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 (5)

조회 수 7246 추천 수 271 2008.11.24 23:31:26
4.2. 신약성경의 정경화


로마의 핍박과 성경


로마제국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황제를 숭배하고 국가종교를 존중하는 이상 제국내의 모든 종교를 다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유일신 야훼를 믿는 유대교가 로마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황제 숭배의 시초가 된 아우그스투스는 각 지역의 전통성과 제국의 통일성을 함께 고려해 융통성 있게 운용하였다. 유대교에 대해선 단지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도록 요구했기에 열심당 같은 극우파를 제외하고는 별달리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따라서 유대교의 한 부류로 취급되었던 기독교 발생 초기에는 본격적인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유대인들이 로마 점령군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다 지방 총독이었던 플로루스가 66년에 성전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한 사건으로 로마와의 전쟁이 촉발되었고 초기에는 유대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네로 황제가 임명한 베스파시안 장군이 그 아들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자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결국 70년에 티투스는 그 전 해에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간 아버지 대신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철저히 약탈했다. 7 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베스파시안 황제는 유대를 사마리아에서 분리시켜 직속 식민지로 만들었고 성전을 완전히 파괴했다. 자연히 제사장 제도는 사라지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회당이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 되었다.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이방인의 개종과 할례 문제를 예루살렘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했다. 성전 파괴 이전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적 기독교의 색채가 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기독교는 외부로 이동해야만 했고 또 황제 숭배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전쟁으로 유대 민족은 큰 불행을 겪었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도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할 무렵인 네로 황제 통치 하의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참혹한 환난으로 비쳐질지라도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풀어지는 법이다. 성전 파괴는 기독교가 자체적인 정체성을 갖고 유대교와 공식으로 결별하여 세계적 종교로 본격적 발돋움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고유의 경전이 공식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신약 정경화가 기독교를 창립해야 할 현실적이고도 인위적인 필요에 따라 새롭게 이뤄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베드로와 바울이 이미 순교했는데 그들이 기록한 성경만도 신약 27권 중에 15권이지 않는가? 바꿔 말해 기독교 태동 훨씬 전부터 그들의 서신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아 회람되고 가르쳐지고, 서신서 자체가 입증하듯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는 1세기 후반에 유대 회당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 곳곳에 이미 상당히 전파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파괴는 다만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독립된 종교라는 인식을 당시 사람들에게 확실히 심어주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간 유대교 우산 아래 있던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숭배에 대한 거부 입장을 당당히 밝힘에 따라 핍박도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이 순교를 감수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도 있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예배는 성전제사와 율법의 도덕체계 두개가 축을 이루는 유대교와는 달랐다. 무엇이 절대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진리를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말씀으로 가르쳤다. 그 진리는 물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였고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그분을 배우고 변화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와 그 경전은 서신서가 기록되자마자 이미 내용적으로는 확정되어가고 있었기에 정경으로 확정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역사적 정경화 과정

초대교회들이 사도들의 서신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실제 역사 기록이 보고하는 것은 110 년경에서야 처음 나타난다.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 지도자 이그나티우스가 쓴 서신에 마태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룩한 문서로 인용하고 있다. 또  사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13개 서신서와 사도행전이 교회에 이미 널리 회람되고 있었던 것은, 당시에 그 필사본들이 많이 증가했으므로,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 후 2세기 말쯤에 이레네우스는 왜 그리스도인에게 4 복음서가 필요한지 설명했다. “교회가 전 세계로 흩어질 때 교회의 기둥과 터는 복음이며 생명의 영이다. ... 교회가 모든 방면에 불멸의 숨결을 불어 줄 네 개의 기둥을 가져야 함이 적절하다. ...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던 주님께서 네 가지 모양으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말씀이 성령에 의해 함께 묶였다.” 주목할 표현은 “성령에 의해 함께 묶였다”는 것이다. 단순히 복음서의 정통성만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4 복음서를 즉, 다른 유사 내지 거짓 복음서들을 제외하고 성령이 확정시켰다는 뜻이지 않는가? 또 그렇게 당시 교회에서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현재의 27권으로 최종 확정시키는 데는 이단의 도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초의 이단자인 마르시온(Marcion)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하여 구약성경에 드러나는 무서운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44년 경에 로마에서 정경의 범위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예수와 연관되는 것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서신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최초의 성경비평학자가 되었고 이후의 초대교부들의 정경화 작업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다. 당연한 반발로 저스틴과 그 제자 타티안 같은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레네우스와 함께 4복음서를 옹호했다. 또 오리겐은 현재의 27권의 신약성경 모두를 정경으로 인용했다. 4세기 초에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계시록에 대한 비평을 하는 등 몇몇 책들이 여전히 논란 중에 있었지만 성문서를 확정짓는 일에 대한 필요성은 더 고취되었다.

또 정경화의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1740년 이탈리아 고고학자 무라토리가 2세기 말경의 로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정경 목록("무라토리 정경")을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에 지금 같은 확정된 정경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두와 현재 성경에는 없는 몇몇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현재의 27권대로 정경이 확정 된 것은, 367 년 아타나시우스 감독의 부활절 서신에 그대로 인정한 기록은 있지만, 397 년의 칼타고 종교회의에서였다. 그러나 일부 논란이 된 책들을 제외하고는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정경으로 확정짓는 일이 오늘날의 역사가나 신학자들이 짐작하는 것만큼 심각한 논쟁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정경으로 판별하는 아주 확실하고도 분명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보편성(catholicity)을 들 수 있는데 교회에서 실제로 널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아서 가르쳐지고 있는지 여부를 보았다. 또 다른 기준은 정통성(orthodoxy)으로 기록 내용이 사실에 바탕을 두었는지, 가르침과 계명에 윤리적 하자가 없는지를 보았다. 나아가 다른 신구약 정경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에 대한 신학적 진리와 상충이 없는지를 따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도 첫째가는 기준은 사도성(apostolicity)이었는데 예수님의 제자이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자가 저작했는지 여부를 말한다. 사실상 사도성이 확실하다면 당연히 윤리적 하자는 발생할 리 없고 성도들에게 영적인 감명을 끼치지 않을 리도 없었다. 사도성이 확보된 책이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시 논란이 된 몇몇 책들도 이 세 기준의 검증을 거쳐서, 특별히 사도성에 초점을 맞추어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예컨대 히브리서는 정통성과 보편성에 아무 하자가 없었고 저자만 불명이었는데 차츰 바울의 저작 내지 그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의 저작으로 인정되어 정경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자 초대 교회의 안정과 기독교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된 책들이 성령의 인도와 간섭으로 정경화되었고 또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읽혀지고 가르쳐졌기에 정말 권능이 넘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역사했던 것이다.  

누가 돌을 옮겼는가?

‘누가 돌을 옮겼는가?(Who moved the stone)’라고 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 유명한 책이 있다. 영국의 젊은 변호사였던 ‘프랭크 모리슨’이 죽은 자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해 세밀한 조사와 연구를 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정반대였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성경 기록 그대로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

아카데미상을 가장 많이 받은 ‘벤허’는 동명 소설을 1959년에 윌리엄 와일러가 영화화 한 것이다.  저자 루 윌리스는 인디애나 공화당 선거대회에 가는 길에 기차에서 무신론자인 잉거솔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와 신에 대한 지독하게 부정적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쓴 소설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의 회의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유사한 예는 얼마든지 많으며 지금도 주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무신론자나 회의론자가 정말로 예수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마음으로 성경을 정독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그분을 믿게 되는 일이 생긴다. 성경은 영원토록 살아 있는 말씀으로 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바꿔 말해 정경으로 확정될만한 책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었기에 정경은 스스로 정경임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은 책들은 정경으로 입증되지 못함도 너무나 당연했다. 정경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교인들에게 온전한 영적 감화를 불러일으켰지만 정경이 아닌 책들은 그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종교적 신학적 전문가들이 모여 컨테스트 하듯 정경을 선택 결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주전 2세기에서 주후 2세기 사이에 기록된 유대교 내지 기독교 문서들이 유무명의 저자들에 의해 많이 저작되었는데 위경과 외경 둘로 분류된다. 먼저 위경(僞經: Pseudepigrapha)은 구약정경과 외경에 포함되지 않은 구약 정경을 모방한 모든 문서를 총칭한다.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구약정경을 확정하면서부터 위경의 사용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졌다.

외경(外經: Apocrypha)에는 구약 외경과 신약 외경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구약 외경은 카토릭에선 정전으로 인정하지만 개신교에선 정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15권의 책이다. 헬라어 칠십인 역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서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말하자면 신구약 중간의 침묵시대에 주로 정통 유대교 외부에서 헬라어로, 제1 멕카비서 같이 히브리어 기록된 예외도 있지만, 저작되었다는 뜻이다. 개신교는 1618년 개혁파 중심의 도르트 회의와 1643년 장로파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구약 정경에 비해 보편성과 정통성에서 부족하고 기독교 진리와 상충되는 이단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정경에서 제외키로 했다.  

신약 외경(때로는 상기 15권만 외경이고 나머지 모두를 위경으로 분류하기도 함)으로는 최근 회자 되고 있는 도마 복음을 비롯한 복음서 40권, 사도행전 7권, 서신서 4권, 묵시록 10권, 시가서 2권 등이 있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혀지지 않았고 사실이 아닌 지어낸 내용과 윤리적 하자와 십자가 복음과 상충되는 내용들이 다분하며 무엇보다도 사도와 전혀 무관한 저작들이다. 기독교와 기록 당시의 유대 역사, 문화, 관습, 종교의 상관관계 등을 연구하는 참조자료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책들이다.

위경은 그 내용이 명백히 하나님의 문서로 삼을 만하지 않기에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간혹 신자들 가운데 외경은 미심쩍어하는 자도 있다. 종교개혁 때까지 외적으로는 유일한 기독교였든 카토릭이 계속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 최근 자유주의 개신교 쪽에서도 도마복음 같은 신약외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정경과 외경의 차이는 이렇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아주 소문난 원조 음식점이 있으면 그 주위에는 비슷한 맛을 내는 위장 원조 음식점들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위장원조 음식은 재료나 양념에서 80-90% 비슷해도 뭔가 깊은 맛이 빠졌다는 것을 처음부터 원조 음식점에 다녀본 손님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조에는 원조만의 비밀 조리법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1945,6년)에 애굽에서 발견된 도마 복음도 마찬가지다. 114편의 예수님 말씀이 포함되어 있고 개중에는 현재 복음서와 유사한 내용도 상당부분 있다. 또 신약성경 자체도 초대 교회 당시에 기록되지 아니 한 예수님의 말씀이 더 있다고 시사했기에, 정경의 4 복음서 외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도마 복음서의 신학적 핵심내용은 예수의 말씀을 묵상해서 지식(gnosis)을 얻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인간 이성에 의한 스스로의 깨우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적 색채가 주를 이룬다. 이 복음서에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하나도 없고 그분의 말씀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학자들은 더더욱 영지주의 이단 문서로 분류하고 있다. 아무리 그 안에 배울만한 가르침이 있고 사복음서와 동일한 부분이 나와도 그렇다.

진짜 원조 음식점은 오히려 간판이 붙어 있지 않다. 또 조리비법을 밝혀서 가짜들과 어느 것이 진짜인지 심사받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한 번 맛을 본 손님들은 누가 원조인지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원조 음식점의 좌석이 모자라는데다 가짜 음식점의 시설이 너무 좋아서 한 번 시험 삼아 가보기도 하지만 금방 가짜인줄 안다. 그래서 간판도 없고 낙후된 시설에다 주인 할머니에게 구박 받으며 줄서서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진짜에만 다닌다.

반면에 어느 집이 진짜 원조인지 모르고 그 먹자골목에 들어온 자는 시설 좋은 가짜 원조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또 그냥 그 맛에 익숙해져 오히려 진짜 원조가 가짜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모른다. 다른 모든 가짜 원조 음식점은 맛이 비슷하지만 진짜 음식점에는 진짜로 진하고 깊고 뒷맛마저 개운한 남이 전혀 흉내 내지 못하는 진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요컨대 가짜 원조는 누구라도 개업할 수 있지만 진짜 원조 음식점은 그 피를 나눈 자식들에게만 비법이 전수되어 아무도 그 맛을 흉내 낼 수 없다.

작금 기독교 신학도 연구했다는 한국의 유명한 도학자 한분이 요한복음을 그것도 영어로 강의하면서 심심찮게 도마복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가짜 원조 음식점의 맛에 길들여진 분이다. 정경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혀 맛보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원조 신자가 아니다.

대신에 정경과 외경과 위경 모두를 학술적으로 연구했을 뿐이다. 자신이 옹호하는 도마복음의 신학적 주제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그대로 사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 원조에 다닌 사람이 진짜 원조의 음식을 가짜를 기준으로 비평하는 것이 그분의 요한복음 강해일 뿐이다. 말하자면 성경의 정경화는 인간이 결정한 일이기에 지금도 얼마든지  인간이 정경을 분석 비판 반대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진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비밀스런 연결고리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성경의 정경화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거룩하게 통치한 기록이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4:34,35)

유대인들은 실제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은혜를 누렸다. 때로는 징계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긍휼에 바탕을 두었다고 이해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이후로 그분이 자기들 역사에 간섭하셨던 체험에 비추어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의 영원한 진리와 구원의 길을 성령의 영감에 따라 계시 받아 기록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어느 책이 정경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로 신약성경 유다서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11절) 이스라엘의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이 한 구절 안에 다 인용되어 있다. 말하자면 저자 유다는 당시 유대인들 모두가 가인(창3장), 발람(민22-24장), 고라(민16장)를, 나아가 소돔(유다서7절) 사건마저 익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기록한 것이다.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는 1세기다. 유대인들이 집집마다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보다 근 2천여 년 전의 사건들을 아무 설명 없이 인용하고 있다. 성전과 회당에서 읽혀지고 있는 구약정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모든 사실들을 집집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 은혜를 함께 체험했던 유대 공동체가 구약 정경을 얌니아 종교회의 훨씬 이전에 이미 확정해두었던 것이다. 또 외경은 아무리 해도 정경이 될 수 없다고 그들 스스로 인정했던 것이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여 담대해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하만국에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그 전해진 복음에 역사하여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공동체들이 곳곳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구약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어느 민족도 보지 못한 큰일을 행하셨듯이, 신약의 새 이스라엘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여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이루어내셨다.

사도들로선 자기들 스승이자 구세주였던 예수님이 당부하신 대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가르쳐 알게 하고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했다.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지 않은 자들에게 글로써 전해야 했고 또 그 의미를 하나님께 계시 받아 가르쳐야 했다. 당연히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배운 자들도 사도들과 동일한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났으며 또 거듭난 자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공동체 내 예수님을 믿는 자들 사이에서 정경은 스스로 정경임을 마땅히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초부터 잇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요일1:1-3)

아무리 그래도 결국 구약은 유대교, 신약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인간이 기록하고 확정한 경전일 뿐이라고 끝까지 반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 즉 가짜 원조 음식점에만 다녔던 자가 원조 음식의 맛은 절대 모르는 것 같은 일이 있다. 아무리 구약은 이스라엘, 신약은 초대교회의 산물이긴 해도 하나님은 그 둘을 연결하는 고리를 비밀스레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마무리한 정경화 작업은 인간더러 그 비밀의 고리를 발견케 만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히브리 정경은 신약성경의 보충 없이 그 자체  만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 정경도 히브리 성경에 뿌리를 두고서야 완전한 영적 진리로서의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해 구약의 수많은 메시아 예언 없이는 예수는 자칫 위대한 인간 내지 마술사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구약 곳곳에 숨겨진(예컨대 시편 22, 이사야 53장) 구원의 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구약 정경화 작업은 반드시 현재 형태로 이뤄졌어야 했고 그 배경에는 성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간섭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도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39-43)

정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게 하나님이 숨겨둔 비밀의 고리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여부다. 예로 든 두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을 열고서 정말로 예수에 대해 알아보려고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본 자는 그분을 구세주로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비참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분의 독생자, 즉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 구세주 예수를 인격적 실제 체험으로 만날 수 있다.  

반면에 그러지 못하면, 즉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아무리 성경을 묵상해도 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는 발견해도 구세주는 만나지 못한다. 예의 도학자처럼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인간의 깨우침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경화 작업을 인간이 했을 뿐이지 성령의 존재는 인정하지 아니 아예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신자든 불신자든 성경의 정경화에 대해 가장 먼저 또 가장 진지하게 검토할 것은 그 역사적 과정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써 누구라도 그 앞에 겸허히 나오는 자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는지 여부다. 신구약성경 66권에 계시된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인데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리 학술적 논리적 역사적으로 정경화 과정을 따져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앞에 전부를 건 자만이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점차 거세질 기독교에 대한 비방에 당당히 맞설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얼마든 생명을 바쳐 순교할 수 있을 뿐이다.  

11/24/2008  

김순희

2010.12.22 13: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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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라 인정치 못하는 자들은 결국 성령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군요.
지식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찬 자들은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지식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는 일을 하니 얼마나 힘이 들런지...
말씀 앞에 겸허리 무릎을 꿇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오시어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고 그 만남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는 놀라운 체험이 되고 그 체험이 있는 자들은 당당하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수 있는, 아니 목숨조차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자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것이군요.

그 귀한 복음을 우리 모두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체험하길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2.09.05 00: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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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무시로 상고하고 꼼꼼하게 연구하여 지식을 쌓아간들, 그 안에서 얼마나 처절하리마치 추악한 우리, 이런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저 지식에 머물고 마는 일임을.

지식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오로지 이 비참한 죄인을 구원하시려 찿아오신 예수님앞에 겸허히 엎드리면 만나주시고, 죄 사해 주심의 은총아래 감격하며 송구스러워질 수 밖에 없는 그 말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맘 가운데 굽이쳐 들어오지만, 그럼에도 자주 죄앞에 스러질 때가 참 많은 죄인...

이런 연약함마저 다 아시는 주님께 다시 맘 조아리며 십자가 아래서 도우심을 구하니이다.

prisca kim

2019.05.06 15: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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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글 1번부터 찬찬이  읽으면서, 이 어려운 역사나 자료들을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겐 어려운 말들이 있지만...성경을 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더더욱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더욱 숙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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