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 강해 (49)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4:25-5:5)

 

 

작심삼일의 성경통독

 

많은 신자들이 새해 초에 성경통독을 결심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의지력이 약해 작심삼일 한 탓만 아니다. 성경은 쉽게 읽어지는 책이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구약성경에 지파, 지명, 사람의 이름, 숫자 등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말하자면 성경통독에서 첫째로 마주치는 장애가 바로 창세기 5장이다. 초기 인간들이 번성하려면 지금보다 수명이 훨씬 길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오래 살았을까? 또 어떻게 각자의 수명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의아심을 떨칠 수 없다.

 

기독교 밖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천 년을 살 수 있느냐고 아예 부인한다. 아직 수학과 문자를 발명하기 전의 원시 인간들이 구체적으로 연대를 계산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후대인이 지어낸 전설에 불과하다고 비방한다. 전지전능하여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로선 어쩜 당연한 반발이다.

 

문제는 그런 비난에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고 심정적으로 동조까지 하는 일부 신자다. 성경은 비록 인간 저자가 기록했어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적었기에 하나님 그분의 기록이다. 하나님은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정확하고 완벽하다. 그분의 말씀인 성경 또한 그러하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를 비롯해 그 후의 인류가 번성하게 된 모든 과정을 육하원칙에 따라 과학논문처럼 정확히 전부 기록케 했다면 지구상의 모든 종이를 동원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 기록을 쌓아둘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이세돌 9단과 대국한 알파고 슈퍼컴퓨터 수천 대를 동원해도 해석조차 못할 것이다. 그 기록을 아무도 읽을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또 그런 정밀한 기록이 있었다면 역으로 인간이 고대에도 아주 똑똑했다고 자부할 것이며 하나님의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인간이 결코 행할 수 없으며 그 배후에 절대자의 권능이 있음을 합리적으로 분별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우연의 일치라고 우긴다. 하나님과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이 보면 즉사한다고 말한다. 악하고 추한 것과는 하나님은 절대 공존할 수 없기에 죄에 찌든 인간은 그 자리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일차적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계시(啓示)

 

그럼 하나님으로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이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이 당신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사항만 성경으로 기록케 했다. 그런 것을 두고 신학적 용어로 계시라고 한다.

 

두세 살짜리 아이는 아버지가 손바닥에 움켜쥐고 있으면 그 안에 구슬과 사탕 어떤 것이 있는지 힘이 약해 열어볼 재간이 없다. 아빠가 펴서 보여주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마저 갓난아기라면 보아도 뭔지 모른다.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은 그런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아예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나다.

 

그런 광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용어를 사용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끔 당신에 대해 펼쳐 보인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실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이고 절대적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창세기 5장이 비록 성경을 통독하는데 첫 번째 장애가 되어도 당연히 그런 은혜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집고 넘어갈 사항이 하나 있다.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만의 족보라고 제한시킬 이유나 근거는 없다. “아담 자손의 계보”(5:1)라고 명시했으므로 모든 인류를 망라한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그래서 특별히 믿음이 좋은 몇 명에 대해 따로 추가로 기록했을 뿐이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바로 올라갔다.(24절) 물질과 육신을 입은 채로 영계에 입성한 것이다.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신령한 육체로 재창조했다는 뜻이다. 그럼 장차 성령이 인간 여성의 태를 이용해 성육신하고 또 그 인자가 부활 승천하는 일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신기해하지 말라는 뜻이 암시된 것이다. 또 라멕은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하나님에게서 직간접으로 계시 받고 아들의 이름을 안위함이라는 뜻의 노아로 지었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책이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비난하든 하나님 그분은 전혀 문제 삼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은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책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선언한 것이다. 인간의 반응은 아예 무시하는 독불장군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을 믿으면 성경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주려는 사탕을 손바닥에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남의 집 아버지나 아들이 왜 그러느냐고 비난하지 못한다. 해서도 안 되고 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지금 창세기 5장에 대해 의심하는 일부 신자는 자기 아버지보다 남의 아버지 말에 더 신경 쓰는 꼴이다.

 

지구의 수명이 6천년?

 

창세기 5장을 이해함에 이와 정반대의 극단도 있다. 하나님 말씀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점에만 착안하여 족보의 나이를 단순히 합산하여 창조의 연대를 구하는 것이다. 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서로 겹쳐지므로 겨우 1,646년이다. 또 예수님까지 4004년이므로 지구의 나이가 겨우 6천년이 조금 지났다고 간주한다.

 

이 주장에 대한 지질학적 생물학적 증거는 사실상 아주 미흡하다. 초기 인간들이 아주 오래 살아서 번성할 수 있었지만 노아 홍수로 인간의 생존환경이 급격히 변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성경의 증언을 과학도 뒷받침 한다. 그러나 단순히 5장의 수명의 수치를 합산하여 지구연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해석학적으로 몇 가지 모순을 노정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때에”(4:26)가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가 아니다. 아담이 아벨 대신에 셋을 얻은 것이 130세였고, 셋이 에노스를 낳은 것이 105세다. 그럼 단순 수치를 합산하면 235년 동안에 아담과 셋과 에노스 세 사람뿐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어떻게 인간이 번성할 수 있었겠는가? 나머지 족보에서도 자식 이름으로 한 명씩밖에 기록하고 있지 않기에 이미 많은 생략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해야 타당하다.

 

거기다 사람들이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했다. 셋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제 삼의 사람들이다. 가인을 포함한 여러 후손들이 이미 번성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 때는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가 아니라 역으로 사람들이 번성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다. 에노스를 낳고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로 봐야 한다. 구약성경의 그 후의 기록들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했어도 사실은 몇 대에 걸친 조부와 손자를 뜻할 때도 종종 있다. 연대를 단순히 합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대신에 성경의 이름이나 숫자가 하나님의 뜻을 예표하고 상징함에 더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에녹의 수명이 하필 365년이다. 추측컨대 일 년 365일 중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잊거나 믿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상징할 것이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777년을 살았다. 완전한 숫자다. 하나님의 뜻에 맞춰 순전하게 충성하는 일생을 보냈고 또 그런 아버지라서 아들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양육할 수 있었다는 의미를 함축할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그들이 정확하게 그 년 수대로 살았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만약 그대로 살았다면 해석한 의미대로 계시한 것이 더더욱 확실해진다.

 

원시 기독교의 생성

 

정작 본문에서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꼭 계시하고픈 핵심 부분은 4:26이다. 그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여호와 신앙이 출발했다는 첫 기록이다. 원시 기독교가 생성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 신앙을 갖게 되었고 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 어렵게 유추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그 답은 5장 안에 있다.

 

그 지루한 족보(5장)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 순서도 오묘하고 정밀하다 못해 참으로 흥미롭다. 문명이 발달했다는 내용이 5장 앞에 기록되어 있다. 도성을 짓고 청동기문명이 발달했다. 자연을 정복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라멕의 처인 아다와 씰라의 이름의 의미가 여자들이 장신구를 사용하여 치장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삶이 윤택해져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번성하고 충만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낙관적 사고를 갖게 된다. 거기다 수명은 장구했으니 얼마나 신나고 즐겁게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겠는가? 인류 최초의 낙관주의가 융성했다. 그러나 성경은 즉, 하나님은 바로 이어서 엄숙히 선포한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죽음 앞에는 속수무책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서 남녀가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 복을 허락하셨다.(5:1) 그런데 2절 끝 부분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3절부터 32절까지 ‘죽었더라.’가 계속 반복된다. 하나님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즐겁게 살아도 죽음이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의 첫째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여호와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뜻이다. 그 신앙에는 사람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인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무지 비교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자존하여 영생하는 분이며 인간은 그분에게 생명력을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겸허하게 고백한 것이다.

 

신자들은 5장에 같은 말이 지루하게 반복되어 통독을 중단하지만 하나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이 그만큼 강조했다는 뜻이다. 히브리어에는 비교급 최상급 표현법이 없다. 두 번 반복하면 비교우위를,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을 뜻한다.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향해 네 생물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 찬양했다.(계4:8) 인간과 피조물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완전한 경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지금 5장은 죽었다는 말을 여덟 번이나 반복한다. 최상급의 세배 정도로 강조한 셈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좀 심한 잔소리 같기도 하다. 솔직히 괜히 두렵고 주눅이 들어서 성경을 계속 읽기 싫은 면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은 어쨌든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진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작 더 강조한 것은?

 

그런데 더 지겨운 반복이 있다. ‘낳았더라.’는 무려 20번이나 반복했다. 세 번의 최상급의 일곱 배다. 죽음을 강조한 것의 2.5배로 생명을 강조했다. 인간이 생명을 갖고 살아있다는 사실의 의미 은혜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알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출생과 사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20번이나 잔소리처럼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으셨다.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제발 내 품 안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하나님은 5장을 통해 통독에 불편을 느끼는 신자나, 도무지 황당해서 못 믿겠다는 불신자들에게 오히려 너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과연 어떤 힘과 근거로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너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제발 알아 달라고 구구절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죽고 또 죽는다는 말을 이어가다가 왜 불쑥 에녹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영생을 맛보았다고 선언하는가? 또 왜 하필이면 365년을 살았는가? 단 하루도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없었던 것 바로 그것이 영생이라는 뜻이다. 에녹이 스스로 훌륭해서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365일 단 하루도 놓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에 걸맞게 반응했던 것이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 길이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온전히 믿는 신자라면 에녹처럼 순종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원시 기독교 시절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까닭이 무엇인가? 내 출생과 죽음을 내가 통제, 계획, 예상, 꿈도 꾸지 못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주관함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 주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출생과 사망이 하나님에게 달렸다면 내 인생뿐 아니라 존재 전체도 하나님의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처음과 끝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중간도 전부 하나님의 것이다. 창세기5장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 즉 전 인류에게 20번이나 사랑의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세대를 떠난 적이 한 시도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신자는 당신만의 오묘하고 완벽한 사랑과 권능으로 붙들고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침 삼키는 순간마저 놓치지 않고 당신의 품에 품어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무리 자기 의지로 시행하더라도 삶의 어떤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마땅히 행할 바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정도로 그치지 말고 실제로 내 전부를 생명까지 포함해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손에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헌금수표를 쓸 때 손이 떨리는 까닭은?

 

과연 우리는 그러한가? 뭔가 좋은 일이 생겨야만, 그것도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대박이나 기적의 조짐이 보여야만 감사하지 않는가? 내 능력으로 도무지 불가능했던 일이라야 하나님이 해주신 것처럼 겨우 깨달을 정도다. 그러고도 막상 주일 아침에 감사헌금 수표를 쓰는 손길은 왜 떨리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지루해서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건성으로 읽고 치웠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저를 찾아와서 “박진호야 제발 나와 함께 하면 네 인생을 아름답고 풍성하고 의롭게 바꿔 줄께!”라고 20번이나 간청한다면 제가 노(no) 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솔직히 말해 저는 목사가 된 지금도 수시로 거절하다 못해 의심, 불만, 불평, 불신까지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과연 20번만 간청했겠는가? 수백만 번도 더 했다. 침 삼키는 순간도 지키시는데 그 시간을 일초로 잡으면 40년만 해도 12억6천만번이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시는 셈이다. 그것이 창세기 5장의 의미다. 인간이 창세기 5장의 겨우 20번 반복이 지루하다면 하나님 쪽에선 얼마나 더 지루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분은 전혀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지금 불신자보다 정작 주일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는 중에도 의심 불만을 떨치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을 애타게 찾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하시고서 인간에게 선악과 금령으로, 율법의 첫 계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일관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하나 있다. 철자 하나도 수정, 변개, 타협, 왜곡 될 수 없다고 그분께서 선포하셨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다른 주인을 절대 두지 말라. 다른 모든 잘못, 심지어 살인까지 용서해 줄 수 있어도 나를 등지는 것은 용서 못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따로 더 큰 벌을 주지 않는다. 당신을 등짐으로써 자동적으로 당신의 사랑과 은혜가 당장에 중단될 뿐이다.

 

신앙이 도달할 궁극적 지점

 

우리의 신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어디이겠는가? 예수님처럼 창녀 세리 불치병자 불구자 귀신들린 자들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가? 에녹처럼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순종 동행해야 하는가? 솔직히 불가능하지 않는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목표로 삼아 피 흘리기까지 평생토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 교만일 수 있다.

 

그보다는 최소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이조차 달성하지 못하지 않는가? 범사라고 해서 거창하게 인류 공동체, 미국 대통령 선거, 동성애 합법화, 종교의 자유 제한 같은 문제를 포함시킬 필요도 없다. 아니 교회 공동체에 일어나는 범사도 아니다. 나와 내 가족,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매일 일어나는 가장 사소한 일 모두에 대해서 만이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출생과 사망이 하나님의 것이면 그 중간 모든 것도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이 관여, 주관, 계획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완벽하고 그분의 선한 뜻이 반드시 있다. 어찌 범사에 감사치 않을 수 있는가?

 

창세기 5장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섬뜩할 정도로 명시하고 있다. 반면에 원시 기독교임에도 기독교 특유의 역설(paradox)이 있다. 죽음의 몇 배로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더 귀한가? 인생은 한 번뿐이다. 그것도 아주 짧다. 그 인생을 의심과 불만으로 지새우면 얼마나 손해이자 시간 낭비인가? 생명의 소중함을 하나님이 강조한 것은 결국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이지 않는가?

 

신학과 교리에 능통하고 교회에 성실히 봉사하고 대표 기도를 은혜롭게 술술 잘해도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그것도 부부사이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그러지 못하면 신앙을 소지한 것이 아니라 종교 놀음에 도취하여 자기 책임을 회피한 셈이다.

 

물론 나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살아 있고 체질이 연약하여 솔직히 저부터도 그러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모두 한 번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보자. 내 전부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고 내게 일어나는 범사를 그분이 인도함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최상급의 7배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 않는가?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자 특권인가 말이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10/2016


master

2016.04.19 02:47:48
*.162.221.131

성경 본문은 창 5:5까지만 인용했지만 사실은 창세기 5장 전체를 다룬 설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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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강해#45 - 창4:9-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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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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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강해 #46 - 창4:9-15)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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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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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강해#47-창4:15&23,24)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 강해 (4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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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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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창4:16-2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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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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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눅22:31-34)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고난주간 설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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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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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강해 #49-창4:25-5:5) [1]

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 강해 (49)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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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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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창세기강해 #50-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강해 (50)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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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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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강해#51-창6:5-7)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 강해 (5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뒤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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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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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받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2 - 창6:8-12)

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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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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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강해 #53 - 창6:13-17)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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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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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4 - 창6:15,16 & &7:10-12)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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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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