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 지역교회에서 성도들의 신앙 증진을 위해 실시하는 행사 중에는 부흥회 또는 사경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부흥강사나 담임목사님이 잘 아는 훌륭한 분들을 모셔서 성경의 깊은 맛을 전해 주는 아주 좋은 행사입니다. 우리가 외식(外食)하는 것과 같은 원리에서, 가끔은 이런 행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 그런데, 부흥회나 사경회는 좋은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행사를 담임목사의 특정한 목적 달성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듯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초청받은 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담임목사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서 기인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 오늘은 그 중에서, 부흥회나 사경회를 통해 예배당 건축의 당위성을 보증 받으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당 건축을 시도할 때 맨 처음 하는 행사가 곧 부흥회입니다. 부흥회를 통해 예배당 건축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드디어는 건축헌금 작정에 이르는 것이 현실교회의 보편적 행태입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담임목사와 지역교회의 거룩한 의무인 것처럼 호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위한 예배당의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성전으로 왜곡시키고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그만큼 중요하거나 필수적인 핵심은 아닙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예배당 건축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좀더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성전과 예배당에 관한 개념 정립  

   ⊙ 요즘은 신앙교육이 잘 되어서, 보이지 않는 무형조직인 교회와 보이는 유형건물인 예배당의 차이는 대부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목회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상당수의 성도들 중에도 성전과 예배당의 구별조차 제대로 못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듯합니다. 즉, 예배당을 ‘성전’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예 예배당을 성전이라 한다거나,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한 현상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을 통해 명백히 보증 받을 수 있는 주제이기에 오늘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는 않고 함축적으로 요약만 하기로 하겠습니다(상세한 내용은, 성전과 예배당의 차이점에 대해 잘 정리해 놓은, 별지 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예배당의 모형은 당연히 구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등도 모두 예배당의 모형이 됩니다. 그러나 건물로서의 예배당의 모형은 성막과 성전이 가장 으뜸 된다 하겠습니다.  

     ○ 성막은 출애굽 이후의 광야교회로부터 솔로몬 성전 건축 이전까지의 건축물로서 이동식입니다. 특수한 대형 텐트의 형태입니다. 숫자는 1개입니다.

     ○ 성전은 고정 건물로서 역사적으로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등 3개의 성전이 존재했지만 언제나 예루살렘 한 곳에 있었고 숫자는 역시 1개입니다.  

     ○ 성막과 성전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과 교회의 교제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오직 한 개씩만 존재했습니다.  

   ⊙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이것은 AD 70년에 파괴된 이후 지금까지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성전재건을 희망하고 있으나 영적으로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은 건축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성전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이를 성전으로 확정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하여, ‘성도들 개개인이 곧 성전’임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는 기본적인 내용들입니다.  

   ⊙ 그렇다면 이쯤에서 구약의 모형(그림자)인 성막/성전과 신약의 실체인 교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예배당과 성전을 혼동하는 잘못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만 설명하겠습니다.

     ○ 먼저, 공통점입니다.

        - 앞서 말했듯이 성막/성전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 즉,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장소’였습니다. 이는 교회도 동일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며 또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즉, 교회도 성전과 동일한 기능을 지닙니다.

        - 성막/성전이 유일했던 것처럼, 교회도 유일합니다. 여러 곳에 다수의 성막/성전이 존재하지 않았듯이 교회도 1개여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이점에서 사도신경의 ‘공회’ (catholic church)는 올바른 표현입니다. 공회란 ‘우주적인, 보편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며, 다른 말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차이점입니다.

        - 성막/성전은 장소적이며 유형적인 개념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아무 곳에서나 드릴 수 없었습니다. 성막이 있는 곳, 성전이 있는 곳에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유형적인 성막/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 교회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 개념입니다. 즉, 무형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그 중의 한 가지 설명은 ‘무리’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유형적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무형조직을 의미합니다.  

     ○ 깊이 있게 살펴보려면 아직 멀었다 하겠으나, 오늘 묵상의 범위에 비추어 본다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예배당과 성전을 혼동하게 되는지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기로 하겠습니다.

        - 위에서 살펴본 공통점과 차이점의 혼동에서 기인되기 때문입니다.

        - 성막/성전과 교회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며 유일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점만을 부각하면 ‘예배당은 곧 성전’이라는 낮은 이해에 도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정말로 낮은 것입니다.

        - 왜냐하면 성막/성전이 유형적 의미를 지니는 것에 반하여 교회는 무형적 의미를 지님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무형조직입니다. 성도들이 알고 있는 각종 교파들은 사실 ‘성경적 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장로파만 교회일 수 없으며 오순절파만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파는 오직 인간 이해의 폭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교회는 교파를 포괄하며 초월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당연히 지역교회를 포괄하며 초월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장소인 예배당 자체가 교회를 대표하지는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배당은 단순한 건물일 뿐, 구약의 성막/성전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배당은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 드리면, 구약에서는 성막/성전이 아닌 곳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성도들은 예배당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진정과 신령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장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이 예배당은 성전이 될 수 없는 정확한 성경적 이유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 아직까지 성전과 예배당의 차이점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혼동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증거를 보며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약에서 예배당을 예표하는 정확한 사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당’ (synagogue)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매일 또는 매주 예루살렘까지 가서 제사를 드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겨우 1년에 한 차례(유월절) 성전에 가서 제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기간에는 회당이라는 건물에서 교육과 교제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 이러한 ‘지리적 제한’과 ‘현실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회당은 가장 합당한 대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거의 필수적인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회당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회당을 성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을 성전으로 생각했고 회당은 어디까지나 회당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 그런데, 신약 성도들(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성도들)은 예배당이 곧 성전인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유대인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식보다도 훨씬 못한(잘못된) 인식입니다. 성경에서 확인되는 예배당의 근거는 오직 회당일 뿐입니다. 회당은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이 건축하신 성전은 ‘믿는 자들의 영혼’입니다!!! 예배당이 성전 될 수 없는 극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 아무튼,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며 결코 성전이 되어서도 아니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 예배당 건축의 방법

   ⊙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라는 증거는, 성경은 물론이려니와 인터넷을 통해서도 많은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대강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 그러면 이제 예배당 건축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성도들이 고려해야 할 주의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주장대로, 무리해서라도 건축헌금을 작정해야만 할까요? 현실교회에서 무리한 건축헌금으로 인한 웃지 못할 비극적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당연히 잘못된 것이기도 하구요. 성경에는 예배당 건축을 진행할 때 우리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교훈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제 이 교훈들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예배당은 결코 성전이 아님을 기억하여, 무리하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것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 최초의 성막 건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출애굽기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광야생활 중이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성막건축을 위해 충분할 정도의 재물을 자원하여 헌납했습니다. 너무 많이 헌납하여 책임자들이 모세에게 너무 많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점만 생각하면 현대의 예배당 건축헌금 작정 문제도 매우 타당한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한 면만을 고려한 것입니다. 즉, ‘자원’이라는 측면이지요.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것’이므로 성경적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최초 성막건축 당시에 숨겨진 진리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려진 진리는 ‘있는 것의 한도 내에서 자원하여 헌납했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가지고 있지 않는 재물을 헌납하겠다고 작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있는 것의 한도 내에서 ‘자원’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예배당 건축헌금 작정처럼 앞으로의 수입을 예상하여 무리하게(때로는 영적으로 눌려, 또 때로는 체면 때문에 억지로) 서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성도들을 다그쳐서 수억 원짜리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는 성경에서 결코 찾아지지 않는 궤변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당은 억지로 무리하게 건축해야 할 우리 신앙의 최고의 가치는 결코 아닙니다!!!  

   ⊙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 건축을 통해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성전은 미리 준비하여 건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셔서 그 소망을 아들 솔로몬에게 위임시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수많은 재물을 미리 준비하여 아들에게 인계해 줍니다. 대상29장에 보면 다윗의 아름다운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백성들이 ‘즐거이 드린’ 재물이 많음을 감사하면서, 이 많은 재물들은 모두가 미리 예비한 것들임을 밝힙니다. 16절에는 “미리 저축한” 것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아들 솔로몬도 아버지가 준비해 준 재물만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또 많은 재물을 준비합니다. 여하튼 수많은 재물을 준비한 다음에, 7년에 걸쳐 최초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재미있는 것은 지혜롭고 영적인 솔로몬도 성전보다 자기 궁전을 더 크게 짓습니다. 인간의 한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한 후에 착공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어느 목사처럼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예배당 짓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예배당 건축을 위한 준비금 한 푼 없이 은행 빚 내어 건축을 시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 구약의 증거만으로 보면, 성전은 온 무리가 합심하고 자원하여 미리 준비한 재물을 가지고 건축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조금 다른 경우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 칭찬받은 백부장의 경우입니다(눅7:5). 성전이 아니라 비록 회당에 지나지 않으나, 로마 백부장은 개인의 재물로 회당을 건축하여 유대인들에게 헌납합니다. 그만한 재력을 지닌 자가 옳은 일을 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수백억 또는 수천억의 재산을 지닌 재력가가 큰 예배당을 지어 헌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재정능력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빚을 내어 작정 헌금하는 것까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하셨을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있는 성전마저 허물어진다고 하셨으니 성전건축을 목적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목표하신 것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 성전 - 즉 교회, 즉 성도들의 모임을 원하셨기에,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회당이나 예배당은 관심 밖의 문제였지요. 주님은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 두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예배당 건축에 관한 교훈을 도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른 말씀을 통해 간접적인 교훈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눅14:28-30절이 그곳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지혜로운 자의 비유로서, 망대를 건축할 때의 자세를 말씀해 주십니다. 즉, 미리 준비하고 또 사전에 예산해 본 다음에 망대 건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눅14:25-35절 말씀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물은 물론 생명까지 버리고 전인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만, 예배당 건축에 빗대어 지엽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현대의 어느 교회든 예배당을 건축하려면, 수년 동안 충분한 예산을 미리 준비하여 건축을 시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은행 빚에 기대거나 성도들의 능력을 초과하여 막무가내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나가기

   ⊙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의 예배당은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습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예배당은 성막/성전의 개념보다 하위의 개념입니다. 단순한 모임장소의 의미 외에는 특별한 가치가 없는 것이 예배당의 위상입니다.

   ⊙ 따라서, 우리 신앙에 있어서 예배당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임이 불가능하지만 않다면, 오두막이든 천막이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이러한 점을 제대로 깨우치시고 학교 강당을 빌어 예배당으로 활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 그러나 아쉽게도 목회자들 중에는 예배당과 성전의 차이를 모를 뿐 아니라, 예배당 건축이 자신의 목회적 성과인양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몇 개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받쳤다고 자랑하는 이들마저 있기까지 합니다. 한심한 분들이지요. 이런 분들에게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시를 들려드리고 싶어집니다.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 촉루락시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洛時民淚洛 歌聲高處怨聲高』 목회자분들이 강행하는 예배당 건축헌금에는 가난한 성도들의 피와 고름과 눈물과 원성도 포함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성전으로 왜곡시켜, 예배당 건축의 당위성을 주장할 때, 평신도들은 그들의 이론에 구애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영적인 위압감에 눌려 빚까지 내어가며 건축헌금을 작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건축헌금을 무리하게 내는 것이 우리 신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꼭 필요하여 예배당을 건축해야 한다면(정말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입니다), 자기의 능력 안에서 양심이 허락하는 정도의 헌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우리의 신앙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를 잘 인도한다면 순종하여 따라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잘 모르고 잘못 인도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슬기로써 잘 살펴서 옳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배당은 우리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아주 지엽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배당 건축에 기여했다 해서 이것이 신앙의 신실성을 가늠하는 유일한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제능력 범위 내에서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을 정도의 헌금이면 충분합니다. 만약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하려 한다면, 오늘 이 묵상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잘못된 가르침에 유혹되어 시험들지 마시고 슬기롭게 잘 처리하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샬롬. ♥




※ 보충묵상         왜 목회자들은 예배당 건축을 중요시하는가?

⊙ 앞에서 예배당의 위상을 대충 살펴보았습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예배당 건축을 목적으로 할 때, 언제나 ‘거룩한 믿음’을 빙자하며 성도들을 압박하는 현실에 있다 하겠습니다. 왜 목회자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요? 답은 오직 하나 - 욕심 때문입니다! 큰 예배당을 짓고 많은 사람 불러 모아 능력있는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나아가 대접까지 받아 보겠다는 옹졸한 자기중심적 욕망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는 목회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인용하며 젊잖게 설명(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속임수입니다.

⊙ 성경 계시가 점진적이듯이 성경 이해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셔서 한 순간에 깨우칠 수는 있습니다. 마치 불교의 돈오돈수 돈오점수(頓悟頓修 頓悟漸修 : 깨우침과 수양의 선후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써 순식간에 이룰 수도 있고 깨우침 후에 점진적인 수양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론)와 흡사하여 찜찜한 면은 있습니다만, 성경 이해의 점진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겠습니다. 동일한 본문이라도 묵상할 때마다 깨우치는 은혜가 다른 것이 바로 그 증거이며 이는 믿음의 성숙 또는 영성의 진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부인할 방법이 없는 진실이지요.

⊙ 예배당의 위상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으로 바로 잡혀져 왔다면, 이제는 옛날처럼 예배당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옛날에도 깨어있는 성도는 예배당 자체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일부 성도들(특히 목회자들)의 이해 부족으로 크게 왜곡된 면은 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지금까지는 예배당을 짓고 성도를 모으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대형화이며 그에 따른 무수한 문제점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대형교회를 꿈꾸지 않는 개척교회는 없습니다!).

⊙ 어느 지역을 살펴보든, 성도수에 비해 지나치게 큰 예배당을 한두 개쯤은 발견할 수 있고, 또 크든 작든 간에 성도가 꽉꽉 차는 예배당은 소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텅 빈 예배당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가뜩이나 비효율적인 운용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지탄을 받으면서 이용 숫자마저 얼마 안 된다면, 무슨 이유로든 예배당을 더 짓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예배당을 무수히 지으려는 생각에는, 목회자들의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목사는 그 누구든 결코 협력적 지위(부목사 등)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담임목사를 하려고 합니다. 아시겠지요? 우리나라 예배당 수자가 목사안수를 받은 목회자 수와 같아져야만 비로소 예배당 콤프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예배당과 출석 교인수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나아가 교단/교파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해야만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따라서 교파간의 연합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지역별 예배당 추가확보(신축) 문제를 지혜롭게 연결시키기만 한다면, 획기적이고 새로운 대안(기독교의 활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꿈도 꾸지 않겠지만, 교회(기독교)가 살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 우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합니다. 사실 교파는 전혀 불필요한 것입니다. 교파의 난립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 수준의 한계를 나타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어느 교파든 온전성을 주장할 수 없고 미비점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평신도에게 있어서 교단과 교파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해로운 분파일 뿐입니다.  

   ○ 지역을 기준으로 그 지역에 있는 예배당으로써 그 지역 성도들을 수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합니다. 만약 지역에 위치한 예배당 수용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된다면 다음과 같이 조치합니다.

   ○ A교회의 공간이 협소합니다. 처음에는 2부 내지 3부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 한계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면 담임목사는 주변의 교회 중 예배당 공간상 여유가 있는 곳을 물색합니다(물론 교파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서 장로와 안수집사와 권사 등 지도자들을 포함한 성도 일부를 이웃교회로 파송합니다. 때로는 담임목사가 성도들과 함께 이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왜 이렇게 합니까? 주위에는 연약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예배당만 작은 것이 아니라 돈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 빈익빈 부익부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는 재정과 사람과 명예 등이 넘쳐나지만 작은 교회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다른 교회야 죽든 말든 내 교회만 커지면 된다는 추한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 주위의 다른 교회는 무시하고 다시 더 큰 교회를 짓겠다는 것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허영심이 공명하여 나타나는 타락의 현상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 현재의 예배당이 좁아 더 큰 예배당을 신축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넓은 땅을 구입하여 웅장한 예배당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까지 들으셨습니까? 꿈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영광 한번 받아보겠다는 목회자들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 현재의 예배당이 좁다면, 성도들을 설득하여 이웃교회로 보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배당이 좁아 새로 건축해야 할 형편인데, 적어도 수백 억원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써야할 귀중한 헌금을 건물에 투자하는 것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공간 여유가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여기서 예배드리나 거기서 예배드리나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00교회로 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 만약 일정 지역(예를 들면 창원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렇게만 한다면, 상당기간 그 지역에서 예배당을 신축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 이렇게 한다면 분명 그 지역에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전도 폭발이 일어나 성도수가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예배당의 부족현상이 초래될 것입니다.

   ○ 이때 비로소 새로운 예배당 신축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지역의 모든 교회 예배당만으로는 도저히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 없다면, 새로 신축해야 합니다. 물론 이때라 하더라도 대형 호화판 건물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검소하고 편리한 건물이면 족합니다. 이것이 예배당 신축에 관한 올바른 인식이며 아마도 성경의 지지를 받은 바른 자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이러한 방법을 꿈에서나마 생각이라도 해 본 목회자분이 계실까요? 기대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우리나라 목회자의 수준으로는 망상이라는 평가밖에 받지 못하겠지요?    

⊙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목회자들은 예배당 건축을 중요시합니까? 그분들이 주장하는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다 핑계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얻는 것이 많아서’입니다! 큰 예배당 짓고 성도수가 많아지면 목회자가 얻는 이익이 엄청납니다. 경제적 궁핍 걱정 없어집니다. 잔치집 상석도 맡아놓게 됩니다. 랍비라는 호칭도 당연지사가 됩니다.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행세’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재미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세상 칭찬에 얼이 빠진 일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칭찬까지도 욕심을 냅니다. 예배당 몇 개 짓고 성도수가 수천 명 내지 수만 명에 이르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따 놓은 당상이라 여겨버립니다. 그러니 알토란같은 성도 한 사람인들 양보하겠습니까? 교회 한번 옮겨 보십시오. 담임목사의 눈총이 따갑습니다. 온갖 언어를 총동원하여 교회 옮기는 성도를 성토합니다. 왜요? 손해가 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며 슬픈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안정된 교회를 떠나 도움이 필요한 교회로 옮기는 것이 바른 신앙임을 증거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령님께서 안정된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 것이나 애써 세운 교회를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새로운 교회 개척에 나섰던 바울 사도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 대형교회의 모습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총결론입니다), 목회자가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려 할 때, 평신도는 크게 부담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협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경우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상황일 때로 한정됩니다. 슬기롭게 판단하여 참다운 믿음생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적 경구 : 천국에는 종교사업가를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샬롬. ♥

김형주

2006.06.10 08:13:54
*.173.42.18

정순태님,,,

교회 주변에서 '예수님께서 진짜로 이렇게 바라실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정순태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제가 생각했던 상식이 바로 이런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제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정순태님의 글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런 의식을 가진 분들을 주위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의견을 이야기하면 즉시 분란을 초래하는 자로 낙인찍히게 되는것이 현실인지라 혼자만 고민하고 있는것이 실상입니다. 성경말씀에는 '지혜롭게'란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그 지혜롭게라는 말씀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분란 일으키지 말고 잠자코' 라는 뜻으로 통하는 듯 합니다.

믿음에 열심을 낸지 얼마 안되는지라,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회와 목사님들의 병폐를 보고 예수님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진짜 교회는 나가면 안될 곳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사이트를 접하게 됬고 [성경문답] 코너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또한 저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정순태님의 글도 저에게 올바른 믿음을 인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다른 회개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고 말씀과 기도와 행함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이런저런 교회의 문제점들이 먼저 눈에 보이고 그것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내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크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분명 잘못된 것을 그냥 따르자니 그것도 마음이 허락치를 않고 마음이 무척 복잡합니다. 밖에서 보던 교회와 안에서 겪는 교회가 너무 달라서 겪는 마음의 부담이 엄청 큽니다만,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지 누구도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지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순태

2006.06.10 14:14:31
*.152.78.29

김형주 형제님,
평신도들의 애환 중의 하나(비판이냐 비판금지냐)를 너무나 정확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대한 학문적 소양이 미흡하고 여건이 불비한 평신도들은 아무래도 말씀의 전문가인 목회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평신도들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목회자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그리고 깊이 연구하여 이를 평신도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성경을 그릇 해석할 때, 평신도들은 강력히 반발해야 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목회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말씀으로 위장할 때도 반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비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비판의 비 자도 입에 담지 말라.”는 식으로 설교하곤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엄격히 경계하십니다.
저 또한 이러한 가르침을 전적으로 동의하며 수용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공자도 “지극히 어리석은 자도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데는 밝다.”(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라며, 비판의 역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성경도, 세상 사람들도, 무분별한 비판을 엄격하게 경계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비판” 개념에는 상당한 오해가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비판금지는 아주 조심하며 받아야 할 개념일는지도 모릅니다.
목회자들께서 흔히 설교하시듯, 단편적이고 아전인수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무분별한 비판은 조심해야 하지만, 비판이 요구되는 시점에서의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 “비판”에 관한 묵상을 올려 드립니다.
충분한 내용은 못 되겠지만 “비판”에 대한 새로운 접근(해석)을 시도해 보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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