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핍박자 사울에게 먼저 찾아오신 부활 예수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를 요셉의 일생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택하여 요셉을 구원으로 인도했어도 그에게 하나님이 아무런 강제적인 제약을 가하지 아니했으며 요셉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무관하게 구원 주기로 예정한 자는 반드시 구원을 주십니다. 이는 광대하신 그분에겐 너무나 간단한 역사일 뿐입니다.

 

요셉은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후에야 그런 진리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로선 너무나 다행이고 아주 빠르며 절실한 영적 깨우침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애굽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다시 상봉했습니다. 온갖 역경으로 얼룩졌던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서 잘못을 범한 형제들을 전혀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런 깨우침을 얻게 된 것도 성령의 간섭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 고백은 그가 수많은 고난을 거치면서 영적으로 성숙되어져 가다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므로 분명히 하나님이 그로 그 진리를 깨우치게끔 이끈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여타 구약 인물들의 신앙 여정들도 아무리 살펴봐도 마찬가지 결론밖에 얻지 못합니다.

 

요셉과 상응할만한 신약의 인물은 바울입니다. 알다시피 그는 열성적이고 신실한 유대교 신자로써 초기의 기독교 신앙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를 제치고 인간 예수를 경배한다니 그로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거기다 율법과 성전 제사를 부인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이 부활했다니 이런 천하의 거짓 속임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예수 믿는 신자들은 반드시 여호와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사탄의 종들이었습니다. 유대 땅 안의 신자들을 핍박하는 것도 모자라서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 다마섹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까지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해오려 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1-9)

 

다메섹에 가까이 이른 즈음에 홀연히 하늘의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며 “사울아 사울아(바울의 믿기 전 이름)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무나 놀라 누구인지 물어보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에겐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 거역하는 예수는 마땅히 사형에 처할 죄인이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 천하의 죄인을 경배하는 것도 모자라 그가 부활했다는 거짓 교리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단들을 처단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중인데 지금 바로 그 부활 예수를 일대일로 대면한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늘 보좌의 찬란한 영광중에 임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도 동일한 음성을 들었으니까 혼자만의 환상이나 망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로선 너무나 인정하기 싫고 금방 믿어지지 않았지만 예수가 부활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진리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흘간의 무덤 체험

 

바울은 까무러치게 놀라서, 아니면 성령의 큰 권능 앞에 바로 서있지 못하고 엎드려졌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다 나누고 일어났지만 눈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부축해주어서 겨우 다메섹에 도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너무나 강렬한 천국의 영광을 인간의 육안으로 보았기에 일시적 실명 현상이 생겼거나, 아니면 주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의도적으로 삼일 간 실명시켰을 것입니다. 삼일 간 금식하게 된 것도 식욕이 완전히 떨어졌거나, 아니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기도에 집중하려 금식했을 것입니다.

 

다메섹에 도착한 후에 일면식도 없는 아나니아가 성령의 계시를 받고 찾아와 바울에게 안수하며 주님께서 위임한 소명을 대신 전해주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삼일을 바울은 암흑 천지에 빠트려졌고 음식도 먹지 못했고 아무 활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덤에 누운 시체와 방불했던 사흘이었습니다. 그 내면의 썩어질 옛 사람이 죽도록 만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울에게 구원을 주어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고 강제적으로 꼼작 못하게 만들었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 삼일 간 그의 자유의지가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초자연적이고 가시적인 체험을 통해서 만나 준 것이지 그의 지정의가 작동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게 너무나 완악하게 대적했기에 완전히 항복시키려면 아주 특별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맞춤 구원의, 모든 신자에게 다 그러하지만, 과정이었습니다. 요컨대 바울이라는 한 인격체가 살아 움직이는 그대로 두고서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또 누구인지 자의로 물었고, 나아가 주님의 지시를 듣고 스스로 수긍하고 따른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실명하게 만든 그 엄청난 권능 앞에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당연히 따라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성격이 아닙니다. 설령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쳐도 그런 판단과 결정 자체는 그가 온전한 이성을 갖고 내린 것입니다. 하늘의 빛을 받자 공상과학영화처럼 갑자기 로봇이나 이상한 동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흘간 금식하며 암흑 가운데 지나게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바울더러 이성적으로 계속 분석 판단해보라고 유예 기간을 준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삼일 간 여호와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에 자신이 그 현장에서 지휘했던 일도 회상했을 것입니다.(행7:58)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이때만 해도 바울로선 스데반이 혼자만의 정신착란적인 환상에 빠졌거나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동일한 체험을 한 지금은 스데반이 말한 바가 엄연한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로선 자기가 핍박하려던 예수가 구세주요, 그 십자가 죽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체포해야 할 대상인 아나니아라는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 성령의 계시가 주어졌고 또 그 계시대로 자기를 찾아와 안수 하자 빛을 다시 찾았습니다. 형식적 의무적 유대교의 성전 제사와 율법 준수에만 열심이었던 그에게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자기에 대한 영원한 계획대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자기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새로운 참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더욱 예수가 구세주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심하자마자 다메섹에서 바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9-22)

 

이방인 사도로 준비 된 바울

 

바울의 회심 과정을 간단히 살펴봤는데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심과 구원을 베푸는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이적이 그 부르심의 과정에 몇 번이나 역사했지만 바울 자신의 지정의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로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한 후에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에 어떤 모순도 상충도 없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판단하여 믿기로 결단했으니 당연히 그가 자기 의지로 거절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해선 안 됩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또는 구원을 주기에 합당한 자만 택한다고도 말하는데 이는 불완전한 표현입니다. 그럼 여전히 인간 쪽에 뭔가 구원 받을만한 조건 자질 능력이 있다는 뜻을 내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구원을 베풀 자를 미리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택하여서, 구원에 합당하게끔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인생에 관여하여서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예비하심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아무런 상충 없이 당신의 광대하신 권능으로 진행시키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믿고난 후에는 요셉처럼 이전에는 몰랐지만 지난 인생에 하나님이 구원으로 이끌려고 간섭하셨던 많은 흔적들을 발견 내지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 경이로운 은혜에 감탄 감사하며 그분의 광대하심 앞에 전적으로 항복하게 됩니다. 

 

당사자로선 그분의 선도적 주도적인 구원에로의 초대가 반드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뤄지기에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 인간의 의식은 항상 지정의가 작동된 뒤에야 인식되는 법입니다. 분명히 믿기로 결단하여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으니 마치 자기가 믿은 것이 전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구원 얻은 것처럼 오해 착각하는 것입니다.

 

요셉 본인은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 꿈도 꾸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십년의 그의 인생을 세밀하게 그렇게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어렸을 때 두 번의 꿈으로 그 계획을 미리 계시해주었어도 어느 누구도 그 꿈이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질지 몰랐습니다. 심지어 모두가 그 꿈을 잊었어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계획을 당신만의 방법과 시기에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하나님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여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예비하셨습니다. 특별히 그가 이방인을 주님께 인도하려면 유대의 율법과 대비되는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잘 풀어서 설명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그를 율법의 최고 전문가(예수의 최고 비방자)가 되게끔 그의 초반 불신자 인생을 간섭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최고 전문가(예수의 최고 옹호자)로 바뀌도록 다메섹의 극적인 회심사건으로 만나주시고 후반 사도의 인생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로마 영인 다소 출생인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헬라어에도 능통했지만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행22:3)도 따로 받았습니다. 그는 헬라 문화와 언어에 능통하면서도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율법과 대비되는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합당한 사도로 하나님이 출생 이전부터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으려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극렬한 핍박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주도적 선도적 주권적 택하심에 따른 은혜가 아니면 스스로는 예수를 절대 믿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가 전혀 계획, 의도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던 방향과 모습으로 그의 인생을 하나님이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예수 믿는 과정에, 아니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지정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도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에 아래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사도가 될 자격과 조건이라곤 자기 쪽에 아예 하나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절)고 덧붙였습니다. 예정에 의한 구원이었음을 명시적으로 교리화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전한 복음이 바로 그 진리를 함의(含意)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예정의 진리 됨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

 

제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저같이 미약한 자도 감히 바울과 비슷한 구원의 과정과 체험을 거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을 계획, 의도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무신론자 집안에 태어나서 극렬한 안티크리스천이었습니다. 먼저 믿은 아내의 교회출석을 엄격히 금했고 심지어 성경이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야단쳤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의 방향은 제 꿈과 계획과는 정반대로 이끌어졌고 그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작용함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간증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몇 번의 초자연적인 체험들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정말로 나를 먼저 찾아와서 개인적으로 대면해주심으로써 나의 모든 지난 죄에 대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나를 아시고 당신의 자녀 삼아서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주었다는 사실도 확신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면서 첫 몇 달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통한의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그러다 전문 사역자가 되라는 소명을 직접 받는 체험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교회 밖에서 보던 모습과 안에 들어와 성경을 통해 알게 된 진리가 너무나 다를 뿐 아니라, 그 동안에 외부에 기독교에 대해서 잘못 혹은 부족하게 소개된 내용들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진리들을 이전의 완악했던 불신자의 입장에서 다시 천천히 세밀히 따져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불신자들의 사고방식과 처해 있는 입장에 맞추어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실은 믿기 전의 제 인생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비해 놓으셨다는 점까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즉, 부모로 물려받은 대로 책읽기와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믿기 전까지도 온갖 세상일과 인간관계 경험을 두루 해 볼 수 있게 인도하셨고 그래서 인생을 보는 시야도 비교적 넓었습니다.

 

대체로 감성적인 한국 사람과 다르게 저는 비교적 이성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매사를 항상 중립적 객관적 입장에서 분석하는 합리적 사고습관을 가졌습니다. 믿고 나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극렬 반대자로 기독교를 적극 비판했기에 불신자들이 어떤 점을 문제 삼고 어디에서 의심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래서 그에 맞는 변증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 외에도 현재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이 미리 예비 간섭하셨던 일들이 많습니다. 요컨대 저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제가 제 인생을 제 지정의로 이끌지 못했던 측면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비해놓으신 당신의 일을 저더러 감당하게끔 하나님이 강제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한 치의 어김없이 당신께서 이끌어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그분은 행사하고 계시지만 그와 동시에 저도 제 뜻과 계획대로 아주 자유롭게 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고유한 의지는 그들을 전혀 조종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함께하게 되었고, 그들의 자유로운 결정은 그들을 감추어진 더 큰 계획 속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그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의지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내에 있습니다. ...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가 섞여지거나 혼합되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의 진보 좌파 신학자인 자크 엘릴이 열왕기하를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상기처럼 주목할 만한 언급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시적 정치와 인간의 미시적 정치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주제를 풀어나가면서 말한 것으로 개인 구원에 관한 진술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가는 더 넓은 차원의 인류 역사에도 각 개인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계획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했으므로, 당연히 더 좁은 차원이자 한 명의 개인적 구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하나님만이, 사실은 그분만이 유일한 절대자이지만, 초월자이면서도 동시에 내재자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초월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택한 대로 그 인생을 어떻게든 강제로 이끌어가서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월과 동시에 내재도 하는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으로 인간 개인에게 먼저 간섭하시고 인간의 지정의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놓아두고서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예수 십자가 대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태초부터 합의 예정한 구원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초월자 성부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모든 구원 사역을 총괄하시고, 성자 하나님 예수는 직적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필요한 일들을 충분하게 다 이루었으며, 성령 하나님은 택함 받은 각 개인에게 실제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끔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초월하신 하나님과 내재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구원을 이루기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에 일점 모순 충돌도 없는 것입니다.

 

9/10/2019

 

*** “하나님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열왕기하 주석”-자끄 엘륄 지음, 김은경 옮김, 대장간 2012년 출간, p82-84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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