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사도신경 유감

조회 수 1325 추천 수 53 2006.08.15 00:55:04
{이 글은 약 6-7년 전에 묵상했던 것입니다.
마침 이준 목사님께서 사도신경에 대한 이견을 말씀하셨는데, 저도 한번 생각해 봤던 것이라서 지금이라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견해는 이 목사님과는 정반대입니다. 직접 읽어보시고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사도신경을 반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에 대한 반론들 또한 많습니다만, 단행본으로서는 조영업 목사님의 '사도신경 변호'(큰샘출판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지만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사도신경 유감 Ⅰ

▣ 들어가기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종종 사도신경의 위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문구가 거짓이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 둘째는 “거짓이라 할 것까지는 없으나 굳이 공식 예배의 고백으로 사용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들 견해를 무심코 들으면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 성경의 증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준으로 삼아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위의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론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 ‘본디오 빌라도라는 표현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유일한 정확한 이해는 아닙니다.  

   ◉ 이 주장은 예수님을 고난에 넘겨준 장본인이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것을 그 근거로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맞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도 여러 서신서에서 예수님을 넘겨준 자들은 유대인이라고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이 잘못되었습니까?

   ◉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한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 A가 B의 손을 빌어 C를 살해한 사건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법의 판결은 세 사람의 행위를 정확히 구분할 것입니다. 즉, A는 교사자, B는 살인자, C는 피살자로 말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사실상의 원인제공자는 A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B는 단순히 A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서는 B를 방면하지 않으며 A보다 죄를 크게 봅니다. 그 이유는 비록 A의 사주에 의한 행동이라고는 하나 최종적인 행동의 결정권자는 B 자신이기 때문에 살인행위의 책임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 당시 예수님의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빌라도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그 권한(사형확정 판결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고 또 석방을 위해 노력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만이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이 부분은 결코 유대인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빌라도의 몫입니다.

   ◉ 따라서 사도신경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한 것은 매우 정확한 표현입니다. 가장 정확하고 사실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 공식 예배에서 고백드릴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 이어서 공식 예배에서 고백드릴 만한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우선 사도신경의 실질적 정의(定意)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신경이란 문자적으로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측면에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뜻)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라고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보고 경험하고 난 후, 최종적으로 내린 고백이 곧 사도신경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의해야 할 단어가 있는데, 바로 ‘반응’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격적 교제’에 있습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맹목적 또는 기계적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자발적 및 본질적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격적 반응의 형태는 찬양(찬송)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무수한 기도와 노래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하고 깨우친 인간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신앙고백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앙고백은 베드로와 도마의 고백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께서 주와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 전체의 주제와 두 사도의 신앙고백과 사도신경을 비교해 보십시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된 부분은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요약하고 있으며, 두 사도의 고백을 조금 더 확대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하자가 없으며 있다 해도 아주 사소할 뿐입니다.

   ◉ 사도신경이 성경에 비추어 내용상 하자가 없다면, 공적 예배에서 고백드릴 가치가 없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신앙적 위상이 비성경적이라면, 찬송가도 비성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찬송가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얻은 은혜를 음악으로 표현한 ‘인간의 반응’이 곧 찬송가임을 직시할 때, 두 번째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송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공식 예배에서 부를 수 없다고 한다면 이들은 과연 동의할 것인지요? 찬송가이든 사도신경이든,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반응’임을 깨우친다면, 신앙고백의 대표적 모형으로서 사도신경을 공식 예배에서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 사도신경은 한마디로, 우리의 훌륭한 신앙 선배들의 모범적인 신앙고백의 한가지임에 틀림이 없음을 인식하여, 그 가치를 폄하하는 일부 주장에 동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나가기

   ◉ 교리사를 살펴보면, 니케아 신조 및 칼케톤 신조를 비롯한 여러 신조들이 있습니다. 사도신경도 이러한 여러 신조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간결하게 요약된 신조인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포함한 모든 신조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 반응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내지 중세교회에서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던 여러 신조들의 내용은 별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사도신경은 다만 제자들이 깨우친 믿음을 인격적으로 고백한 것일 뿐입니다. 이 고백이 성경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찬송가와 마찬가지로, 공식 예배에서 고백 드려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제자들(우리들)의 반응입니다.

   ◉ 자칫 오해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로 인하여 우리의 정당한 신앙 행동이 제약받아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모쪼록 이 같은 부정확한 견해로 인해 의문을 가지는 일이 없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


*************************************************************

                           사도신경 유감Ⅱ

  ◉ 일전(日前) 사도신경에 대하여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간략히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부정하는 주된 논리는 사도신경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기록되지 않았다는 의미)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했어야 맞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식 예배에서 고백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①당시 빌라도는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한 자였기에 사도신경의 표현은 타당하다(교사자와 살인자의 비교)는 점과, ②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으로서 표현이나 내용상 다소의 하자가 있다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공 예배에서 찬송가로서 찬양 드리는 것과 같은 개념)는 점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 오늘은 다른 각도에서 몇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며 어쩌면 우리의 영이 이것을 동의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성숙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를 객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못 박은 자는 빌라도나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의미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성경을 읽을 때, 그 의미는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는 것은 바른 자세이며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 목적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 기록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감추어져 있는 영적 진리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책임전가주의’ 신앙에 발목 잡힐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논의를 한번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 당시에 생존하고 있었다면 나는 결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언뜻 대단한 믿음인 것 같으나 실은 너무 성급한 생각입니다. 이 점은 아주 미묘한 것으로서, 오늘날처럼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른 믿음을 유지하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지식밖에 없었던 당시에 확실한 믿음을 주장할 아무런 근거는 없습니다. 자신 있게 예수님 편에 섰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자만일 수 있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직접 목격하는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는지 모르겠으나, 기적 체험은 올바른 신앙의 절대적 요소는 아닙니다. 기적이 신앙의 절대요소라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와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다 구원받았어야 옳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오늘날 그렇게도 체험하기 바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들을 자신의 눈으로 무수히 보았지만, 우리 기대와는 달리 모두 구원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는 기적을 필요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을 필요로 하는 신앙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만 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 기록 내용 자체를 객관적으로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객관화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말씀을 주관화시켜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 백성의 목이 곧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내 목도 곧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나도 구약백성과 똑같다는 사실을, 말씀을 보고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부어집니다. 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합니까? 사도신경의 표현이 비록 ‘빌라도’로 되어있다 해도 그것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대의견을 지닌 분들 말처럼 ‘유대인’이라고 해도 역시 틀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정확한 표현은 ‘나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옳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전통으로 ‘빌라도’라고 고정되어 왔다면, 우리는 단지 그 단어의 의미를 ‘나에게’로 바꾸어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첩경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빌라도’이냐 ‘유대인’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엽적인 단어 하나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지엽적이라는 말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단지 사도신경이나 찬송가 등에만 적용해야 합니다).          
  
◉ 두 번째로, 사도신경이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하더라도 하나의 모델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좀더 완곡히 표현한다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뜻입니다. 사실 사도신경에 표현된 모든 내용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요한 교리를 간소화하여 필요할 때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한다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각자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고백이 있겠지만, 수세기 동안 신앙의 선진들이 인정해온 사도신경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이 옳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앞의 글에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런 논리라면 찬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가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미진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 예배에서 결코 찬송가로써 찬양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공 예배에서 드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너무 경직되거나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세 번째로, 우리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자존자요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을 알면 얼마를 알겠습니까? 기록된 말씀인 성경조차 다 알지 못하는데, 그분의 실존 자체야 오죽하겠습니까? 모든 경건 서적이 다소의 미비점을 포함하듯이 사도신경 또한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 서적의 가치가 부정되지 않는다면 사도신경의 가치 또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사도신경이라 해서 하나님의 전부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부분적인 미비점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찬송가나 경건 서적을 인정하듯 사도신경도 인정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이라 할 것입니다.
  
◉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작은 것이나마 은혜로 받으려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를 고려한다면 사도신경이 표현상 완전성에 다소의 미비점이 있다하더라도 문제될 정도는 아니며 따라서 공 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서 드려져도 무난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반복하는 기쁨 중의 하나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 진리들을 재확인할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다. ‘나는. . .믿사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확신과 헌신의 못들을 다시 망치질하여 박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로부터 우리의 신조들을 가려내게 된다”(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p.215)
  
  ◉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신경 쓰지 않아도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사도신경을 공동 신앙고백의 좋은 예로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더 깊은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

운영자

2006.08.15 05:22:02
*.104.226.66

"벤허"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 벤허의 어린 시절 로마인 친구가 예루살렘의 경비대장 천부장이 되어 부임하게되었습니다. 그 둘은 성인이 된 후에 처음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창 솜씨가 여전한가 내기를 하면서 천장에 달린 서까래를 향해 던졌고 둘 다 정확하게 명중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까래가 마침 짧은 십자가 모양이었습니다. 작가와 감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합작이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의도적으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당시에 유일하게 사형 선고 권한을 가졌던 빌라도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십자가 처형을 시킨 최종적이자 가장 중요한 책임을 모면할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로마인, 아니 전 세계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 매달은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운영자도 골고다 언덕에 있었던 자입니다. 다른 말로 제 이름 석자가 사도 신경에 예수님의 핍박자로 그대로 불리워진다고 해도 저는 아무런 불만이나 핑계를 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정순태 집사님!
항상 그러하듯이 꼭 함께 나누어야 할 귀한 묵상을 또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6.08.15 06:40:43
*.91.59.196

영원한진리 세가지
절대 피조물 절대죄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김유상

2006.08.15 19:26:07
*.170.40.27

명쾌한, 군더더기 없는, 그러면서도 부족함 없는, 형제님의 글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정순태 형제님을 저희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께 번번이 감사 드립니다.

이준

2006.08.17 00:24:43
*.107.126.36

목사님.
"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다" 라고 말하는 것과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라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 아닌가요 ?

"우리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 라는 말과 "우리를 때문에 예수님은 죽어 주셨다와 같은 말인가요 ?

운영자

2006.08.19 18:11:16
*.104.226.66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독단으로 전횡적으로 만사를 주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로봇이고 하나님은 독재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이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을 갖고 행하게 하되 그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경륜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시되 그 안에 인간의 선한 면이든 죄악된 면이든 다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제일 대표적인 예로 유다가 배반을 알고도 제자로 삼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잘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에게 회개의 기회도 주었지만 유다는 끝까지 배반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지만, 인간이 그를 죽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과 "예수님이 죽어 주셨다"는 것은 동일한 사건의 동일한 내용을 각기 인간적 측면과 하나님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라려면 두 가지 측면을 다 보아야 합니다. 샬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진짜 이유” 중국어번역본이 준비되었습니다. master 2023-09-20 534
공지 신입 회원 환영 인사 [1] master 2020-10-06 986
공지 (공지) 비영리법인을 설립했습니다. master 2020-05-15 2198
공지 E-book File 의 목록 [3] master 2019-08-23 1420
공지 크레딧카드로 정기소액후원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file master 2019-07-04 5459
공지 소액정기후원회원을 모집합니다. [18] master 2019-02-19 1491
공지 글을 올리려면 로그인 해주십시요/복사 전재하실 때의 원칙 [14] 운영자 2004-09-29 5511
335 [묵상나눔] 베뢰아 사람들의 영성 [4] 정순태 2006-09-03 1862
334 [바보같은 질문 #9] 전도할 때 상대방이 주님 영접 하심을 어떻게 확인하나요? [3] 김형주 2006-09-01 1468
333 중간보고 [2] 김문수 2006-08-31 1373
332 운영자님께 [4] 김유상 2006-08-31 1199
331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질문 [6] 최상남 2006-08-29 1363
330 하나님 저랑 장난 하시는 겁니까??? [10] archmi 2006-08-28 6166
329 공평하신 하나님 12부 [4] 김문수 2006-08-27 1421
328 질문 [2] 김인기 2006-08-21 1164
327 공평하신 하나님 11부 [5] 김문수 2006-08-19 1508
326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은 9복입니다. [1] 이준 2006-08-17 1525
» [묵상나눔] 사도신경 유감 [5] 정순태 2006-08-15 1325
324 본디오 빌라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한국의 사도신경 [6] 이준 2006-08-13 4829
323 공평하신 하나님 10부 [7] 김문수 2006-08-11 1225
322 모든 성경 책은 오류가 있습니다 [10] 이준 2006-08-08 2219
321 아주 훌륭한 "바보같은 질문"들 [2] 김유상 2006-08-07 1134
320 완악하고 교만한 것, 변케하여 줍소서[#1] [8] 김형주 2006-08-05 1137
319 [바보같은 질문 #8] 식사기도에 대한 질문입니다 김형주 2006-08-05 1065
318 [바보같은 질문 #7] 우상숭배에 대한 질문입니다 김형주 2006-08-05 823
317 목사님^^ secret [1] 박명한 2006-08-04 5
316 공평하신 하나님 9부 [4] 김문수 2006-08-03 911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