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

조회 수 2728 추천 수 286 2007.06.22 01: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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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



앞에서 감정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오해가 무엇이지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 한번 여러분에게 물어보자.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좋은가? 감정은 나쁜 것이니까 무조건 억제해야 하는가? 감정을 긍정적으로 절제하는 것이 좋은가? 어느 쪽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일까?

아마 대부분의 신자가 세 번째를 그 답으로 들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뜻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인간의 감정 처리는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다. 비록 잠시이긴 해도 아담과 이브가 그렇게 했던 적이 있었다.

“아담과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이는 어떤 이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당연히 옷을 입지 않은 채였을 것이다. 서로 간에 감추는 것이 전혀 없었기에 부끄러운 감정이 들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부가 따로 뒷주머니를 차지 않았고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 전혀 감추지 않았다면 당연히 감정도 생기는 그대로 표출했다는 뜻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나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을 하나 숨기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었다.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지 않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원래의 뜻은 인간끼리 서로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그런 참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전에 인간이 당신과도 그런 관계를 갖기 원하셨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후에 그분 스스로 심히 기뻐하셨다. 물론 아담과 에덴동산에서 바로 그런 교제를 아름답게 이어가셨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기쁨으로 순종하고 무엇이든 그분과 의논하면서 살았고 돕는 배필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담은 하나님과 또 동료인간인 이브와 한 치의 위선과 가식 없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최소한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끼리 살면 더 신나고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하나님에 대해선 두려움을, 인간끼리는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말하자면 죄를 짓고 나니까 두렵고 부끄러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조차 두렵고 부끄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자꾸만 감추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또 감추고 나면 더 부끄러워지는 것이 그 본질이다.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나뭇잎으로 앞을 가려 보았지만 여전히 두렵고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인간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다간 자신의 부끄러운 점만 다른 사람에게 들키게 된다는 점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부부끼리도 딴 주머니를 차고 휴대폰에 자기만 아는 비밀번호를 감추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잘못을 서로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신자가 감정이 잘못되어서 죄를 짓게 된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그 반대다. 죄가 들어오는 바람에 감정마저 왜곡되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으로는 죄를 먼저 씻어야 하지 감정을 적절하게 다스린다고 해서 이미 죄로 왜곡된 감정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잘못된 감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어진다.

다른 말로 문제는 신자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도 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데 있는 것이지, 감정 자체를 탓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죄 하에 태어나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는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타락한 이 땅에선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

반면에 신자가 죽어 천국에 가면 틀림없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여도 진정으로 기쁘고 즐겁고 화평이 넘칠 것이다. 천국은 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일 뿐 아니라 주님의 보혈로 인간의 영혼에서 죄를 완전히 씻은 후에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천국에서 의인이 설령 흰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아름다운 선물로 주신 뜻도 천국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자.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고 사는 자다. 감정을 신자끼리는 있는 그대로 표출해도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럴 만큼 영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못하니까 차선책으로 절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을 절제(적절하게 통제)하라고 하니까 단순히 질과 양을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으로만 착각한다. 그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의 덕일 뿐이다. 물론 그 정도라도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는 달라야 한다.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서 그에 맞추어 대처해야 한다. 감정보다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 지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주 쉬운 예로 부부싸움을 들어보자. 감정을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해서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싸움을 한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성자다. 아니 아예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소한 싸움을 해도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극도로 치닫게 되는데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도 감정을 절제하며 싸우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신자더러 차라리 싸우지 말고 포기하라든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주라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리며 기도해야 하는가? 남편이 바람피운 것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 올 때까지다. 다른 말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발하며 싸우게 된 원인인 죄를 제거할 때까지다.

감정을 절제하며 싸우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대신에 죄를 절제하면 감정도 함께 절제되어서 자연히 싸움도 절제하게 되는 법이다. 당연히 감정을 절제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도 평생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죄를 해결해야 감정도 함께 절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감정만 절제하려 들어선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부터 가장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예수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마5:5)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온유’는 단순히 성격이 유순하고 양보를 잘하는 착한 심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야생마 같은 폭발적인 힘을 지녔으나 훈련이 잘 되어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히 조절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감정도 경우에 맞추어 잘 절제할 수 있는 자다.

그런데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 먼저 누려야할 복은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야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피조물이며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 깨달아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죄와 상처와 허물들이 씻음 받고 난 이후에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만 의존하면 자연히 자신의 본성과 기질이 절제되어지고 감정의 표출도 온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성숙해져도 완벽하게 온유해질 수는 없다. 감정을 선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완전하게 절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신자들 사이에선 최소한 감정의 좋은 점만은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감정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매도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 표출로 인해 쉽게 자신의 감정마저 상해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성도들의 교제는 궁극적으로는 서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서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교회에서 찬양할 때에 기뻐서 박수치고 일어나 춤도 출 줄 알아야 한다. 찬양을 통해 신자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결혼잔치가 되어야 한다. 결혼 잔치에 기뻐서 춤을 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의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부정적 감정을 교회에 나와 하나님과 성도들을 통해서 서로 위로, 동정, 권면, 도전을 받아 긍정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기도나 상담할 때에 서로 손 잡고 같이 울고 웃어주어야 한다. 일부러 감정에 호소할 필요는 없지만 혹시 감정이 자연적으로 표출 되더라도 성령 안에서 오히려 그런 감정으로 인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더 나타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시22:3)이다. 찬송은 오직 순전한 감정이 따라야 한다. 속으로 슬픔과 의심과 불평과 분노를 잔뜩 안고 나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을 오히려 있는 그대로 속속들이 그분 앞에 털어 놓아야 한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완전히 인정할 때까지 갈등하며 씨름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늪에 잠겨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감정을 억제하면서 찬송하는 것은 올바른 찬송이 아니다. 그분에게 감사와 기쁨과 평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야 한다. 나쁜 감정도 찬송을 통해 이뤄지는 그분과의 교류를 통해 해결 받아야 한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결국 신자가 당신을 향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드러낼 때에 비로소 그분과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며, 또 그분의 충만한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의 감정 중에도 거하신다. 아니 인간에게 감정을 아주 귀한 선물로 주신 분이다. 그래서 당신께서 먼저 신자와 감정이 충만한 교제를 원하신다. 다른 말로 교회는 신자들끼리만이라도  함께 울고 웃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감정을 그대로 표출해 상처, 오해,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신자는 최소한  가족과 성도들 간에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은 해야 한다. 간절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 자신부터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 하면 온유해질 수 있다. 또 온유해진 자들끼리 모이면 감정이 있는 그대로 표출되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다.    

김순희

2010.10.21 09: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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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길들여진 야생동물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그 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 함이 온유인 것을 그저 착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아냄이 온유로 배워왔습니다.ㅠㅠ
그러니 감정은 그저 눌러 참아서 누가 누가 연극을 잘 하는가로 신앙의 수준을 판가름하게 되고 그 신앙의 우월을 증명받기 위해 성도들은 감정 억누르기 훈련만 죽도록 해온 것입니다.
교회에가서 연기력 배워온 것입니다.ㅠㅠ

제일 우선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함의 중요성, 이 중요성을 진심으로 깨닫고 성령님의 간섭하여 주심을 절절이 간구하며 무릎꿇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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