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김문수 형제님의 “공평하신 하나님”을 감동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저 또한 너무 심한 신앙시험을 거쳐서 그런지, ‘내노라’하는 유명 목사님들의 고담준론에는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릭 워렌 목사님이라든지, 뉴욕에서 집회를 인도한 소강석 목사님 같은 분들의 주장을 통해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아울러 당연하게도 80만 교회의 담임목사라든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교회의 당회장 목사 같은 분들의 설교를 통해서도 아무 감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문수 형제님의 글에서처럼, 낮은 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련된 간증에는 아무 반론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하여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떠나 버렸고 너무 왜곡된 신앙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은 현재의 주류를 이루는 교회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박신 목사님 같으신 분들이 겨우 이런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소수의 선구자들이시지요).



이러한 시각에서,
최근 현대 목사양성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방식은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면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미 목사 안수를 받은 자칭 교회지도자들께,
현 체제의 비성경성을 동의하는지와 만약 현 체제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동의한다면 이를 개혁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정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목사님들은 물론,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평신도 성도님들도 함께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견해는 첨부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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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육제도(목사양성방식) 개혁에 관한 제언(대하13:9)

▣ 들어가기

  ⊙ 성도들에게 ‘신앙 지도자란 누구를 말하는가?’라고 질문하면 거의 대부분 성도들은 가장 먼저 ‘목사’라 답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신학자’나 ‘선교사’ 등을 추가하여 말할 것입니다. 틀린 인식은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 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 물론 이외에도 장로나 안수집사 등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명백한 지도자급에 속합니다만, 이들은 천주교는 물론 기독교에서조차 엄청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저 이류 내지 보조적 직분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에 대한 문제점을 살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현대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성경적 교회지도자, 특히 목사에 관한 것입니다. 즉, 현대 교회는 목사를 ‘전문사역자’(full time ministry)라는 미명(아름다운 이름)으로 과대 포장함으로써 성경을 크게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즉, 목사를 성경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성직자’로 격상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 직분론은 ‘모든 성도의 성직’ 개념입니다. 모두가 전문사역자입니다. 다만 목사는 그 중에서 ‘가르치는 분야’를 담당하는 지체 중의 한 지체일 뿐입니다. 이 문제는 간략히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난해한 주제입니다. 따라서 일단 미뤄두기로 하겠습니다(이 주제에 관해서는 지금 긴 묵상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 아무튼 오늘은, 현대 성도들 누구나(전문사역자든 평신도든) 대표 지도자로 공인하는 ‘목사’를 중심으로, 목사양성방법인 신학교육체제의 성경적 타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현대의 목사 양성방식

  ⊙ 현대의 목사 양성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난받을 정도의 비공식적 방식이 이용되기도 합니다. 이단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부 군소종파/자유주의 계열의 무허가 신학교는 웃기지도 않는 형편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120여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교는 약 320여개로서 매년 약 7천여 명의 목사들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정확히 검증된 수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목사대량생산체계인 셈입니다(이는 함량미달 목사 배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현재 시무중인 목사의 수가 약 125,000여 명이라 하니, 신학교를 졸업해도 취직(목사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한국 신학교는 일종의 기업체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익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교의 교육 기간/기준/목표 등이 엉망진창으로서 자기들 멋대로 입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이런 과정을 이수한 이들일수록 ‘목사’ 직임을 무척 강조하여 평신도를 억압하는데 선수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편의주의적 방식이 허용되기도 합니다. 장로나 선교사 출신에게 과정의 일부를 생략해 주는 것 등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하겠습니다(각종 종교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하는 사학법 개정 문제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주 신중하게 재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기독교 신학교의 비리를 문제삼는 것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서글픈 자화상일지라도...).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을 해부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이러한 목사양성방법은 옳지 않다는 점만 지적하고, 오늘은 모든 요건을 구비한 공식적인 양성방식인 정규신학교육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오늘날의 정규 신학교육 방식의 개요입니다. 다 아시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요약만 하겠습니다.

    ○ 일반적으로 고교 졸업자(동등 이상의 학력자)로서 대학의 학부에 입학하여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도록 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좋으나 일반대학이라도 상관치 않습니다. 전공에 관계없이 학사 학위만 취득하면 기초자격이 구비된 것을 봅니다.

    ○ 학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2-3년 정도 공부합니다. 뜻에 따라 석사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더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신대원 과정을 이수하고 나면 목사고시 응시 자격이 부여됩니다.

    ○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에 합격만 하면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물론 교단에 따라, 목사안수 이전에, 약간의 수습과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전도사, 강도사 등이 그러한 수습과정의 직분입니다.

    ○ 학부나 대학원 과정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신학일반 및 전공분야인 것으로 보여집니다(저는 신학교에서 교육 받은 적이 없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만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교육방식이나 목표 등은 일반 세상학문 분야들과 완전 일치합니다. 시험과 실험과 실습과 리포트와 논문 등의 방법을 통하여, 목사로서의 ‘지적자격의 획득 여부 검증’이 목표가 되는 것이지요. 신학과 세상학문은 그 방법(지적 수준 검증 방법)과 목적(지적자격 획득)상 완전 동일합니다. 의사 양성과정(인턴/레지던트)이나 변호사 양성과정(law school) 등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아무튼, 신학교육도 세상교육처럼 ‘지적자격’을 목표로 한다는 점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점을 심각하게 짚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은 현재와 같은 ‘지적자격’만 보유한 지도자로써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세상이 요구하는 유형의 지도자가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경적 신앙지도자상의 확립과 양성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성쇠(盛衰)를 결정짓는 관건이 된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 그렇다면, 성경은 신앙지도자 양성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요? 율법조항처럼 아주 확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좋겠습니다만,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라 하시므로, 이번 주제도 이 방법을 택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성경여행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 성경에는 신학교의 근거가 기록되어 있다?  

  ⊙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들어 쓰실 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런 저런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성경적인 답변은 ‘변화된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사무엘과 다니엘과 마리아 등 모든 신앙위인들의 사례를 볼 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변화된 자’라는 인식이 현대 교회에 와서는 ‘준비된 자’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준비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도 공부하고 자격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런 자격을 획득한 목사야말로 교회의 가장 성경적인 지도자라고 지레 짐작해 버립니다. 그리곤 구체적 근거로서 아래와 같은 성경구절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 위의 ‘준비된 자’ 개념은 순수한 인간 측면에서의 이해입니다. 즉, 인간은 ‘준비=자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준비란 자아포기(다른 말로는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임마누엘) 즉, 변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아포기’는 인간의 결심이 요구되는 부분이고, ‘임마누엘과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생각에 따라 ‘자아포기(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변화’를 ‘자격’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현대기독교의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 열왕기하 2장을 근거로, 구약시대에부터 신학교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 여기를 보면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선지학교에 재학 중인 신학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당시 선지학교는 이곳에 나오는 벧엘과 여리고 등 2곳뿐일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길갈(왕하4:38), 에브라임 산지(왕하5:22) 등이 더 있습니다. 이외에도 지역별로 무수한 신학교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 또 7절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 50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선지학교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들은 여리고 선지학교 학생들인데 이들이 전체인지 일부인지는 알 수 없으나, 50명만 해도 적은 인원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구약에도 신학교가 나오니까 ‘아하, 오늘날 신학대학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커다란 오해입니다!

    ○ 지금 이 시기를 살펴보십시오. 엘리야의 뒤를 잇는 엘리사 시대의 개막기입니다만, 당시는 북왕국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아합 왕이 죽은 후 그 아들 여호람의 통치 기간입니다. 또한 이 일이 일어나는 장소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역입니다.

    ○ 북왕국 영역 내에서의 일이라면, 선지학교의 설립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지학교의 설립상황은 이렇습니다. 솔로몬의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르호보암의 실정으로 인하여, 나라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됩니다. 북왕국 초대 왕은 여로보암 입니다. 그가 비록 10지파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세우기는 했으나, 백성들의 민심(신앙심)이 남왕국으로 쏠릴까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 방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금송아지 2개를 제작하여 벧엘과 단에 두고 여기에 분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됩니다. 여로보암이 추가적으로 취한 대책이 바로 선지학교의 설립입니다. 레위인만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여로보암은 과감한 개혁(?)을 선언합니다. 그 핵심은 “자원하는 자는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게”(왕상12:31)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원하는 자’의 범위는 레위 지파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과, 소정의 수업료를 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대하13:9)을 보면 당시의 선지학교 수업료가 나와 있는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였습니다. 수업료만 내면 누구라도(지파에 관계없이)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개악)했던 것입니다.  

    ○ 지금 북왕국 영역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로보암이 세운 선지학교의 재학생들인 것입니다! 이런 신학생들은 북왕국 도처에 무수히 많았고, 그들은 자격 자체가 없는 부적격자들이었던 것입니다.  

    ○ 여하튼, 구약에서 현대 신학교의 전신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인가요? 살펴본 것처럼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셨으리라 기대합니다.

    ○ 일단 오늘 본문은 현대 목사양성제도의 비성경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성경구절이므로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목사은사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지 하나로(자의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또 목사안수 받은 것을 근거로, 목사직임을 수행하는 오늘날 목사양성체제가 철저히 비성경적임을 증거하는 근거 구절이 되기 때문입니다!

  ⊙ 신약에도 현대 신학교의 기원처럼 오해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는데, 오늘은 2곳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주님 당시 최고의 전문종교인 그룹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양성방법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명망있는 신학교 교장이 몇 명 있었는데, 성경에 기록된 사람은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입니다(행5:34)(전승에 의하면 당시 ‘힐렐’이라는 유명한 교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행22:3). 일단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려면, 문자해득 능력을 구비하고 유명한 교법사 문하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인정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 당시에도 인정받는 종교인이 되려면, ‘지식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지적 자격을 구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의 이러한 생각과 현실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될까요? 뒤에서 설명됩니다만, 저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입니다. 목사직임에 있어서 ‘지적 자격’은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신약 교회가 세워지고 난 이후, 성경에 기록된 가장 성경적인 신학교의 모델로 오해받기 쉬운 것은 아마도 “두란노 서원”일 것입니다(행19:9). 성경 기록상으로는 바울이 여기서 2-3년 간 신학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학교의 전신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란노 서원은 현대의 신학교의 전신이 아닙니다. 두란노 서원은, 에베소 지역의 철학 강연 장소로서,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복음을 깊이 있게 강론했던 일정기간의 계절학교 성격이었을 뿐입니다. 현대와 같은 신학자나 목사 양성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교육기관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지요. 단순한 교회 내 한시적인 신앙교육이었을 뿐입니다. 교육 대상이 목사지망생으로 제한되지 않았고 또 교육 이수자 전원이 목사로 안수 받지 않았다는 것쯤은 쉽게 추론됩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신약교회 태동 이후의 사례로 기대되었던 두란노 서원도 별다른 성과를 얻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 얼핏 생각했을 때, 구약과 신약에 현대 신학교의 근거가 될만한 구절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제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지도자 양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강권적 지명(혈통 또는 성령의 임재)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지도자들 중에서, 사도들(바울을 포함한 13사도)은 구약처럼 주님의 강권적 지명방식으로 세워졌으나, 그 이후의 감독/장로/집사들(오늘날의 목사)은 새로운 방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새로운 방법이란 성령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시고(은사 주실 자에게 은사 주시는 것도 주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성도들은 주어진 은사를 발견함으로써 각각의 직분(목사는 목사로, 장로는 장로로)을 감당케 한다는 것입니다. 예로서, 목사는 딤전3:2-7 및 딛1:7-9절에 명시된 19가지 감독의 자질들(은사들)이 확인된 자를 목사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는 오늘 묵상방향과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사도 이후의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근거하여 세워졌다는 점만 말씀드리고,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 성경은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 상당수를 사역자로 부르셨음을 증거 하신다!

  ⊙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같지요? 그런데 이게 성경적 사실인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신학대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목사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데,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들 중에는 우수한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비지식인들도 제법 있습니다.

  ⊙ 구약을 기록한 기자들이나 선지자들을 보면 조금 애매합니다. 구약 기자들은 그래도 신학교육이나 또는 정규교육을 받은 분들이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최신정규교육을 받았고 에스라가 제사장으로서 신학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또 다니엘이 바빌론의 고급교육을 받았고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받았습니다. 욥이나 아모스(목동 출신) 같은 분들은 교육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본다면 무교육자의 범주에 속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하겠습니다. 그래도 구약 기자들의 교육수준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조금 다릅니다. 반드시 구약 기자들만큼의 교육을 받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교육의 기회가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무튼 구약은 조금 애매합니다(구약은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이라는 특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이에 비해 신약은 구약보다 조금 분명합니다. 교육을 받지 않은 분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장 먼저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교육을 받으셨을까요? 하늘의 일을 다 아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볼 때, 분명 세상 학문에도 조예가 깊으실 것으로 기대될 것입니다. 특히 12세 때,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대화하시는 장면(눅2:49)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요7:15절은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글을 아느냐 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배우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직업이 목수인 사람들은 교육기회를 얻기가 쉬운 부류가 아닙니다. 주님도 못 배우신 분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설명을 주님의 무식을 폭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주님은 세상 지식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측면에서의 지식이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정규교육 이수 여부에 관계없이 문자 구사 능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요8:6).

    ○ 다음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입니다. 일단 바울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분입니다. 또 세리였던 마태도 상당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추측컨대 가룟 유다도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나머지 사도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베드로와 요한은 분명 ‘학문 없는 범인’이었습니다=행4:13). 특히 베드로는 스스로 글을 쓸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베드로서도 누군가 대필해 준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은 교육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 그리고 또, 신약성경에 기록된 나머지 분들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볼로 같은 분은 상당한 학식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루디아, 오네시모 같은 분들은 거의 확실하게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교육은 귀족들이나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무교육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입니다. 아무튼, 신약의 초대교회 당시만 보더라도, 교회 내에서 교육받은 이들의 비율은 높지 않았고(높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무식한 무교육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육받은 우수한 인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을 12 사도로 택하셨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 우글우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오늘날의 신학 석사 및 박사들)은 단 한명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후일 몇 명이 겨우 합류했지요). 이 사실은 우리 기독신앙에 있어서 엄청난 진리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 기독신앙은 세상종교와 달리, 학식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앙은 세상 지식과 학식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심히 놀라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지식과 학식으로는 하나님의 그림자도 상상해 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감화가 있을 때라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식과 학식은 기독신앙의 필수 요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지식은 2차적 종속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 오늘 다루지는 않았으나, 교리사를 살펴보면 현대 신학교의 연원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교는 세상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을 모방했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천주교의 기도원의 변형이라는 것의 거의 정설이다시피 합니다. 즉, 신학교는 성경에 근거한 제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루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므로 오늘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 나가기

  ⊙ 지금까지 구약과 신약을 통해 가장 중요한 신앙 지도자인 목사양성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신학을 공부하여 지적자격을 획득하고 고시에 합격하여 안수받기만 하면, 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는 현재의 제도는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 측면에서의 자격 구비만으로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가 전임사역자로 구비시키는 데에 필요충분조건으로 여기고 있는 신학대학원 교육(지적자격 구비)은 결코 우리 신앙을 바르게 이해한 것에서 기인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학교육은 기독신앙의 기본 또는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기껏해야 부수적 또는 종속적 요소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또 깊이 빠져 있었던 오류였기 때문에 해결책을 손쉽게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교육을 통한 목사양성방식이 너무 체질화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거의 손쓸 수 없을 정도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현시점에서 신학교 체제가 아닌 목사양성 대안은 구상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현대 목사양성방식이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식을 도출한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개혁할 수 있는 대안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의 방법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견을 말씀드린다면, 현재의 신학교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입학자격을 변경시키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각 개인의 의지(신학을 하겠다는 각오)만으로 입학이 허락되었는데, 앞으로는 개인의 의지에 앞서, 각 교회가 19가지 감독의 자질 소유 여부를 확인하여 검증된 자만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추천이 없으면 입학자체가 불가하도록 개선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교는 완전한 무상교육(당연히 숙식 제공 포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 우리는 오늘 평소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을, 그것도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봤습니다. 아프지만 수술해야 할 우리 신앙의 취약부분일 것입니다. 신앙 지도자임을 자임(自任)하고 계시는 목사/신학자들께서 앞장서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금이야말로 제2의 종교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현대 기독교의 회생의 길이 열려지리라 확신합니다! ♥




  * 보충해명 :

이 제언에 대해 이미 목사안수를 받은(얻은) 대다수의 목사들은 반대이론을 주장할 것입니다.
“아무나 목사 하느냐?”며, ‘목사로 부르심에 관한 내적 및 외적 소명’이라는 이론 같은 것을 내세울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적인 생각이라 오해되고 있는 이 신학이론에 대한 논쟁 또한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짧은 쟁론을 통해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주 함축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적 및 외적 소명론’의 오류는 특급종교그룹 양성개념이라는 점입니다.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럴 듯한 해석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이는 전부 헛된 이론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현상을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말합니다.
이미 획득한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이론은 곡학아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는 결단코 권리를 누리기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단 한마디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단코 유대교 랍비와 같은 지식집단을 양성하지 않으셨다!”는 성경의 증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거룩한(?) 교황단(敎皇團) 내지 개신교단과 같은 고위종교인 집단을 꿈꾸지 않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미 안수받은 목사님들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지도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는 성경의 증거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밝혀 주셨습니다.
“내 관심사는 예루살렘의 박학다식하며 유능하기까지 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다. 나는 다만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물 흘리는 자, 눌린 자들을 찾을 뿐이다!”
또한 그들을 찾으신 후 “나를 존경하고 나를 대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만 보듬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얻으신 별명이라야 고작 “창기와 세리 즉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신 스스로 권리 누릴 생각 일체 없으셨던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종교귀족층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라고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반대로, 이런 것 욕심내다 야단만 맞았을 뿐입니다.
성경은 권익이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권익 내지 권리를 완전하게 포기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다 많이 닮아야 할 자인 목사들은 어떠해야 할까요?
목사직분만큼은 이 성경의 원리를 더욱 철저히 적용해야만 합니다.
이미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 입에서 “내적 및 외적 소명”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물론 하나님을 등에 업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기득권이라는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는 성경을 이용하는 것(곡학아세)을 극명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목사직분에 대한 현재의 설명들을 모두 포기하고(현재의 신학적 이론은, 천주교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서, 철저하게 헛된 것입니다), 그냥 묵묵히 하나님과 성도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인식까지는 대부분 인정합니다. 이것까지 부인했다가는 금방 탄로 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도들(작은 자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어떻게 하든 거부하려 합니다.
목사된 맛과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설명하려면 끝이 없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뛰어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습니다.
천국도 같은 원리일까요? 잘난 목사가 대접받는 영역이라면 천국은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에, 목사는 대접받는 직위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원리(생각)를 반대로 적용하면 천국원리가 됩니다!
그 무슨 해명을 들이 대더라도, 목사가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적인 것입니다!
교황이나 대형교회 목사들을 향하는 존경이 성경적 존경이라고 착각하는 한, 어쩌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대접에 초연하여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오로지 좀 모자라는(목사에 비해 영성이 부족한) 성도들을 지극정성 섬기는 직분이 바로 목사인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한 자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 곧 “착하고 충성된 종”이며 이는 오직 주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깨닫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운영자

2006.07.17 20:14:25
*.105.216.200

집사님 아멘넷의 토론장에 한 주제로 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허락하신다면 아멘넷의 운영자에게 이 글을 이멜로 보내어 다 올리든지, 아니면 짧게 줄여서 발제만 하여 토론에 부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떨런지요? 샬롬!

정순태

2006.07.18 01:08:20
*.95.73.2

목사님, 아멘넷 토론장 발제문제는 흔쾌히 동의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성도님들께서도 안타깝게 여기시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 반응 또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토론을 통해 한번 더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생각하신다면, 목사님이나 아멘넷 운영자들께서 결정하십시오.
다만, 만약 토론에 부쳐진다면 저는 단지 한 사람의 토론자로만 참여하고 싶습니다. 실질적인 발제자를 익명으로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샬롬!

김문수

2006.07.18 05:22:00
*.75.59.85

정순태님 반갑습니다
이번에 쓰신글은 골리앗과 대적하고있는
어린 다윗의 담력과 쌍벽을 이룰만 한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순태님에게 내공을 계속부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허경조

2006.07.19 03:25:44
*.27.229.11

amen ,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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