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13,14 신앙 여정의 종착지(3)

조회 수 495 추천 수 22 2009.09.09 0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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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여정의 종착지(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22:13,14)


하나님이 신자보다 앞서 가 모든 것을 세밀하게 준비해 주신다면 신자가 걱정할 이유가 아예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가운데로 인도되고 있는 여정이기에 논리적으로도 신자가 염려하고 애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염려가 끊이지 않은 이유는 우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에 지성보다 감정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여전히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최소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릴, 다른 말로 자기 계획대로 하려는 욕심만은 버릴 수 있어야 할 텐데도 솔직히 그러지 못한 것이 우리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시종일관 갖다 대는 핑계는 그도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을 바치기까지는 백년도 훨씬 더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백 살까지 살지 못할 것이니 여호와 이레는커녕 모든 것을 바치는 참 경외의 단계까지 안 가도 된다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 믿음의 조상인 그가 그런 자리에까지 이른 과정을 살펴서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시로선 참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자로 주위에 본받을 신앙의 선배라고는 없었기에 오래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성령의 전까지 된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도 읽을 수 있는데 믿음의 훈련에 게으름을 부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단언컨대 신자가 된 이후의 가장 큰 죄는 경건에 대한 게으름과 경건해지고픈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최초의 사람답게 그분의 이름을 평생을 통해 네 번을 다르게 불렀습니다. 성경이나 간증으로 신지식(神知識)을 전혀 얻을 수 없었기에 본인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직접 겪은 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은혜를 입었고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이며 특별히 자기와 어떤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해 동맹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카 롯을 구한 후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엘 엘욘)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14:22) 지극히 높은 곳에서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기를 감찰하시어 모든 사정을 아시고 이 전쟁에서도 승리케 해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나아가 도저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므로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두 번째 별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스스로 설명한 것이지만 그도 그런 믿음의 수준이 되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까닭이 신자가 그분을 갈구하며 씨름한 신앙 체험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언약을 재확인하면서 할례를 명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능함을 확신하지 않고는 천하 만민이 자기를 통해 복 받을 것이라는 언약에 감히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징표로 할례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껏 개인적 일에 매달렸던 그의 삶이 이제부터는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이타적인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세 번째 별칭은 블레셋 땅의 그랄 왕 아비멜렉과 상호 화친하는 계약을 맺을 때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21:33) 비록 상당한 시일이 흘렀지만 자기를 통해 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조금씩 실현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방인인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21:22)라고 인정하고는 먼저 화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비멜렉으로선 더 강해 보이는 신인 여호와를 믿는 아브라함과 전쟁을 막자는 단순한 뜻보다 그와 그 후손이 사는 방식에 감명을 받고 후손끼리도 서로 교류하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복이, 즉 모든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긍휼과 은혜가 전해지는 통로가 실제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도 하나님의 언약은 정말로 영원토록 신실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외아들 이삭까지 하나님께 아무 주저 없이 드리는 단계에 이르러선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믿음은 반드시 거쳐야 할 순서를 빠트리지 않고 거쳤습니다. 하나님도 단계별로 그의 믿음의 분량만큼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분량만큼 그의 믿음이 자랐습니다.

백년이 넘게 걸린 그의 영적 성숙 단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어떻게 됩니까? “천지의 주재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당신의 약속을 영원토록 신실하게 수행하시기에 신자는 먼저 가서 행하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여 자기 전부를 내어드려야 한다.” 이를 또 바울 사도 식 표현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뿐 아니라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생각 특별히 감정은 팔색조처럼 주위 여건에 따라 휘황찬란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토록 신실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은혜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또 신자 각자가 처해 있는 형편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온갖 색깔로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기 자녀를 향한 계획과 뜻은 항상 동일합니다. 마치 무지개는 일곱 가지 화려한 색깔로 나타나지만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는 영원토록 변함없듯이 말입니다.
    
신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초월적인 존재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극히 높으신 분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 만나 주시고 모든 일을 이끌어주셨듯이 전지전능하시며 영원토록 신실하심을 삶에서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처럼 하나님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자기만의 표현들이 수도 없이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뜻과 계획과 생각이 팔색조처럼 변한다고 그분의 은혜 또한 같은 색깔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무지개처럼 임하실 뿐입니다. 그분 은혜의 질과 양이 혹은 격조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은 반드시 단계를 밟아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씩이라도 동행하면 당신을 더욱 깊이 알아나가 정말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그분 한 분만으로 족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해주십니다.  

성숙한 믿음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실질적 모습은 환난 중에도 소망이 더 커지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인지라 자기 계획과 뜻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환난이 있기에 소망이 생기고, 나아가 더 큰 환난이기에 소망은 더 크게 자라는 법입니다. 아무 어려움과 염려가 없는데 소망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이라야 완전한 소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절망이라 하나님만 갈급히 찾게 되고 그분이 주시는 소망이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현실적, 육신적, 정서적 기쁨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스럽긴 여전합니다. 대신에 그분을 바라는 소망이 커지기에 그 소망에서 오는 설렘과 흥분이 커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또 어떤 은혜를 부어주실까 아주 궁금해 하며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우리와 다르기에 소망이 생깁니다. 나아가 그 다른 생각과 길이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도저히 예상이 안 되니까 설레고 흥분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솔직히 그분을 너무나 자주, 아니 거의 매번 우리의 알량한 지성과 믿음으로 묶으려 들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팔색조처럼 변하는 감정의 색깔마저 그분에게 어지럽게 덧입혀 놓습니다. 그분의 길과 생각을 우리 수준으로 떨어트립니다. 쉽게 말해 기도하면서 내가 정해 놓은 질과 양의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믿음이라는 엉터리 실력(?)을 동원해서 어림짐작합니다. 사람들끼리 실력이 엇비슷할 때는 상대의 수를 서로 짐작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가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어림짐작하니까 사람의 경우와는 달리 맞아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매번 기도하면서도 염려는 끊이지 않고, 의심과 불만과 불신앙만 자라며, 결국은 신앙 여정에서 실패의 전적만 계속 쌓고 있는 까닭입니다. 도무지 예상치도 못하는 하나님을 짐작하려 드니까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신자가 보일 최소한의 반응은 환난 중에도 염려는 하지 말아야, 아니 소망만은 잃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3/1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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