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3:3,4 문제는 진심(眞心)보다 본심(本心)이다.

조회 수 598 추천 수 16 2009.09.09 01: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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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진심(眞心)보다 본심(本心)이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원수가 되어서 헤어졌던 쌍둥이 형제가 20 여년이 지난 후 감격적인 재상봉을 하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야곱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해 장자권을 빼앗겼던 형, 에서가 달려와서 동생을 맞아서 안아 주었습니다. 피해자가 먼저 사랑으로 용서해 줌으로써 피차 눈물 흘릴 정도로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과연 본심(本心)에서 그랬는지는 한 번 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진심(眞心)으로 용서하지 않고 가식으로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태여 본심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평소에, 말하자면 이번 해후가 있기 오래 전부터 그가 동생을 그렇게 사랑했기에 용서해주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징후가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사백 인을 거느리고 동생을 맞으려 나왔습니다.(33:1) 여차하면 동생 일행과 일전을 벌릴 각오였습니다. 아주 잘 봐주어 싸울 의사가 없었다 해도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행동입니다. 친동생과 화해하는데 부하들을 동원해 나올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 앞에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주어 대장의 위신을 더 높일 필요가 없는 한에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가 생길지 몰라 부하들을 대동해 왔더니 너무나 싱겁게도 막상 야곱은 형과 싸우거나 아니면 형 앞에 자랑하려는 태도는 아예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오는 도중에 무장방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수많은 가축 떼를 만났습니다. 그 떼를 모는 종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니면 어림짐작으로라도, 전부 야곱이 자기에게 주는 예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이 반쯤은 풀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야곱이 형을 먼저 멀리서 알아보고 극진한 예의를 갖추고 나갔습니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왕이나 정복자에게 온전히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먼발치서부터 일곱 번 절하면서 나가는 당시의 방식을 좇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라는 항복 선언입니다. 이제 에서는 동생에게 복수하거나 미워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바꿔 말해 에서에게 평소 야곱을 용서해줄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예물과 항복을 받고서야 용서해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더 결정적인 힌트가 있습니다.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27:44,45) 야곱을 도피시키면서 엄마 리브가가 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십 여 년이 지나도록 야곱은 그런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순전히 자의로 귀향했습니다. 리브가 입장에선 쌍둥이 형제가 원수로 지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에서의 마음을 돌리려 계속 최선을 다해 설득했을 텐데도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만큼 야곱에 대한 저주가 극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의 용서가 단순히 물질 욕심에 동해 가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순전히 예물이나 야곱의 항복에만 이끌렸다면 먼저 달려와서 안고 눈물까지 흘리며 용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괜히 계면쩍은 입장을 감추려 더 거들먹거리는 것이 상식적 반응입니다. 무엇보다 남을 속이려 가식하는 것은 야곱의 전공이지 에서는 감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즉흥적 기질을 가졌지 않습니까? 용서는 분명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정작 우리가 따져보아야 할 것은 그 긴 세월 동안 동생에 대한 분노를 떨쳐버리지 못하던 자가 진심으로 용서할 만큼 돌변하게 된 까닭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야곱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에서가 순전히 그의 얼굴 표정이나 태도만 보고도 느낄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월의 풍상에서 다져진 성숙해진 면모에서 이전에 사기꾼이었다는 징후는 도저히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곱 번이나 자기를 향해 굽실거리며 절을 해도 비굴하거나 가식적이거나 어떤 의도를 숨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화해의 열정이 묻어져 나왔습니다.

밤새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대로였습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것은 이제는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 질 수 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해진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사람에게도 지지 않게  보호해준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이 함께 하기에 어떤 악한 자에게도 자신을 통해 흘러나가는 그분의 영향력으로 은혜를 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능이 야곱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에서의  분노를 사그라트려 동기간의 애정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해진 야곱이 현실의 형통만 목표로 하며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고 있는 에서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아닌 힘에 영향 받게 했습니다. 그에게 형제로서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하는 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고 화해한 것은 분명 진심이었고 그렇게 된 배경에는 어떤 인간적인 요인보다도 절대적으로 선하고도 강력한 성령의 권능이 작용한 것입니다. 야곱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에서마저 평소의 본심과 달리 진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모든 세상살이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요체는 당사자가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미 그렇게 된 모든 신자는 사실은 야곱처럼 하나님과 다투어 이긴 자라는 이름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믿음의 가문에 소속된 새 이스라엘이지 않습니까? 아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습니까?

신자 스스로는 죄악과 사단과 죽음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권능을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오는 순간 부여 받았습니다. 주위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나눠주어 그분의 구원에 초대하고 그 전과 후에라도 신령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야곱처럼 멀어진 이웃이나 형제간의 화해는 언제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직 이스라엘이 안 된 까닭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순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분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진심이 아니라 어떤 다른 불순물이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이란 반드시 평소의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법입니다. 그 순간에만 진심을 갖고자 해선 스스로 진심인 양 착각하거나 자기 최면은 걸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신자라도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사모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 평소에 어떤 본심을 갖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항상 평소의 본심으로 나오면 되지 진심으로 치장 내지 재무장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그분과의 관계가 그분의 뜻에 맞게 거룩하고 신령하게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어지게라도 해야 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과 누구를 만나도 이미 이스라엘로 바뀐 신분과 소속과 특권에서 한 치의 가감 수정 타협 포기가 없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과 죄악과 사단과 죽음에 대해 넉넉히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후패해도 속은 더 강건하고 신령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겉모습에만 이기려고 하나님께 이미 받은 십자가 권능은 제쳐두고 또 다른 힘을 달라고 떼를 쓰는 신앙생활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을 이겼다는 이스라엘에서 사기꾼 야곱으로 다시 재개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5/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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