했으니 천국입장권은 확보되었고 이 땅에서의 형통과 풍요를 해결할 일만 남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활동에 성실히 참여하며 죄를 멀리하고 전도에 열심을 내는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잘 대우해주리라 믿습니다. 또 성경에 신자들더러 그렇게 하라는 계명들이 있으니까 당연히 잘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구원에 참여한 것이 아니며 또 온전한 구원이 아니라면 구원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목적지는 단순히 죽은 후에 입장할 천국에 그치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으로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의 거룩한 통치에 세세토록 함께 참여하는 위치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와 가장 크게 다르게 기독교의 구원만큼은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구원입니다. 또 그래서 구원 받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직후부터 전우주의 거룩한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신자 자신과 그 주변에 드러내게 하려고 인도하고 동행해 주십니다.

 

구원이란 이 땅에서 인간이 저지른 죄를 용서 받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결코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진정하고도 영원한 동행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아니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비록 때때로 지체하고 실패 할 수는 있어도 자연스레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전환되어서 주님을 따라갑니다. 비록 그 육신은 이 땅의 고달프고 죄로 타락한 현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망하며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옮겨 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장래에 실현되고야 말 종말론적인 삶을 미리 연습 준비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우주적 통치에 인간을 동참시키는 일이기에 하나님 그분만의 엄청나고도 은혜로운 주권과 섭리만이 그것을 가능케 만듭니다. 과연 죄에 찌들어서 이 땅의 물질계에만 모든 시야와 생각이 묶여 있는 한시적이고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구원의 그 광대하고 영원한 차원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단순히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감당했다는 그 은혜에 감동받아 그분을 믿기로 스스로 동의 결단한 것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심과 종교성과 심지어 영성이 뛰어나도 예수 십자가를 모르는 자연인의 상태에서 종말에 완성될 목적지를 향하여 살 수도 아니 소망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인 주제에 마지막 때의 그 영광스런 승리와 통치에 참여할 수 있음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자기만 높이려는 인간들이 스스로 하늘만을 목표로 이 땅에서 완전히 나그네처럼 살아가려 할 리 없습니다. 반드시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이 먼저 한 죄인을 찾아와서 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서 바꿔줘야만 합니다.

 

구원이 세세토록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그분쪽에서 먼저 동행해주지 않고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정론이 옳다는 논리적 변론이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통해 한 결 같이 계시 하고 약속하신 바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더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 당신께서 거룩하고 온전하니 신자도 온전하고 거룩해지라고, 우리가 볼 때에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정말로 무리한 요구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구원이 예정이냐 인간의 협력이 가능하냐 논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을 주실 자에겐 구원을 주시고 반드시 벌을 주실 자에겐 벌을 주십니다. 자신이 구원 받음에 내 쪽에 단 하나의 공로가 없음을 시인하는 자는 예정을 순순히 인정합니다. 또 그에게 남은 일은 이 땅의 형통과 평안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묵묵히 순종 실천하며 무엇을 먹든 마시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강력히 임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신자더러 그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세우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가 그 인생을 그분과 함께 다시 출발하여서 같은 방향으로 그분을 따라가서 반드시 그분이 정해놓은 종착지에 도착하는 문제입니다. 종말적이고도 영광스런 완성을 향해 가는 이 여정에 하나님의 동행이 없으면, 아니 먼저 손을 내밀어서 초대해주지 않는 한 출발도 못합니다. 구원은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하며 완전하고도 선도적인 주권과 섭리 외의 다른 방안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생생한 예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과 그분의 은혜를 입은 노아입니다.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구원을 얻어 하늘에 있던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은 변화산으로 불러내려오게 해서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도 없는 아름답고도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실현해보였습니다. 주님과 동행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구원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오늘날의 예정을 믿는 신자들도 바로 그분의 예정된 구원 즉 종말의 영광스런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고 또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에 이 땅에 도래한 그 나라의 거룩한 통치에 이미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8/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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