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독특한 생물이다.

조회 수 2362 추천 수 222 2007.06.22 01: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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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감정은 독특한 생물이다.
(부부 싸움을 하지 않는 최고의 비결)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부가 아주 사이좋게 잘 사는가 하면 너무나 빼다 놓은 한 쌍으로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데도 싸움으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각기 딴 살림을 차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래서 남의 부부 사이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남들은 도무지 알래야 알 수 없는 소위 속궁합이 맞지 않아서 만은 아니다. 사람마다 성격, 기질, 습관, 태도, 사고방식, 가치관 등이 각기 다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똑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른 점이 많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부부 사정은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이 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히 각자가 느끼는 감정과 그것을 절제, 표출하는 것도 다르다는 의미다. 동일한 사건을 똑 같은 여건에서 동시에 겪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극장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연주회를 듣는 것만큼 모든 외적 조건이 동일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 연주를 듣고 난 후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 흥겨움에 넘치는 자, 숙연해진 자, 그저 무덤덤한 자 등 그 반응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한 사람이 동일한 성격의 사건을 겪어도 그렇다. 시간과 장소와 주위 여건과 상대에 따라 감정이 달라진다. 그 외에도 자신의 건강 상태, 그 전에 있었던 일들, 심지어 날씨, 온도, 습도, 등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은 한 순간도 바로 그전 순간과 모든 면에서 절대로 똑 같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그것도  도저히 예측 불가능하도록 미묘하게 움직이는 생물 그 자체가 감정이다.

한마디로 감정은 매순간 하나도 같은 적이 없이 정말로 독특할(unique) 뿐이다. 그래서 독특하게 취급되어져야만 한다. 수학 공식이나 윤리적 계명으로 다루어질 성질이 아니다. 정말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터질까 싶은 심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쉽게 말해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이 덤덤히 있는 자보고 이런 감동적인 음악을 듣고도 왜 울지 않느냐 비판을 해선 안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관여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그 독특성을 존경 내지 최소한 인정은 해주어야 한다.

실성하거나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혹은 귀신에 사로 잡혀 있지 않는 한 모든 사람에게 생긴 감정은 그 나름대로 타당하고도 충분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 극도로 흥분하여 앞뒤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도 어쨌든 그렇게 된 까닭은 있게 마련이다. 그럼 그 원인을 먼저 제거해야지 표출된 감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같이 흥분하면 서로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의 충돌이 아니다. 감정과 감정의 충돌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사람까지 충돌하게 된다.

말하자면 세상 싸움의 원인의 거의 대부분이 잘잘못을 따져서 싸우기 보다는 상대의 감정을 건드린 것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잘못이 있으면 사실은 싸움이 안 된다. 서로 옳다고 고집하니까 각자에게 생긴 감정도 전혀 여과되지 않은 채 상대에게 표출되니까 서로 간에 감정의 골이 먼저 파이는 것이다.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차후로 미루고 감정만 인정 해주어도 분쟁의 거의 대부분을 막을 수 있다.

반면에 진정으로 참 진리를 갖고 싸운다면 얼마든지 싸워도 된다. 피 흘리기 까지 싸워도 된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불의를 참지 않으셨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선 저주까지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도 극도로 흥분된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싸움에 감정을 동원하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사용하도록 감정까지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까지 이성적이며 윤리적이지 못하다. 정당하게 옳은 일을 그에 합당한 감정, 심지어 분노든 저주든 실어서 행해야 하는데도 그 반대로 하고 있다. 정당하지 않는 감정을 먼저 표출하여 옳은 일도 그르치거나, 나쁜 일에도 정당해 보이는 감정만 실으면 옳은 일이 되는 양 착각하는 것이 인간의 죄 된 본성이다.

상대가 먼저 흥분해도 이쪽이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싸울 일이 자연스레 없어진다. 맞서 싸우면 서로 손해다, 신자니까 상대에게 일단 양보하라, 원수도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라 등등의 권면은 따지고 보면 상대의 감정을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데서 출발해야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  속으로는 나도 상대를 향한 분노에 휩싸여 있으면서 겉으로만 잠시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자연 발생적이라 가치 중립적이다. 자기 속에서 때대로 걷잡을 수 없이 용솟음치거나 꿈틀거리는 감정에 선악간에 가치를 부여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찬히 그 원인을 되씹어 봐야 한다. 무조건 그 감정이 나쁘다 혹은 좋다라고 미리 판단해 버리면 당연히 감정에 사로 잡힌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그 현란하고도 미묘한 움직임에 따라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반드시 감정적 교차 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독특하게 생긴다. 사람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식물인간끼리 만나지 않는 한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 말은 관계를 많이 가질수록 감정의 발생은 더 많고 나아가 감정끼리 충돌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부와 부모자식 간에  감정으로 인하여 상처를 가장 많이 주고 받게 된다는 말이 된다. 누구나 다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부부, 부모자식 간은 가장 가깝고도 서로 사랑해야 할 사이가 아닌가? 감정으로 인해 가장 상처가 많아진다면 역으로 생각해 감정을 잘 다스리면 오히려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 훨씬 더 쉬워진다는 뜻이 된다.  

지금 감정을 잘 다스리라고 표현 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라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감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라고 하지 않았다. 단순히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남의 감정은 존중해 주고 자기에게 생기는 감정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절제와 표출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자가 되었다고 무슨 일에든 상대를 무조건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에게도 얼마든지 분노, 저주, 질투, 시기, 불안, 공포, 같은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부터 해주어야 한다. 틴에이저 자녀가 얼마나 온갖 스트레스에 쌓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교회도 안가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그저 쓸데 없는 음악만 듣고 머리 염색이나 한다고 야단 밖에 더 쳤는가? 매일 똑 같은 잡다한 일만 되풀이 하는 사이에 주름 난 얼굴을 바라보며 아내가 자기 인생 전반에 관해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해 보았는가?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가 힘들고 괴로워 하는 감정에 진심으로 동참해주는 것이다. 같이 치고 받고 싸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기 위해선 상대의 감정에 동참부터 해야 할 것 아닌가? 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하지 않는 한 상대를 진정으로 섬기거나 사랑할 수 없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통분히 여겨 흐느껴 우셨다. 먹을 것이 하나 없는 오천명의 군중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축사하셨다. 죄와 세상 사람의 멸시에 찌들어 애통해 하는 세리 삭개오 집에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직접 유숙하러 들어가셨다. 남편 다섯을 두었고 또 새로운 남자와 살기 때문에 집 밖에  제대로 출입도 못하는 부정한 여인을 만나려고 일부러 어떤 유대인도 가지 않는 갈리리 땅으로 곧바로 찾아 들어 가셨다.

그분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함께 눈물을 닦아 주고 한숨을 같이 쉬어주는 모습으로 수행되었다. 기적을 먼저 베풀고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감사하고 경배하니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심지어 사랑부터 먼저 베푼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사랑을 베풀려 하기 보다는 상대의 감정에 먼저 동참함으로써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감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절제, 표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생살이의 윤활유 역할을 하라고 선물로 주신 감정이라면 그 특성 또한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감정을 잘 절제하기  위해선 감정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감정을 그 특성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 특성은 지금껏 살펴 본 대로 크게 세 가지였다. 자연 발생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아주 독특하다는 것이다. 이 세 특성은 따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할 수 없고 사실은 하나로 연관되어 작용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좋은 것인데 단 좋게 되려면 본인이 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에게는 감정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또 상대에게는 그가 갖고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순종

2020.07.23 15:58:20
*.14.99.253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임에 감사드리며 감정이란 잘 다스려야 하는 정말 중요한 것임에도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사역하셨을때 먼저 상대의 감정에 동참하셨음을 놓치지 말고 참고, 아니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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