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종교성의 허와 실

조회 수 1541 추천 수 75 2006.05.27 12:38:09
                                종교성의 허와 실(종교적 논쟁의 허구성) (행17:15-34)

▣ 들어가기

   ⊙ 저는 오랫동안 해군생활을 했습니다. 해군 함정에는 ‘사관실’이라는 구역이 있습니다. 이곳은 장교들만 출입 가능하고, 여기서 식사도 하고 회의도 하며 함정 지휘의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구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이곳에서 화제로 삼을 수 없는 삼대금기(三大禁忌) 사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와 여자와 종교 이야기입니다. 국가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 또 남자들만 생활할 뿐 아니라(이제는 여성들도 승조합니다)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이 요구되기 때문에, 쉽사리 결론 낼 수 없는 화제로 인한 의견 불일치를 방지하기 위하여 정해 놓은 합당한 규칙이라고 생각됩니다.
    
   ⊙ 또 교양인에게 장려되고 있는 예의 중의 하나는 종교적 주제로 논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종교에 관한 한,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확신과 양보할 수 없는 종교심이 상호 이해와 양보와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의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종교란 설득에 의해 상대방의 항복을 받아내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명령과 대립되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사도 바울도 이러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종교에 관심이 많은 헬라인들과 종교적 쟁론에 임했으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  합니다. 성경도 바울이 설득에 실패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겨우 몇 명 건졌을 뿐, 바울의 주특기인 교회개척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하늘의 일을 알고 있었던 바울마저 이렇다면 우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뒷맛이 개운치 않은 본문입니다.

   ⊙ 그렇다면 지상명령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멸망으로 빠져 가는 불신자와 다른 종교인들에게 전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입장에서야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고 상대방이 금방 알아듣고 회개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은데, 실제에 있어서 이는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함을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위험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더 그럴 듯합니다. 바울도 졌지 않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 따라서 오늘은 본문의 해석보다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하게 될 타종교인들과의 논쟁에서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종교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나름대로 신학과 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각 종교와 그 주장하는 바를 상세히 다루기는 적절치 않습니다. 언제가 기회가 오면 별도로 한번 다루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기독교와 세상종교는 다양한 방법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결코 타협될 수 없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 세상종교는 보통 구도종교(求道宗敎), 추구종교(推究宗敎) 또는 자력종교(自力宗敎)라고 합니다. 그 출발점이 인간입니다. 인간 삶의 현상연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아주 우수한 특정인의 이해(가르침)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결말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부처든 공자든 아니면 삼신할머니든 어떤 정점에 도달은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종교는 늘 다른 종교를 인정합니다. 어느 종교든 열심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효율성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고등종교를 믿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등산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혼합주의적 사상입니다.

      ○ 이에 비하여 기독교는 계시종교(啓示宗敎) 또는 타력종교(他力宗敎)라 합니다. 인간 연구로부터의 출발이 아니라 ‘하늘 사다리’(창28:12)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연구로서는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셔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하나님 종속 이론입니다. 인간들이 좋아할 수 없는 주장이지요(선악과의 의미입니다).

      ○ 출발점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세상종교는 근원적으로 결코 동화될 수 없습니다.      

   ⊙ 종합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지식한계 밖에 존재하시는 초월자(하나님)를 믿는 것이므로 오로지 계시가 필요할 뿐이고, 세상종교는 인간의 지식한계 내에 존재하는 선각자(인간)를 믿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득도가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위로부터의 출발’(하향성 즉 성육신의 원리)이고 세상종교는 ‘아래로부터의 출발’(상향성 즉 성불의 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둘의 합일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합일점은 고사하고, 교차점조차도 없습니다!

   ⊙ 소결론은 이것입니다. 즉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 인식 밖의 초월자가 대상이고, 세상종교는 인간 인식 내의 우수한 인간이 대상입니다. 인간의 지적능력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사후세계를 의탁할 대상으로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차원의 문제일 것입니다.    

▣ 종교 논쟁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와 세상종교는 그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상호 합치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인식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또 지상명령(마28:19-20)을 완수하기 위해 타종교인들과의 대화는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꼭 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수칙 하나가 있습니다.

     ○ 그것은 논리적인 설득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딤후3:16)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잘 받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해석할 때도 ‘하나님의 감동’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실상 성경을 해석할 때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해로울 수마저 있습니다(신학도 한계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성령님이 열어주시는 대로만 받아야 합니다.

     ○ 문제는 이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살후3:2)도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은 허락된 자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경말씀은 논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받을만한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간혹 자신의 돈독한 신앙심과 학문적 자신감을 과신한 나머지 성급하게 타종교인과 논리적인 논쟁에 임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경우 결과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가 이기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지식적·학문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우리보다 우수할 경우라면 우리는 형편없이 패배합니다. 동의되지 않는다면 별지의 역사적 사례를 참고하십시오. 참으로 대단한 믿음으로 논쟁에 임하였던 우리의 대표선수들이 무참히 패배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난 기독교의 위축으로 나타났었습니다.  

   ⊙ 안타깝지만 우리 대표선수들이 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 생각과는 달리(사55:8) 논리성에 있어서 별로 뛰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일은 현재 삼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상세한 이유나 설명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성의 부족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시기 때문에 논리성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물론 이것은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경우입니다. 일단 믿음이 전제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참다운 논리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렵습니다. 참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경을 가지고 논쟁하려면, 경우에 따라 믿음 차원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삼위일체라든지 또는 영원한 시간 등), 이런 부분에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익숙한 논리성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삼자가 들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장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주장이 더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다만 선포일 뿐이다.

   ⊙ 우리가 종교적 논쟁에 임한다는 것은 전도를 목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를 교회로 인도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대변해야 할 때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종교적 논쟁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의 경험만 보더라도, 지식적으로 특출하지 않은 할머니 같은 분들마저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분들의 생각이 워낙 완고하여 도통 틈이 없습니다. 아주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하물며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설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슨 말로도 설득이 안 됩니다.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으나, 전도에 있어서 설득은 포기해야 할 방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의 권하는 말’(고전2:4)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도 그리할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지상명령인 전도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너무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만 간단히 말씀드리고 넘어 가겠습니다. 실생활에서의 전도에 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유명한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님처럼 전도의 은사가 특출하신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전도는 먼저 성령님이 앞서 행하시며 상대방을 설득시켜 놓지 않으시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신비한 일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방법과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전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선행되지 않은 전도는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성령님의 간섭하심을 인정해야만 합니다(우리는 결과를 모르므로 미련하지만 그냥 전도할 뿐입니다).

      ○ 전도는 또한 일회적으로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기동 집사님의 권고는 들어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도대상자를 고구마로 생각하고 익을 때까지 한번, 두 번, 세 번, 끊임없이 찔러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전도란 실상 말씀이 앞서지만 이는 선언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적 전도는 ‘삶’이 병행될 때 진정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마5:16)만 하는 것입니다(특히 가족전도). 전도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 이제 전도나 종교적 논쟁에 임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핵심은 여호수아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예수님을 소개하고 나서 설득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더 이상 애쓸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말씀을 선포만 하고 끝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누가 뭐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간섭하시도록 양보해 드리고, 김기동 집사님 말대로 ‘익을 때까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논쟁에 이기기도 힘들겠지만, 행여 이겼다 해도 정말 이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경) 지식으로 쉽게 설득될 수 있다면, 전도는 결코 ‘미련한 것’(고전1:21)이 아닐 것입니다. 전도는 정말 미련한 것이고 논쟁 또한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한 것은 미련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끝장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설득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선포만 하는 것입니다!

▣ 나가기

   ⊙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1-2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신학적/과학적/논리적으로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자들께서 노력하십니다. 그리고 그 설명이 부분적으로 옳은 점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성도들이 볼 때에만 그렇습니다. 불신자들이 볼 때는 결코 동의되지 않는 이야기들일 뿐입니다. 논리성이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제삼자가 판단한다면 우리가 판정패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입니다.

   ⊙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더라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목이 곧기 때문입니다. 논쟁으로는 단 한 명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논쟁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논쟁은 사람의 힘으로 하려는 것이고 전도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지하는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따라서 우리는 논쟁에 임할 것이 아니라 단지 선포로써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선포만 할 때, 성령님께서 오묘하게 역사 하시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옴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신비 체험을 많이 하시는 믿음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별지.             기독교인과 세상 지식인과의 대표적 논쟁

♣ 사례 1 :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대학논쟁이라고 함).

   1859년 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은 엄청난 충격과 논란을 불러 왔음. 이듬해인 1860년 7월 영국 옥스퍼드의 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찬반 논쟁이 발생하였음. 반다윈파인 새무얼 윌버포스 주교(Bishop Samuel Wilberforce)와 친다윈파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약 1천 여 명의 청중 앞에서 격돌하였음. 논쟁이 진행되면서 윌버포스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드러난 반면, 헉슬리는 사전 준비를 충분히 하고 논쟁에 임했음. 헉슬리는 윌버포스를 능가했고 이로 인해 진화론이 처음으로 학계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음. 이 논쟁은 하나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음.
   ○ 윌버포스 : “당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느 쪽이 원숭이의 인척이신가요?”
   ○ 헉 슬 리 : “만약 누가 내게 ‘원숭이의 자손이 되겠는가 아니면 귀하와 같이 큰 능력과 높은 지위를 진리 탐구자의 명성을 말살시키는데 쓰는 사람의 자손이 되겠는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게 될 겁니다.”    


♣ 사례 2 : 교회 장로와 신문기자 간의 논쟁(원숭이 재판 또는 스코프스 재판)

   ○ 문제의 발단 : 20세기 초반(1920년대)의 미국 기독교계는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 자연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신앙논쟁이 뜨겁게 일고 있었음. 이즈음 테네시 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인 존 스코프스(John Scopes)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고발당함. 1925년 원숭이 재판(The Scopes monkey trial)이 열림.

   ○ 변론 대표 : 보수주의 측에서는 전 국방상이며 존경받는 장로인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an)을 선임했으며 그는 19세기 식 전통과 남부 농촌 출신의 신앙인이었음. 반면 자유주의 측에서는 변호사이며 신문기자인 클래런스 데로우(Clarence
Darrow)를 선임하였는데 그는 20세기 첨단 도시의 불신 지식인이었음.

   ○ 결과 : 보수주의 측의 참담한 패배
      브라이언은 연설의 대가이나 토론에는 재능이 없었음. 데로우는 기자와 변호사적 기질로서 집요하게 파고들어 브라이언의 현대 과학에 대한 무지와 교리적 약점을 폭로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둠. 데로우는 “어떻게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는가?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만났는가? 요나를 삼킨 고래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지구가 돌기를 중단하고 태양이 머물 수 있는가? 비교 종교학은 무엇인지 안는가? 고대 종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는가? 대홍수의 발생시기는 언제이며 과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가?” 등등의 질문으로 집중적인 공략을 펼침. 논리적 우위를 점한 데로우는 브라이언을 편협하고 고집 센 무식쟁이라고 공격하였고, 논리의 부족을 느낀 브라이언은 추가 변론을 포기하고 평결을 요구하였음. 배심원들은 보수주의 측의 손을 들어 주어, 스코프스에게 100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였음. 외형상 보수측의 승리였지만, 내용상으로는 자유주의 측의 일방적 승리였음. 이 논쟁으로 일반인의 기독교 신앙이탈 현상 및 근본주의자들의 사분오열이 초래되었음(브라이언은 논쟁 일주일 후 사망함).

♣ 최종 교훈 : 우리 대표선수들이 형편없이 패배함으로써 얼굴이 좀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패하신 것이 아닙니다. 최종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 보존되었듯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호하십니다. 최선을 다 해야 하겠으나, 안 되면 그 선에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성도의 비밀(배수진 믿음)이기도 합니다. ♥

김문수

2006.05.30 04:23:46
*.91.1.132

제가 올렸던댓글을 삭제한이유는 정순태님께서
혹시오해하실소지가 있을수있어서 지웠습니다.
오해하셨다면 면목없습니다. 샬롬

정순태

2006.05.30 12:42:11
*.152.78.29

김문수 형제님, 걱정하시 마십시오. 삭제된 글은 이미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참으로 훌륭하신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분들의 주장/이론/설교/신학 등에 대해 겁없이 의견을 개진하는데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은 인간(신학자/목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성경)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인들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제가
저의 깨우침 내지 이해의 수준이 유치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저는 결코 제가 이해한 말씀이 성경의 전부를 망라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저는 다른 묵상에서 "양파이론"(OT:Onion Theory)라고 명명했었습니다.
저의 이해는 성경의 뜻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지엽적인 깨우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위의 제 묵상도 많은 미비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묵상에 대한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적을 통해 제가 미쳐 보지(깨닫지) 못한 더 넓은 뜻을 알 수 있다면 이는 은혜일 것입니다.

지적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형제님, 아무 걱정 마시고
혹 다음에라도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언제라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지속적인 사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6.05.31 13:23:18
*.168.131.244

정순태님 부끄럽지만 솔직히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기억하실수도 있으실텐데. 어처구니없게들리실수도있겠지만,
저는 컴퓨터문화에 익숙하지않습니다. 그래서 자유계시판에올려야될글을
댓글에올린것같습니다. 정순태님묵상내용을 판단한글이아닙니다.
속된말로 낯팔림을 무릅쓰고 보고드립니다. 앞으로 정말조심하겠습니다.
우리그냥 한번크게웃지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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