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5 발락의 신탁(神託)만 붙드는 신자

조회 수 506 추천 수 19 2009.09.09 0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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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의 신탁(神託)만 붙드는 신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세상 사람들은, 간혹 신자들 가운데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오해가 예수 믿지 않는 자는 현실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오직 신자에게만 복을 준다는 또 다른 오해를 낳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만 편애하는 불공평한 분이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형통과 구원을 얻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나아가 구원도 기독교만 편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모든 죄를 당신께 자복하고 정말 겸비하게 나오는 자라면 누구라도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자기 옛사람을 죽이며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인종, 문화, 관습, 언어, 아니 종교와도 관계없이 다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어 받는 복은 우선 지옥의 형벌을 면하는 것이며, 또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 천국 시민에 합당하게 자라는 것이며, 나아가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의 먹고 마시는 문제의 형통은 그분의 신자에 대한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불신자가 예수 안 믿었다고 해서 당신의 현실적 축복에서 제외되거나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선 현실은 하나님 대신 돈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목표지향성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소유한 자가 형통하기 마련입니다. 시쳇말로 돈 독이 오른 자일수록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버니까 자연히 부자가 됩니다. 반면에 돈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목표로 사는 신자는 자연히 세상에선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을 하기 전까지 불신자들을 사단에게 한시적으로 맡겨 놓았습니다. 따라서 사단이 세상을 다스리는 궁극적 목표는 언제나 그들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 목표를 이루는 최적의 수단은 돈에 눈이 멀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형통과 안락만 구하는 자들에게 그 바라는 대로 이뤄지도록 사단이 도움을 주어서 구태여 하나님을 찾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불신자가 신자보다는 더 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일에 하나님까지 힘을 보태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우선 불신자나 사단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묵인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둡니다. 육신의 일을 좇아서 육신의 열매만 맺도록 하십니다. 나아가 그들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립니다. 당신께서 창조한 피조세계를 신실하게 운행하시므로 생활여건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동일합니다. 단지 그들이 이 땅에서의 형통만 좇으므로 일시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뿐입니다. 그들로선 하나님께 불평할 건더기라고는 전혀 없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복을 줄 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정총무를 “맡은 때부터”, 즉 “맡자마자” 복을 주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가정 내부와 외부의 모든 일이 다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을 처리한 면도 분명 있지만, 성실과 정직 대신 요령과 거짓이 더 잘 통하는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형통했다면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들 신자에게만 복을 주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신이야말로 편협하고 배타적입니다. 신자가 자기 신에게 빌면 비는 만큼 복이 돌아옵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형통의 복을 자기들에게만 내려달라고 빕니다. 심지어 유일하신 창조주 절대적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마저 그렇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을 보고선 메소보다미아 사람으로 선지자인 발람을 불러 승전을 비는, 즉 상대를 저주해달라는 신탁을 의뢰했습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22:6)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과 심지어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있던 발람의 신앙 내용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서 신의 능력을 최대한 우려먹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자기 민족에게는 복을, 다른 민족에게는 저주를 내려 달라고 빌면 신은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어떠했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아브라함더러는 다른 민족을 저주하는 간구는커녕 심지어 자기와 자기 족속을 위해 복을 빌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사랑해 당신의 복을 다 같이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복을 나눠주는 역할을 아브라함더러 맡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의 전달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흥미롭게 아브라함이 특별히 해야 할 역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들을 저주하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더러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기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 축복 받는 자가 먼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복을 따로 더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은 다른 사람만 받았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시지만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복을 전해주는 근원이 됩니다.  그가 받은 복은 사람들에게 축복 받은 것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보디발이 그를 가정총무로 세워서 축복했더니 하나님이 요셉 대신 보디발에게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맡은 바 일만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로선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뿐이지 아무리 고관대작이라고 하지만 노예 신분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 땅으로 돌아갈 희망은 전혀 없이 타국에서 나그네로 일생을 마쳐야 할 판입니다. 정말로 그가 받은 복은 사람들에게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믿음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뿐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요셉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받은 복이었습니다.

이는 발락의 신탁과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발락의 경우는 복의 종류와 크기를 인간이 정했습니다. 복의 내용도 현실의 형통과 안락뿐이었습니다. 신은 인간의 요구대로 들어줄 의무가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신자가 복의 종류와 크기를 정할 수 없습니다. 받을 복의 내용도 성실, 정직, 거룩, 의, 믿음 등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의 언약에 초대 받은 자로서 오직 그분께 순종 헌신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최종 목표는 땅의 모든 족속이 신자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그 언약을 실현하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기 위해 그분의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가장 먼저 사람들 사이에서 축복 받는 모습으로 전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썩는 밀알부터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후에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만 올바르게 전해집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는커녕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고 있고, 심지어 발락의 신탁과 똑 같은 형식으로 간구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스스로 믿음의 후손이기를 거부하는 꼴 아닙니까? 그럼 믿음이 없는 기도인 셈인데 과연 응답이 되겠습니까?

6/19/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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