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영원히 바보일 것이요.

조회 수 1741 추천 수 184 2004.08.12 23:26:08
6/25/04  

약자는 선한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은행가 연례 총회에서 윌터 겔러란 분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맨 뒷줄에 앉은 한 사람이 연설 한마디 끝날 때 마다 술에 취한 채 ‘바보(idiot)’라고 큰 소리로 야유했다. 하도 화가나 잔뜩 벼르고 있다가 또 그러자 ‘술주정뱅이(drunkard)’라고 맞받아 쳤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맞습니다. 나는 술 주정뱅이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일 아침이면 멀쩡하게 깨겠지만 당신은 내일도 여전히 바보일 것이요” 라고 빈정댔다. 혹을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부친 꼴이 되어 버렸다.

인간 세상은 항상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능력과 자질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쪽이 승리하면 다른 쪽은 반드시 패배하기 마련이다. 생존 경쟁이란 원래 승리만이 궁극적 목적이므로 정당성과 상관 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러다 보면 패자로선 실력보다는 권세나 거짓에 진 것 같아 억울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피지배 계급, 소외 계층, 사회적 약자 층은 선하고 그 반대인 승자는 악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세상의 싸움은 어차피 진흙탕 속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누가 더 강력하고 끈기 있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느냐의 싸움이지 패자라고 해서 선한 방법만 사용했다는 법은 없다. 패자도 같이 악한 방법을 사용하였으되 그 힘과 끈기에서 밀렸을 뿐이다.

패자가 정말 선한 방법만 동원했다면 억울해 할 것도 사실 없다. 선이 악에게 당했으므로 실제로는 억울한 일이 분명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선이란 그 자체에 상대의 허물과 죄악까지 포용하며 사랑하는 부분까지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뜻하고  또 그것이 없으면 완전한 선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억울하게 당한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하면 벌써 그 자체로 완전한 선에서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의인이 왜 핍박 받아야 하고 왜 악이 형통해야 합니까라고 하나님에게 의심과 불평을 가지는 것은 이미 온전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참 의인이라면 의로우니까 억울하게 당하게 되어 있다. 생존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선 악이 형통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더러 그것을 고쳐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를 포함해 이 세상을 몽땅 없애달라는 요구와 같다.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 자도 사실은 정도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악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온전한 의인은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악인과 모르는 악인으로 나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악인인 신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 뿐이다. 비록 억울하게 당한 것 같지만 정말 내가 선으로만 살아 핍박 받았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신원 해주시고 바로 잡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정말 선한 자는 선 자체에 억울할 이유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다.  

그 연사가 바보라는 야유를 먼저 받았지만 그도 술주정뱅이라고 반발해 서로 욕을 퍼부은 결과가 된 것은 사실이다. 단지 마지막에 더 강한 욕으로 한 방 더 먹인 자가 이긴(?) 것 뿐이다. 세상은 어차피 진흙탕이다. 진흙탕에서 진흙을 가지고 놀면 아무리 깨끗하게 놀려고 노력해도 손에는 진흙이 남게 마련이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

따라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고 악한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어설픈 짓거리로는 아무리 해도 실패하거나 얼치기 중간 밖에 못하게 되어 있다. 아니면 세상이 쓰는 방법이 아닌 것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들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본질을 모른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인가? 아니다. 틀린 말이다.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불신자다.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는 자도 여전히 불신자의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간 것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다. 신자란 삶의 목표를 세상에서의 승리에 두지 않게 된 자다. 대신에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 자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 자체를 이겨내는 자다.  

신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내 삶을 통해 이뤄지도록 나의 전부를 그 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세상 속에서 살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방법만 동원해야 한다. 나의 승리가 목표가 아니다. 나의 성공이냐 실패냐는 이미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떠나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며”(빌3:7)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롬14:8)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신앙 생활이 힘든 까닭이 무엇인가? 기도 적게 하고 말씀을 안 보아서 그러한가? 신자의 진심과 열성이 모자라서인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세상에서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목적이 분명히 안 서 있기 때문이다. 단간 방에 고생하며 살 때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생활이 비록 고달프고 짜증은 나지만 힘을 잃고 좌절하는 법은 없지 않는가? 신자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힘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고 그 분의 전지전능 하심에 의지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 기도하는 것만을 두고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최소한 기독교에서만은 그렇다.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당신만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목적과 계획을 갖고서 이 땅을 통치하시며 그 계획을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이루시고 계신다. 따라서 신앙이란 그 계획에 내가 전적으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여 직접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과 인생과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실제로 살아 가고 있는 것만이 신앙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

성경은 분명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했다. 당장 두 팔 걷어 부치고 선행, 구제, 봉사에 나서라는 것이 아니다. 믿는 바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 행함을 보면 어떻게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힘든 일을 해결하려 절실하게 기도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신자의 힘든 일을 도와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신앙을 전부 그런 일에만 쏟아 붓고 있다면 신앙 생활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는 반증이다. 반면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책임져 줄 테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록 내일 일이 불명하여 염려가 되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에 따른 바른 행함이다.

신자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과 의와  생명이 세상의 형통과 쾌락과 출세보다 훨씬 소중한 것임을 믿기에 삶에서 행함도 당연히 그에 맞추어 따라 나와야 한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내가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들면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능력을 발휘 해 주는 분으로 믿고 그 믿은 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신자가 기대하는 대로 발휘해 주시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당신의 뜻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고 흠 없이 보존되어 주님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믿음과 하나님의 행함에 충돌이 생긴 셈이다. 하나님이 힘을 발휘해 주지 않으시니까 신자의 신앙 생활에 힘이 없고 메마르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하나님은 대신에 그런 신자들을 징계하신다. 꼭 나쁜 죄악을 범했고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빠졌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징벌의 성격으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2:10에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신자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잘못을 벌하기 보다는 신자가 방향을 잃고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더욱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삶을 통해 천국을 실현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딴 짓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덧입히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신자의 삶에 분명한 한 가지 목적을 세우게 해서 그 믿은 바대로 행하게 하는 일에만 당신의 능력으로 도와 주신다.  

신자는 당연히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 우월성의 증명이나 종교적 의무 준수로 그쳐선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선만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온갖 악한 방법으로 세상에서 승리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그들 앞에 하나님의 선을 증명하는 일을 하는 자다. 그들의 악한 방법과 수단은 전혀 거들떠 보지도 영향 받지도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승리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진흙탕 싸움이 재미 있어 구경 하려고 곁에만 가도 진흙은 튀어 오게 마련이다. 신자가 신앙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목적만으로 살겠다는 한 가지 방향을 분명히 세워 따르는 길 외에는 절대 없다. 신자가 이 원리를 모르고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바보요 세상에서는 제대로 형통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도 믿음의 승리가 없는 어정쩡한 얼치기 신자로 평생을 보낼 뿐이다.

김순희

2010.08.22 12:16:04
*.161.88.93

신자가 생각하는 선과 악,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
이 부분을 더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해야겠습니다.
어차피 진흙밭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진흙이 묻을 수 밖엔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닦아주셔야 깨끗해짐을 알고 닦아주세요하며 그 앞에 무릎꿇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닦아주심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임을 절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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