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하나님이시라.

 

예정이 강제적 기계적 구원인가?

 

신구약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미리 택하여 구원해주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구원 주는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 배타적이지 않느냐는 기본적인 오해 외에 많은 이들이 예정론에 대해 추가로 두 가지 의심 내지 오해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주관한다면 이미 택함 받은 자로선 구원에 영향을 줄만한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정반대로 아주 악한 일을 맘껏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오해가 생깁니다. 말하자면 천하제일의 악당까지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 구원 주는 하나님은 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미 구원으로 정해졌다면 그렇게 택함 받은 자는 자유의지로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없을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갖습니다. 본인의 소원, 희망, 계획, 의도, 의지와 반하게 강제적이고 기계적으로 그의 삶을 하나님이 주도해버림으로써 신자는 허수아비와 다름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두 의심 다 인간의 구원 받음이 미리 정해졌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한 의미마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정을 믿는 쪽에서도 구원해줄 자로 미리 택함을 받았다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테니까 구태여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택함 받은 자라도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매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받은 자는 자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자의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전도해도 자의로 거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전도 받는 중에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자라도 예수 믿은 경험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하는 일을 훼방하는 어떤 강제적이고 초자연적인 간섭은 없었다고 동의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즉, 모든 신자가 분명 예수를 믿기로 스스로 결단했으니까 구원 받을 자들이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유의지로 믿기로 결단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의 딜레마는 살펴본 대로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예정에 의해 구원 받았고 서신서들도 예정구원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성경의 진술을 부인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를 절충하는 신학적으로 중간적인 입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예정에 의해 구원을 주긴 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수용하거나 반대로 거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이 거부할지 받아들일지 미리 아시기에 스스로 결단하여 받아들일 자만 구원으로 예정했다고도 합니다.

 

그런 주장은 하나님의 광대하신 권능을 완전히 반영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라는 제한되고도 불완전한 영역 안에서 유추해낸 불완전한 결론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성경의 기록이 다 그러하지만 특별히 예정만은 하나님 그분의 입장에서 따져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나중에 그런 이론의 허구성에 대해선 더 자세히 따져보겠습니다만, 신학보다 성경이 먼저라는 일관된 원칙에 따라 성경 인물들의 경우에 과연 어떠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예는 구약인물 논의 때에 남겨 놓은 요셉과 신약의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꿈을 이루려 노력하지 않았던 요셉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37:5-11)

 

요셉이 동일한 내용의 꿈을 두 번이나 아주 명확히 꾸었습니다. 처음은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단에게, 두 번째는 해와 달(요셉의 부모를 상징)과 열한 별(요셉의 열한 형제를 상징)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비록 아비 야곱으로부터 총애와 편애를 받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형들을 부려 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때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럴 야망이 있었다면 함부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의 인생 계획에 대해 그분께서 꿈으로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형들은 가뜩이나 요셉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미워하고 있었기에 불난 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어미가 다르긴 하지만 한 아비에게서 난 동생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실천에 옮길 정도로 시기 저주했습니다. 반면에 인생의 경륜이 많고 특별히 고난 중에 여호와와 씨름을 해서 그분의 뜻에 비교적 익숙했던 야곱은 그 꿈과 형제들의 반발하는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꿈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요셉에게만 특정한 계시를 주었으니 그도 미리 택함을 받는 예정에 따라 구원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하나님의 그 구원을 믿음으로 적극 수용하려면 그 꿈대로 형들의 절을 받으려 자의로 노력을 했어야만 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그의 의지는 깡그리 무시하고 그렇게 되도록 강제적으로 훈련하고 연습시켜야만 하고 또 그 인생이 요셉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런 방향으로만 기계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간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환경에서 모든 일을 자의에 따라 판단 결정 행동했습니다. 그는 그 꿈대로 이뤄지기를 기도한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간절히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미리 확신하고서 그대로 순종한 일도 없습니다. 그가 행했거나 그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세상에서 인간끼리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고집과 계획에 따라 행해지는 방식 그대로 다 이뤄졌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그의 일생을 살펴봅시다. 야곱은 형제들이 요셉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양을 치러 간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는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다가오자 그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광야의 구덩이에 빠트립니다. 장자 르우벤이 자기들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말자는 권고에 따라 음식과 물이 없는 곳에서 굶어죽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미디안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지나가는 와중에 유다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죽도록 버려두는 것에 양심이 찔렸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버려두지 말고 노예로 팔고 부모에게 거짓말로 보고하자고 제안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모든 당사자들이 각각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행동했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장애나 하나님의 간섭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사자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중에 장남 르우벤의 마음을 보이지 않게 간섭하여 움직였습니다. 또 평소 그곳 근처로 지나다니던 상고들을 마침 바로 그 때에 그들 곁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유다의 마음에 찔림을 주어서 그런 제안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들의 의지를 자유롭지 않게 강제적 기계적으로 작동시킨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시위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여 주인의 신임을 얻어 재정도 책임지는 가정 총무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시위대장의 아내의 음란한 유혹을 뿌리쳤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요셉의 성품과 태도를 신뢰한 전옥이 모든 사무를 그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셉은 옥에서 만난 바로의 떡과 술을 맡은 관원의 꿈들을 해몽해주었습니다. 그 중에 술 맡은 관원은 바로가 복직시켜주었으나 요셉이 베푼 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 2년 후에 바로의 비상한 꿈을 해몽할 자를 찾을 때에 그 술 관원이 요셉을 기억해내고 바로에게 천거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정확히 해몽했을 뿐 아니라 그 온전한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었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에 탄복한 바로가 그를 자기 다음으로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에 임명했고 요셉은 애굽의 극심한 7년 기근을 잘 대비할 수 있도록 그 전의 7년 풍년 동안에 곡식을 아껴서 미리 비축해두었습니다. 기근을 같이 맞은 인근 각 나라에서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와중에 가나안에서 기근으로 굶어죽게 된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왔으며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형제들과 재상봉하고 이전의 잘못들을 용서해주고 화해했습니다. 그후에 야곱 가문은 애굽으로 이주해 안락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그 후손들이 노예로 전락했지만 오히려 세계 최강국 애굽의 보호 아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해졌습니다.

 

요셉의 자유의지

 

요셉의 일생을 정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간단하게 훑어봤습니다. 흔히들 많은 목사님들이 그가 큰 믿음으로 큰 비전을 품었기에 이방 땅 애굽에서 총리까지 되었다고 가르쳐왔고 지금도 그러는 분들이 꽤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의 꿈이 자기 인생에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스스로도 그런 방향으로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그에 대한 기록을 아무리 앞뒤로 살펴봐도 그런 노력은 물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습니다. 형들에 의해 광야의 구덩이에 빠트려졌을 때는 성경기록은 없지만 오직 목숨만 살려달라고 여호와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때맞추어 미디안 장사치를 보냈고 형 유다의 제안으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이후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에는 물론 하나님의 간섭으로 총리가 되어서도 어서 빨리 고향 땅 부모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만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려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외적으로는 그렇게 비춰져도 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필연이지만, 총리 자리를 거저 줍다시피 된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는 자신의 비전이 아니었기에 다시 강조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어렸을 때의 그 예시적인 꿈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꿈 이야기를 멋모르고 형들에게 자랑하는 바람에 죽을 뻔했습니다. 또 애굽에서 노예로, 옥살이로 온갖 고생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으므로 그 꿈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 꿈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스스로 자기 인생을 이끌어 갔습니다. 부모 친척 친지 하나 없는 이방 땅에서 풋풋한 청년이 혼자서 생존하려면 그 고초 고뇌 염려 불안 등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외딴 이방에서 생존만이라도 하기 위해서 자기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스스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영적으로 크게 성숙해진 것은 분명합니다. 오직 여호와만 붙잡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실제로 완전히 내어맡겼을 것입니다. 매사에 그분의 거룩한 인도를 구하면서 항상 기도에 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방의 타락한 풍조를 멀리하고 모든 이에게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요셉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상적 활동을 스스로 판단 결정 실천한 것입니다. 총리가 된 후에도 형제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어렸을 때에 그런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해주었어도 강제적 기계적으로 그의 인생을 끌고 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8)

 

요셉의 이 고백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의 극심한 기근으로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한 눈에 형들인 줄 알아본 요셉이 한두 가지 그들을 시험한 후에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상기 구절은 아비 야곱의 생사를 물은 후에 형제들을 안심시키려고 했던 말입니다.

 

흉년이 앞으로 5년 더 지속될 것이지만 애굽에 이미 비축해둔 곡식이 충분히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 후에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형제들이 비록 큰 죄를 저질렀지만 지금 이렇게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 배경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인도와 간섭이 있었다고 합니다.

 

맨 막내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형들은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서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버렸고 아비 야곱까지 거짓말로 속인 죄를 저지른 공범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들 모두 천륜을 저버린 그 부끄러운 악을 가슴에 묻고 서로 영원한 비밀에 부쳤을 것입니다. 회상하기도 싫은 어두운 과거였는데 이제 바로 그 요셉이 눈앞에 떡하니, 그것도 노예는커녕 자신들의 생사를 말 한마디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로 서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도 두려웠겠습니까?

 

요셉의 심정은 더 복잡하고 미묘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따지고 보면 자기 인생을 완전히 뒤꼬이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아니 그전에 자기를 죽이려 들었던 원수들입니다. 아버지에게 합동으로 거짓말하여서 십 수 년을 가장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단장의 슬픔에 잠겨 지내게 만들었습니다. 형들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분노와 저주부터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비록 삼십 세라는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지금의 요셉은 형들이 알았던 철없이 교만했던 요셉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여호와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건한 자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쩜 형들보다도 더 성숙해졌습니다. 특별히 이런 재상봉은 어느 누구도 계획하고 실천했던 일이 전혀 아닙니다. 요셉으로선 자기가 총리가 된 것부터 자기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점차로 또 철저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총리가 되었어도 형들이 애굽으로 내려올 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형들 얼굴을 보는 순간 곧바로 속에서 화가 솟구쳐 올랐겠지만 다른 한 편 사랑하는 아비 야곱과 막내 친동생 베냐민을 생각하면서 그 분노와 저주를 다스려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차 하나님의 너무나 큰 그림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비록 스스로 다 행한 것이고, 특별히 형들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게 만들었던 것도 분명히 사실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면모주도하게 범사를 세밀하게 간섭하시고 이끌어왔음을 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요셉이 자기가 지금 애굽 총리가 안 되어 있었더라면 자기 가족이 7년 기근에 목숨도 부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전에 그런 고달프고도 오랜 연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또 누명을 덮어쓰고 투옥되어서 술 관원을 만나고 그를 통한 극적인 방식이 아니고는 외국인 청년 주제에 애굽의 총리가 절대 될 수 없었다는 점도 깨달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연단이 그 당시로는 요셉에게 너무나 괴롭기만 했을 것이며 또 아무리 고향 땅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도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애굽 총리가 되어선 귀향할 꿈을 거의 포기했을지 모르며 애굽 총리 신분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에겐 하나님이 침묵하다 못해 아예 부재한다고 여기고 그 믿음조차 점점 약해져갔을 무렵에 형들을 극적으로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로부터 아비와 베냐민이 건재함을 듣고서 그 모든 일이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분명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분의 절대적이고 광대한 섭리와 주권이 인간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도 추측도 못하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기도와는 반대로 극적이고 우연히 일어났고 그래서 더 괴롭기만 했던 지난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뤄가는 예정

 

살펴본 대로 요셉이 예정으로 택함 받아 구원 얻었어도 그 구원과 구원 이후의 인생에서 그의 자유의지가 한 번도 무시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일상의 삶을 자기 뜻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유의지를 백퍼센트 완벽하게 그대로 작동되도록 허용한 채로 당신의 뜻도 그와 동시에 백퍼센트 완벽하게 실현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단 한 치도 모순, 상충,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광대하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을 다시 이런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십시오. 인간의 자유의지를 묶어 놓고 당신이 강제적 기계적으로 행한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전혀 없습니다. 예정이 되어 있다면 인간이 할 일이 없고 하나님은 일방적 독선적이지 않느냐는 말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아비 야곱이 죽어서 장례를 치룬 후에 형제들이 또다시 자기들 안위를 걱정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요셉이 아비를 보고 살려주었지만 이제 복수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때에도 요셉은 위와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8-20)

 

요셉은 형제들과 처음 화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악한 행동까지도 당신은 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이라고 더 성숙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거기다 성경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외에도 첫 화해 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 화해 때는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허용 묵인 계획 주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를 야곱 가문에서 만민으로 확대했습니다.

 

요셉은 이 단계에 이르러선 하나님이 자기들 선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금 이루고 있는 중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로 그 언약입니다.(창12:1-3) 요셉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그분의 광대하신 계획에 맞추어 순종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이스라엘은 물론 인류 전체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주신 최초의 구원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해 나가는 기록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열두 지파를 하늘의 뭇별처럼 번창하게하고 그 가운데 유대 지파의 다윗 가문을 택해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가 태어나게 하시고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이심으로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의 그 언약을 이뤄나가려면 예정의 구원이 필연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요셉의 이 고백이 그 진리를 다시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예정에 의한 구원은 하나님 그분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분의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주권과 섭리를 바탕으로 성경의 기록들과 대비하여 묵상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고도 당신의 뜻을 하나의 차질 없이 이루신 절정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지 않습니까? 그 구원이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주니의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 이유도 예정의 방식 외에 구원이 성립될 수 없고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알량한 이성으로 미리 예정되어 있으면 인간이 허수아비라는 타령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입니다. 아직도 인간이 그분을 제치고 주인이 되려는 원죄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것도 구원의 진리를 논의하는, 다른 말로 믿음을 처음 갖게 되는 차원에서부터 말입니다.

 

9/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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