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보다 더 싫은 것은?

조회 수 2933 추천 수 277 2006.07.19 23: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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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穩全) 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평생 따라 다니는 치명적 약점

교회 안에서도 주위에 교만한 사람을 보면 상대하기가 싫어지고 어떤 때는 밉기까지 하다. 세상은 어차피 모든 사람이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며 또 그런 맛에 사는 곳이다. 교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런 버릇이 남아 있구나 싶으니까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오만함보다 더 싫은 것이 있는데 자신의 약점과 허물이다. 다른 사람의 교만은 눈을 감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또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는 한 그냥 참고 넘어가 줄 수 있고 설령 피해를 보아도 그 때 한 번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은 평생을 따라 다닌다. 눈을 감을래야 감을 수도 없고 오히려 그럴수록 자꾸 더 눈덩이처럼 커져 보이고 끝없는 자기혐오로 이끈다. 그리고 실패를 겪을 때마다 항상 그 약점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 심지어 그 실패의 다른 원인들마저 냉정하게 분석도 못하게 만든다. 치명적인 약점은 매사에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 철천지원수 괴물 같다.

제발 그 약점만 없으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 같고 없어지는 순간 하늘을 날 것 같다. 정 없애거나 고칠 수 없다면 잊고 살든지, 없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든지, 최소한 남들 앞에서라도 그런 약점이 있다는 것을 감출 수만 있어도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더 미칠 지경이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이미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아니라 단순한 몇 가지 단점 중의 하나가 되므로 크게 개념할 것이 없다. 사실은 본인도 도저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럴수록 없애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지만 거의 불가능한 그런 약점을 사람마다 한 두 개씩은 갖고 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7,8)

그가 가진 사단의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도 전혀 모르고 본인만 남몰래 괴로워했을 문제였을 것이다. 오스월드 샌더스가 “그것은 바울 사도를 고통스럽게 했고 수치스럽게 했으며 제한 시켰었다”라고 말했던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약점으로 인해 느끼는 괴로움의 내용은 우리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개인적인 수치나 실패와 연관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로 여겼다. 흔히 추측하듯이 간질이었다면 얼마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었겠는가? 수시로 발작하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누가 듣기나 하겠는가? 간질이 아니라 해도 의욕적으로 어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했겠는가?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에게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시를 없애달라는 직접적인 요청에는 침묵했지만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선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통해 바울에게 들려주었다. “하나님의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물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이 교만한 것보다 더 싫은 우리의 허물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이다. 바울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오묘한 그분만의 섭리이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만을 위한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주관하려 든다. 당연히 스스로 자신이 최고인 줄 알게 되거나 최소한 제 멋에 사는 습성이 붙게 된다. 누구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교만한 존재가 인간이다.

신자가 되었다고 크게 예외가 아니다. 원죄에 대한 심판에선 구원을 받았지만 그 죄의 권세에선 완전히 자유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 또한 아직도 자기 잘난 맛에 살려는 경향이 많이 남아 있어서 남들 앞에 언제라도 교만한 자로 비췰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제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남들에게 교만하게 비취어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당신께서 전적으로 주관하는 인생을 사는 자는 당신뿐만 아니라 세상 앞에서도 겸손하게 서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은 보여 주어야 한다.

정말 죽기보다 싫은 치명적 결점과 허물은 세상 앞에 자고하지 않도록 주신 하나님의 예방 조처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남들이 교만해 보이는 것이 그렇게 싫거든 우리도 남들에게 교만하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만 아는 치명적 허물과 약점이 나의 교만을 꺾어 주기를 바라야 한다. 실제로 간질이 때때로 발동하고 그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다면 남들 앞에 감히 교만해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허물과 하나님의 은혜

그런데 바울은 자기 약점을 단순히 스스로 자고하지 않도록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의 약점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지나가는 통로로 연결하는데 동원했던 것이다.

그럼 흔히들 휠체어 타고 나와 간증하는 모습으로 적용했을까? 하나님은 도저히 남들이 보기에도 안쓰럽고 정상 활동이 불가능한 지체부자유자들에게 당신의 일을 감당시킬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몸으로 저런 사역을 잘 해낼까 싶어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휠체어를 탔다는 것 자체에도 인간적 공로가 들어갈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 그분의 일을 향한 본인의 사랑의 순수성과 헌신의 진정성을 함부로 의심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자칫 휠체어를 타고도 나는 이렇게 잘 믿는데 식의 헛된 자부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그 본인은 온전히 순수할지라도 보는 이들이 자꾸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적 동정과 혼합 내지 혼동할 수는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바울의 경우는 달랐다. 당대에 아무도 그의 가시가 무엇인지 몰랐다면 남들에게 밝히기조차 부끄러운 약점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약점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런 허물이 있음에도 나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가시를 외부로 들어내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죽이는 데에 동원했다. “내가 과연 이런 몸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이 일을 하는데 과연 내 몸의 건강이 따라 가줄까? 혹시라도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발작이 도지면 어떻게 하지?” 어떤 일이고 할 때마다 주님이 전적으로 인도해달라고 두 번 세 번씩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심지어 일을 하는 중에도 계속 주님의 은총과 권능만 바라 봤을 것이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후5;17)는 권면은 그야말로 자신의 평생을 둔 생생한 체험에서 나오는 말임에 틀림없다.  

추측컨대 바울의 평소 성격이 베드로만큼 급했던 것 같다. 공회에서 면허를 받아 나사렛 이단을 쳐 죽이러 멀리 외국에까지 갔다. 복음을 알고도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베드로를 예수의 수제자임에도 아랑곳 않고 그 자리에서 야단쳤지 않는가? 사역 말기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동료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뿌리치고 갔던 그였다.

그런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계시를 받았다. 그 가시가  없었다면 이전의 본성을 완전히 죽이지 못해 이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를 잡아 죽이려 했을지 모른다.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었거나 로마 감옥에서 화병이 나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본인만큼 잘 아는 자가 없다. 도저히 남들에게 발설 못할 가시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죽이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신 인도만을 바라보았다. 말 못할 가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면 알수록 더욱더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자신을 죽여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앞으로 두 걸음을 전진시키는 것이 아닌가?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권능은 자신의 그 수치스런 허물과는 아무 상관없이 더 크게 드러났다.  

그런 모든 체험 끝에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이것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내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약점을 소유하라.

그도 처음에는 그 허물을 없애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없애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 약점은 없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성령의 음성을 통해 자고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그 약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말하자면 바울은 약점을 없애거나 줄이려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 가시가 없어지지 않고 필요하다면 때때로 자기를 죽여 달라고까지 기도했을지 모른다.  

그는 그 허물이 가져다주는 치명적 결함 때문에 자신의 다른 부분의 교만까지 완전히 죽였다. 또 그 약점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 받지 않기만 바랬다. 그것을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한 이유는 자신의 하나님 사역을 방해하고자 사단이 일부러 심어 준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었지 않겠는가? 자신의 체면이 살아나고 자존심을 세울 목적으로 그 허물을 없애려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약점이 약점으로만 남아 있지 않게 하셨다. 오히려 그 약점으로 인해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셨다. 바울 개인의 약점이 하나님의 장점이 되었다. 신자의 허물은 하나님의 권능의 통로다.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약해질 때라야만 반대로 하나님은 신자 속에서 강해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 않는가?  

신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약점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당연히 없애거나 고쳐 달라는 간구를 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통해 자신의 교만을 죽여야 한다. 바울은 남에게 밝히기조차 부끄러운 치명적인 약점이라 오히려 그만큼 더 치명적으로 겸손해졌다. 사람은 남들에게 들켜도 그냥 한 번 쯤 크게 웃고 넘어갈 허물이라면 결코 낮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약점을 일부러 드러내어 사람들의 동정을 사려는 구실로 삼는 것이 인간이다.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의 출발점이 된다는 인식이 없으면 고쳐 달라는 요구밖에 하지 못한다. 만약 그 요구대로 고쳐지면 오히려 더 자고해진다. 자기는 믿음이 좋아 기도하여 허물을 고쳤다고 자랑할 뿐 아니라 이제는 거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교만한 본성이 더욱 펄펄 살아난다.

또 만약 고쳐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떼를 쓰거나, 하나님 당신을 불평하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을 핑계로 동원할 것이다. 인간은 이래저래 우리 자신의 지난 신앙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매를 맞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 당신이 하신다. 인간의 약점과 상관없이 그분이 하신다. 아니 그 약점마저 들어서서 하신다. 심지어 그 약점 때문에 더 큰 일을 이루시기도 한다. 그래서 약점과 허물은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요 그것을 통해 당신께서 이루실 일이 반드시 있다.

모세, 다윗, 바울 모두 살인자였고 베드로는 치사한 배반자였지 않는가? 우리 또한 겉으로 드러난 구체적 범죄 행위는 없다 뿐이지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완악한 자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보다 낫다고 자신할 자 없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치명적 허물과 약점을 갖고 있는 반면에 그들만큼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요컨대 우리가 가진 허물과 약점을 당장 없애고 고치려 하기 이전에 소유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단이 심어준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채찍이자 그분의 권능의 지팡이이다. 소유만 할 것이 아니라 아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약점 자체가 귀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데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 귀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신자가 자신의 약점과 허물마저 하나님 안에서 감사함으로 귀하게 여길 때에 비로소 바울처럼 그 일생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7/19/2006

김문수

2006.07.20 02:08:32
*.74.160.92

아멘!!!!!!!!!!!!!!

국중후

2006.07.21 14:10:20
*.147.129.60

아멘!!!!!!!

허경조

2006.07.22 14:24:58
*.113.44.57

아멘 아멘 귀한 깨달음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김유상

2006.07.24 19:46:25
*.170.40.27

우리에게 심겨 둔 사단의 가시를 무력화시키고 오히려 그것을 당신의 일을 위해 용도변경시킴으로써 사단을 황당케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하나님, 참 멋지지 않으십니까! 사단이 온갖 가진 재주 동원해 까불게 내버려 두시곤 그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낭패보게 만드십니다. 벙쪄 있는, 끙! 신음소리 내며 약올라 하는, 허탈한 표정으로 두 손 치켜 들고 있는 사단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하나님은 빙그레 웃음짓고 계시고요. 성도들은 역시!하며 감탄어린 표정과 기쁨에 찬 모습이네요.

김순희

2010.09.06 17:04:13
*.161.8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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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받을만한 환경과 상황속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의 자칫 조심해야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 상황과 환경으로 이미 동정이라는 것으로 상대방의 맘을 흔들며 시작하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것 또한 사람의 의가 가미된 이상야릇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참 조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교만보다 더 싫은 허물과 약점을 사도바울처럼 자신을 죽이는 일에 진력하여야겠습니다. 어느분의 말씀처럼 '자아분실 신고'를 낼 정도로 철저히 옛자아를 십자가 앞에 공손히 내려놓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어진 가시와 채찍은 거룩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절절이 감사하면서 걷는 천국의 길목이면 참 좋겠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6.23 22:50:46
*.109.8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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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과 약점이, 허물과 약점이 정말 교만보다 너무 싫은데...
그 허물과 약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될까보아 전전긍긍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는 인간인데, 사도바울은 그 허물과 약점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될까보아 괴로와했던 부분이 너무도 귀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닮고 싶습니다.
사단의 가시를 볼 때 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인간인지를 잊지 않도록 배려하신 은혜인지라 그 허물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겸손히
걸어가길, 아니 그 허물들로 인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심을 더욱 분명히 바라보며 걷게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날마다순종

2020.08.27 16:28:41
*.14.99.253

신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채 그분 앞에서 사실 있지도 않은 내 의를 드러내는 교만이 가장 싫은데, 남이 모르는 나만의 허물과 약점으로 이 교만을 눌러 없애고 종교적, 가식적인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 있게 해주는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게 주신 채찍이며 선물이요, 은혜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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