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4:7-12) 하나님이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룻기 강해 (12)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룻4:7-12)

 

신발을 벗은 고엘

 

나오미의 일차 고엘이 그녀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는 의사를 번복했습니다. 본문은 고대의 관습상 재판 장소인 베들레헴의 성문 앞에서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양도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양도자의 권리 포기 선언이 있고 양수자가 그 권리를 인수하겠다는 승낙이 따랐습니다. 열 명의 장로들과 주민들이 고엘 권리의 양수도 계약의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읍의 영적 지도자이자 법적 재판장의 역할을 맡은 장로들이 계약의 성립을 선포하고 보아스에게 축복해주었습니다.

 

이 양도는 아무런 반대 항변 없이 끝났으므로 법적으로 따져 계약은 물론 당사자들에게도 아무 하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따지면 신자들이 경계해야 할 잘못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먼저 고엘의 권리를 양도하는 절차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신25:9)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엘에게 계대 결혼을 거부당한 과부는 그 사람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서 모욕을 주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어기고 형제의 집을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룻이나 나오미가 참석하지 않았고 고엘 스스로 자기 신발을 벗었습니다. 신명기의 과부가 신발을 벗기는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도 성경은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짓는” 옛적부터 내려온 관습이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직접 밟는 신발은 하나님께 받은 그 땅의 소유권을 상징하므로 신발을 벗어주는 것은 그 권리를 양도한다는 뜻이 됩니다. 남성우위 사상에 젖은 유대사회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과부가 고엘의 신발을 벗기고 침을 뱉으라는 규정은 벌써부터 빼버리고 빈껍데기만 지키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 고엘은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Buy it for yourself.)”(8절)고 권했습니다. 마치 “보아스 네가 그 기업에 욕심이 있고 그 모압 여인과 결혼하고 싶은 것 같으니 내가 너에게 넘겨줄 테니까 네가 사라”는 말투입니다. 조금 전에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걱정되어서 물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금방 자신이 크게 양보해주는 양 생색을 내었습니다. 은연중에 보아스의 사정을 많이 배려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는 치사한 속내가 드러났습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그 모인 사람들과 장로들 앞에서 룻과 결혼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은 율법에 정한 신성한 의무를 감당하려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지 자기 유익만 챙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보아스처럼 신자도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살아가면 숨길 것도 따로 변명할 거리도 생기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진실한 모습은 항상 사람들을 감동시켜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도 장로들이 결혼할 두 당사자와 그들 사이에 날 후손을 위해서 차례로 세 번이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장로들의 축복

 

첫째로 룻에 대해선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11절a)라고 했습니다. 법적으로는 룻과 계대결혼을 함으로써 보아스가 나오미의 셋째 아들이 되는 셈이므로 나오미의 집으로 보아스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남편이 주도적으로 가정을 이끌 책임을 져야 하고 아내는 그에게 순복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룻더러 계대결혼 후에도 지금의 현숙함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더러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되라고 합니다. 라헬과 레아 자매는 야곱의 아내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된 열두 아들을 낳았기에 이스라엘의 집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야곱에겐 여종 출신인 빌하와 실바까지 네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여종이 낳은 아들들은 각각의 여자 주인에게 입양되기 때문에 라헬과 레아만 언급했습니다. 요컨대 룻더러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축복입니다. 고대에는 아들자식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예비 신부에겐 최고의 축복입니다.

 

둘째로 보아스를 향해서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날 지명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다른 단어나 문구를 병렬해서 반복하는 표현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에 특별히 시가서에 자주 사용되는데 에브랏에 유력한 것이나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것이나 똑같은 뜻이라 따로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조하려는 의도이므로 보아스더러 베들레헴에서 최고로 유력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후손들에 대해선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레스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불륜의 자식입니다. 그런데도 베레스의 집처럼 되라고 했으니 언뜻 덕담보다는 악담 같이 여겨집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창세기 38장의 배경 스토리를 살펴봐야합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말은 장남 엘의 아내였는데 남편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해서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계대결혼법에 따라 유다는 다말을 차남 오난과 결혼시켰는데 오난이 그 씨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 형의 아들이 될 것이 싫어서 성관계 중에 씨를 땅에 버렸습니다. 오난의 이 행위 또한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그럼 삼남 셀라를 다말과 결혼시켜야 하는데 시아버지 유다는 혹시 그 아들마저 죽을까 염려해서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다말로선 졸지에 남편 둘을 죽이고 자식도 낳지 못하는 재수 없는 여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남편들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심판받았는데도 유다는 셋째 아들을 주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창녀로 위장하여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약조물로 받았습니다. 그 일 년 후에 쌍둥이 아들을 낳자 유다에게 약조물을 들고 찾아가 그의 아들임을 밝히고 그 기업을 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의 경우처럼 쌍둥이 중에 동생이 형을 제치고 먼저 출산했는데 그가 바로 베레스였습니다.

 

변칙적인 계대 결혼

 

유다와 다말은 일종의 변칙적인 계대결혼을 한 셈입니다. 다말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여자로 평생 낙인찍힐 수 없어서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그 기업을 이을 자식을 낳으려 한 것입니다. 가히 성경 최초의 여권을 쟁취하려는 개혁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율법의 정신대로 살려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딱 한 번의 관계만 맺었지 부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둘째 남편 오난이 땅에 버린 가문의 씨앗을 유다에게서 대신 받은 것뿐입니다.

 

틀림없이 다말은 시할아버지 야곱과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이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 이삭이, 야곱과 에서 중에 야곱이 택함을 받아 이어져 내려온다는 집안의 내력을 들었을 것입니다.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듯이 다말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차 고엘은 기업을 무르려다 룻과 계대결혼을 하면 자기 기업이 안 될 것을 알고는 거절했습니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범한 것과 동일한 죄입니다. 그가 고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보아스는 룻과 계대결혼을 할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아버지뻘이었으니 나이로만 따지면 다말이 유다와 관계를 맺는 것과 비슷합니다.

 

룻도 이스라엘의 대적 모압 여자로 고대의 관념으로는 다말처럼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낳지 못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여인으로 평생 낙인찍힐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믿음으로 먼저 유다와 관계를 맺었듯이 룻도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받으려는 믿음으로 나이 많은 보아스에게 먼저 구애했습니다. 그 결과 다말이 죽은 두 남편과 시아버지 유다의 기업을 잇게 된 것처럼 룻도 죽은 시아버지 엘리멜렉은 물론 남편 말론의 기업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보아스는 베레스의 후손이 되었습니다.(룻4:18-21)

 

장로들의 베레스 집처럼 되라는 축복에는 부정적인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룻은 열두 지파의 어미처럼 되라고 했고 보아스는 야곱이 살았던 베들레헴의 유력자가 되라고 했고 그 후손들도 야곱 같은 베레스처럼 되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의 세 가지 축복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보아스더러 이스라엘의 선조였던 야곱과 같은 위치가 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룻을 이스라엘의 선조 할머니들과 같은 반열에 올리는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모압 여인 과부 룻으로선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장로들의 이 축복은 보아스가 평소에 베들레헴에서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보아스

 

우리는 보아스와 룻이 다윗은 물론 예수님의 선조가 된다는 룻기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현장에서 장로들이 그렇게 먼 장래의 일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축복을 통해 예수님의 족보는 물론 십자가 사역의 의미까지 드러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일 수밖에 없지만 장로들이 율법에 능통하고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진심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신탁한 축복을 베들레헴의 성문 앞에서 행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은 물론 예수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보아스더러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비인 야곱처럼 되라고 했으니 온 백성의 우두머리 즉,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주님도 열두 제자들을 세워서 당신께서 구약의 열두 지파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축복 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선조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야곱은 사기꾼 거짓말쟁이였고, 유다와 며느리 다말은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대적 모압의 과부였습니다. 베레스 또한 형을 제치고 먼저 출산했습니다. 인간사회의 윤리로는 하나 같이 결점투성이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무죄한 자로 태어나 세상 모든 죄인을 위한 영단번의 완전한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바쳐졌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진심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은 신자는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의에 힘입어 언제 어디서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 신분 가문 학벌 재물 권세 등등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주님이 오시기 최하 천년 이전에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장로들의 축복 기도 안에 복음이 생생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이자 대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갑자기 나타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와 함께 경배를 받았기에 예수님의 대제사장직분과 비교되었습니다. 지금 성경 기록상 경건하고 하자가 없는 보아스가 갑자기 나타나 나오미와 룻을 구원해주고 있습니다. 보아스 개인에게 죄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룻의 출신 성분이나 현재 위치에 따라 전혀 차별하지 않고 계대 결혼하여서 죽은 자의 기업을 살리게 해주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보아스 또한 예수 십자가에 대해선 꿈도 꾸지 못했고 단순히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순종만 했는데도 장로들의 축복처럼 성령이 역사하여 십자가 생명의 빛이 그를 통해 비춰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중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에만 온전히 포커스를 맞추고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면 반드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실현됩니다. 먼 미래에 성취될 그분의 엄청난 열매를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무리 사소해도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일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발을 벗은 본문의 고엘이 보아스가 얻게 될 그 큰 영광의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듯이 말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항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가 결정적인 죄나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선 율법이 과부가 계대결혼을 거부하는 자에게 수치만 안기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럼 어쨌든 사정상 계대 결혼을 거부해도 된다는 뜻이며 또 그래서 원 주인에게 기업을 물리는 희년제도도 마련해주었습니다. 본문에서 장로들을 비롯해 아무도 고엘의 권리를 포기한 그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본인으로선 양심상 약간 꺼렸을지라도 유대사회에 통용되는 상거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편의에 따라 율법의 문자적 규정만 따랐지 율법에 담긴 정신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불러내신 뜻을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고엘의 이름을 말살해버렸습니다. 인간사회에선 신발을 벗는 것이 단순히 권리 양도의 보장이었으나 하나님의 나라에선 당신이 주신 땅을 발로 딛고 살아갈 자격도 없다는 뜻이 되어버렸습니다. 율법대로 하자면 룻이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야 했습니다. 결국 일차 고엘인 아무개와 이차이자 마지막 고엘인 보아스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정반대의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자면 같은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도 겉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 영원한 신분이 정반대로 나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나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지금 그 상황과 위치에 그 모습으로 서있게 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대로 따르려고 실천 내지 노력하는지 여부입니다.

 

신자란 하나님 쪽에서 먼저 세상에서 불러내어 당신께 속하게 했고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당신께서 인도하는 자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분명히 교회에 자기 발로 걸어왔고 예수 믿기로 자신이 결단한 것은 맞습니다.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라 자기 지정의로 인식해야만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결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해서 그 영혼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게 해주었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에 관한 당신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신앙을 갖게 된 계기나 목적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부르심이 먼저 있고 나서 신자가 결단한 것이냐 그런 부르심이 없이 스스로 결단한 것이냐는 아주 큰 차이가, 정확히 말해 정반대로 나눠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려 나온 신자라면 그 인생의 모든 차원을 당연히 그분께서 거룩하게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서 따로 불려 나왔다는 것은 그분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신자가 된 것이지 신자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그런 확신이 분명히 있기에 모든 의사결정에 그분의 뜻을 최우선에 두게 됩니다.

 

세상에서 불려 나왔다고 절감한다는 의미는 이전에 세상에 속해 있을 때의 나와는 이미 완전히 달라졌거나 성령이 자신을 그렇게 바꿔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가졌던 자기(인간) 중심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 신관 등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연약하여 때로 죄로 쓰러지긴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로 반드시 회개하고 새롭게 바뀐 가치관을 다시 따라가게 됩니다.

 

반면에 그런 선행적인 성령의 간섭 없이 자기 결심만으로 믿은 자는 세상에서 따로 불려 나왔다는 인식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발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여깁니다. 자기 의지로 더 착하고 더 영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고 싶어서 스스로 믿은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불려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전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신관 등을 종교적 영적으로 조금 더 고급화시키려 들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고서 그들보다 죄를 조금 덜 짓는 정도로 만족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기도 예배 성경 말씀 등을 자신의 지정의로만 분별 판단 실천합니다.

 

영적으로 갈급해도 교회는 싫다.

 

지금 굉장히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하자가 전혀 없이 충분히 착하고 충분히 종교적이고 때로는 충분히 영적이지만 하나님이 전혀 모르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 꽤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살인자요 아브라함은 아내를 두 번이나 자기만 살려고 팔았으며 바울도 살인자요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비겁한 자였습니다. 믿음의 대표들이 이러한데 다른 이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그 인생을 뒤집어주자 사나 죽으나 주님만 따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 혼자 스스로 노력해선 절대로 선해질 수 없고 마음의 평강도 얻지 못한다고 선포합니다.

 

신발을 벗은 일차 고엘도 하나님을 믿었고 율법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기 판단 하에 자기가 결정한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물론 나오미와 룻의 입장에 서서 이 문제를 분별해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백성이었지만 세상에 자기 혼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세상도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불려 나온 제사장의 신분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 쪽에만 붙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종교적 의무를 지우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당신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당신에게서 선한 것이라곤 공급받지 못하니까 그 인생에 기쁨은커녕 아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고엘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대로 따르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욕만 안 듣고 살면 된다는 인생관입니다. 그렇게 고엘을 양도한 결과는 어차피 똑같아졌습니다. 나오미의 기업은 이어지고 룻도 계대결혼하게 되었으며 어쩌면 자기가 그렇게 한 것보다 보아스가 고엘이 된 결과가 훨씬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율법은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이므로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행하지 않았으니 야단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던 하나님은 신자 본인과 일대일의 관계에 따라서 주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동족의 위급한 상황에 대해 아하수에로 왕에게 탄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그 집안에 대해서 반드시 그 죄를 묻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좋으라고 신자가 의무적으로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즐겁다고 확신하는 자만이 행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면 기쁨이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불려 나왔다는 것은 세상 앞에 하나님의 일을 즐거이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최근의 미국의 한 종교의식 조사에 1990년 중반 이후 태어난 가장 젊은 Z세대는 자신이 영적이라고 대답한 자가 78%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자들 중에도 어떤 종교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기 주도적인 신앙탐색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 자가 32%나 되었습니다. 교회보다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고 영적인 어드바이스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삶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니까 영적인 안식을 구하려는 성향은 오히려 늘어나지만 기독교가 그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믿기 전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전환된 삶을 살고 있지 않고 단순히 종교의식을 지키며 자기 혼자 위로만 얻으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거룩해진 모습은 거의 없고 믿음으로 현실적 문제만 해결 받으려 듭니다. 무엇보다 환난이 닥치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인생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려면 구태여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예수님의 예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되는 방식대로 살아도 아무 비난도 받지 않겠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거절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현숙하고 부지런한 룻이 자기 밭에 이삭을 주우러 올 때부터 하나님의 간섭인 줄 깨달았습니다. 모압 여인지만 시어미 나오미를 모시는 효성은 물론 여호와를 따르는 믿음도 좋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던 터이고 실제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마침 자신이 나오미의 근족이었는데 룻이 먼저 당신의 날개로 나를 덮어달라고 요구해왔기에 더더욱 하나님의 역사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에 기꺼이 승낙한 것입니다. 신명기 율법의 뜻대로 보아스는 즐겁게 룻의 고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에 따라 신자를 세상에서 불러냈기에 구원 이후 평생토록 성령이 내주해주십니다. 내주하신 성령은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럼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여전히 연약하며 고달픈 현실 삶에 시달려서 그분의 구체적인 뜻과 계획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얼마든지 따를 수 있고 따라야만 하는 원칙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악한 길은 비참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절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선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정도의 의로는 크게 부족하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신도 기뻐하면서 기꺼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룻도 다말과 같이 평생 하나님께 저주 받은 이방 대적의 여인이라는 낙인이 찍힐 뻔했으나 미리 막아주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비록 희생과 수고가 따르더라도 죽음으로 향하는 자를 예수님의 참 생명으로 살리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세상 사람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럼 또 언젠가는 반드시 보아스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주님 뜻 안에서라면 아무리 이웃을 섬기는 일이 사소해도 먼 장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 강해를 통해 종말 같은 이 시대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계속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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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룻4:13-22) 룻기의 주인공은 다윗이었다.

(룻4:13-22) 룻기의 주인공은 다윗이었다. 룻기 강해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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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4
  • 조회 수 383

(룻4:7-12) 하나님이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룻4:7-12) 하나님이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룻기 강해 (12)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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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7
  • 조회 수 287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기 강해 (1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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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31
  • 조회 수 267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기 강해 (10)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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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4
  • 조회 수 283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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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7
  • 조회 수 393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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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 조회 수 238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4]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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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3
  • 조회 수 534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1]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룻기 강해 (6)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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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 조회 수 284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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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9
  • 조회 수 459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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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 조회 수 214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기 강해 (3)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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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5
  • 조회 수 320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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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9
  • 조회 수 410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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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2
  • 조회 수 380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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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 조회 수 242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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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 조회 수 244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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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1
  • 조회 수 256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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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 조회 수 210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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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 조회 수 241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1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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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1
  • 조회 수 249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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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 조회 수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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