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성공의 유일한 비결

창세기 강해 (6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복의 근원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며 주신 약속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그를 축복하면 축복하고 저주하면 저주하는 반면에 그에게는 직접적인 복을 준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복의 근원”(2절)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정확한 뜻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말로 근원이라고 번역되는 바람에 약간의 오해할 소지가 있다. 뿌리 근(根), 근원 원(源)이라 마치 아브라함에게서 복이 솟는 원천이나 샘 같은 뉘앙스가 생긴다. 예수님조차, 비록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은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고 했다.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인생에 길흉화복을 줄 수 있다.

 

영어성경의 번역이 더 정확한데 단순히 Blessing이라고 했다. 아브라함 자신이 다른 이에게 복이 되거나 또는 복을 비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지난주에 그에게 남을 저주할 권리나 재량이 아예 없다는 뜻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헬라어 원어에도 은혜, 관대함, 선물이라는 뜻마저 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3절)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너를 인하여”의 원어의 뜻은 “너 안에서”이다. 영어성경에선 그래서 전치사 ‘in’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고 그 다음으로 ‘through’이다. 아주 간혹 ‘by’로도 번역되었는데 이는 조금 부족한 번역인 것 같다. 최근의 한글판 성경도 “복의 근원” 대신에 단순히 ‘복’ 혹은 “복을 끼치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럼 아브라함이 다른 이에게 끼치는 복이 무엇인가? 이후의 그의 행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이웃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았다. 가진 재물을 이웃에 나눠주며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어서 십자가복음을 전한 것뿐이다.

 

비록 그가 적극적으로 말로 전하지 않았어도 우상숭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여호와 신앙을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었다. 누가 자신의 참 주인인지, 그 주인의 통치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 그래서 인간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주위 사람더러 보고 알게 만들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 그분이 복(blessing)이자 그에게 복을 수여하는 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고도 황공하게 인간, 그것도 지극히 평범한 아브라함에게 다른 이에게 복이자 축복하는 자가 된다고 했다. 당신과 동격으로 세운 것이다. 물론 그 권능과 속성에서 그분과 같아질 수는 절대 없다. 무슨 뜻인가? 그가 하나님께 받은 Blessing을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전권대사로 세상 앞에 서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in과 through의 전치사를 사용했듯이 그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남에게 전하는 통로가 되라는 소명을 주었던 것이다. 통로는 원천도, 창고도, 판매소도, 시합장도 아니다. 돈을 내고 복을 사는 곳도 누가 복을 많이 받나 시합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알기 쉽게 비유하면 하나님의 복이 통과하는 수도파이프가 되는 것이 복의 근원이며 그 역할을 잘 감당할 때에 그 이름도 창대케 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은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럼 모든 신자는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내가 복의 근원으로 세워져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가? 또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파이프의 출구가 열려 있는가?

 

수도파이프의 비유에 비추면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반드시 입구와 출구 둘이 있어야 하고 또 둘 다 열려 있어야 한다. 한쪽이 막히면 절대 복이 통과하지 못한다. 저장 보관하는 일종의 병 같은 용기가 될 뿐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신자는 그 출구가 막혔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일차로는 구원의 은혜와 믿음과 그분 자체다. 또 믿고 난 후에 누리는 그분의 모든 은혜까지 망라한다. 혼자서 그 복을 독점하고 나눠주지 않는다. 현실적인 복이 아니라도 아무 밑천 들지 않는 복음조차 잘 전하지 않는다.

 

처음 믿어서 복이 쌓여가는 동안에는 너무 즐겁고 기쁘다. 예수 믿었더니 너무 좋다고 감탄한다. 흔히들 예수 믿은 후 처음 3 년간은 기도 응답이 잘된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으로선 당신이 살아 역사하실 뿐 아니라 신자들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을 씻어주고 어려움에서 건져 복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임을 확실한 체험을 통해 각인시키려는 뜻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에도 나누지 않으면 병목 현상이 생긴다. 하나님으로선 복을 부어주려야 줄 수도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교회가 항상 내거는 구호를 통해 예수를 처음 접한 자들이 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지고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만 배웠기에 나누질 않는다.

 

그러나 첫 3년이 지나면 기도 응답이 되지 않는다. 고난이 덧나기도 한다. 그럼 기도와 말씀에 등한하게 되고 교회생활은 의무적 형식적으로 바뀌고 활력이 없어진다. 혹시 교회출석을 중지하면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서 마지못해 계속 나오지만 이미 병에 물이 고여 썩어가는 중이다. 차츰 하나님 쪽의 입구도 막히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신자의 출구는 사실상 막혀있는 법이 없다. 막혔다고 본인이 착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더러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라고 명하지 않는다. 현재 서있는 그곳이 땅 끝이다. 복을 나눌 사람과 기회를 하나님이 항상 마련해서 넘치도록 부쳐주고 있다. 기복주의에 젖어 있는 자만 출구가 열려 있는 줄 모를 뿐이다. 거기다 자기 안일과 형통만을 위하다 보니까 자기가 출구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신앙생활을 해도 힘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와 말씀을 적게 해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힘이 빠질수록 말씀과 기도에 더 열심이지만 정작 왜 기도하고 말씀을 봐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본인이 막은 출구를 스스로 열 때까지 입구에 더 이상 복을 부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도와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으니 믿음 생활은 자연히 갈급하고 허망해진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찬양을 뜨겁게 해서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거나, 은사 체험을 추구하며 자기 영성을 자랑하려 든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종말주의에 빠져 염세 도피적 신앙이 된다.

 

예수를 믿었으면 이미 천국을 확보했기에 천국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롬8:1)는 말씀의 뜻조차 모르고 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니 이제는 기도하여 복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여긴다. 아니다. 천국을 걱정할 필요 없으니 이제부턴 이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 당당히 서라는 것이다.

 

파이프가 굽어 있는 것은 아닌가?

 

둘째는 입구와 출구가 다 열려 있어도 파이프가 굽어 있거나 꼬불꼬불 꼬여 있거나 아래 위가 뒤바뀌어 있으면 물이 잘 흐르지 못한다. 신자가 세상에 한 눈이 팔려 있거나, 옛 자아가 되살아나서 욕심과 죄악에 빠져 있거나, 하나님에게 의심과 불만을 갖고 있거나,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고 형식적 신앙으로 흐르거나,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고 하나님을 수호신이나 진통제로 여기는 등등 여러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경건하고 선하지만 이상하게 마지막까지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 한두 개는 남아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나 왕국시대나 구분 없이 한 결 같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경건하게 유지했다. 당시 모든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성결했다. 문제는 그들은 여호와 신앙과 함께 다른 우상들도 같이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 징벌 받는 첫째 죄악이 우상숭배였다.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같은 주인으로 섬기는 죄다. 하나님은 다른 죄는 다 용서해도 그 죄만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당신을 절대로 음란하게 섬기지 말라는 질책으로 가득 찬 책이 구약성경이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인간은 재물과 하나님 둘 중의 하나를 주인으로 삼은 두 부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은 자는 과장되게 말해서 네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하늘에서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주인으로 삼는 인생에게는 반드시 복이 있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그만큼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선악과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이르도록 다른 모든 죄는 지어도 용서하지만 오직 나의 품은 벗어나지 말라는 동일한 권면을 하셨지 않는가?

 

하나님은 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 백성이 어떻게 해서 망한다고 한탄했는가? 종교 때문이 아니요, 제사를 안 지내서도 아니요, 도덕적 죄 때문도 아니었다. 당신의 말씀이 갈하여 즉, 당신을 잘 몰라서 망한다고 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의 길이, 넓이, 높이, 깊이를 갈음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신자를 복의 근원으로 세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전혀 모른다. 하나님을 오직 자기 형통하는 데만 동원한다. 복이 통과해야 할 파이프가 완전히 굽은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신자를 어려움에서 건져주신다. 그러나 그 믿음에만 집착하면 하나님을 극히 일부만 아는 셈이다. 이방인 수준의 믿음이다. 복이 나갈 출구를 막고 입구만 열어놓음으로써 도무지 그분께로 복을 받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고난에서 건짐을 받지 못하는 꼴이 된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그런 상태에 대해 한탄한 것이다.

 

입출구의 굵기가 같은가?

 

셋째로 입구 출구 둘 다 열려 있고 굽지 않았다고 해서 복의 근원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입구와 출구의 크기가 같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팔 같은 형태가 되지 파이프가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출구는 좁고 입구가 넓다. 받은 복을 거의 다 자기가 소비하고 일부 여유 있는 것만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럼 그나마 셋 중에 가장 나은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아주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고 있다. 바로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다. 땅을 판 돈의 일부를 착복하고 일부만 헌금하자 부부가 조금의 시차는 있었지만 한 날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벌을 받았다.

 

그들만 정죄 매도해선 안 된다. 어떤 면에선 그들은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했던 시기에 본을 보이는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다. 우리라고 크게 다를 바 없으며 사실은 대부분이 다 이 셋째 부류에 속한다. 일종의 서원 기도에 응답을 받았으면서도 제대로 준행하지 않는다. 크게 기쁜 일이 생겨서 감사 헌금을 많이 해야지 마음 먹었다가도 막상 주일 아침에 수표에 금액을 자꾸 고쳐 쓰지 않는가?

 

물론 출구가 좁을 뿐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니다. 때때로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긴다. 분명히 선한 일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동일한 잘못이다. 물이 빠져나가긴 하니까 완전히 썩지는 않지만 입구로는 복이 자기 쓰기도 모자랄 만큼 찔끔찔끔 들어온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신자더러 출구를 항상 크게 열라고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자와 전도해야 할 자와 기도해주기 원하는 자와 사랑에 갈급해 하는 자를 넘치도록 붙여주신다. 복의 근원이 되도록 입구를 키우는 훈련을 그분이 시켜주신다. 그럼에도 출구를 계속 좁힌 상태로 있으면 하나님을 거역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법을 질문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했다. 그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눅10:29) 그 이웃이 누구인지 주님께 되물었다. 자기 딴에는 평소에 자기 신분과 위치와 소속과 소득이 비슷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그들은 열심히 사랑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정의다.

 

그러자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 선행을 강조하는 비유가 아니다. 이웃의 범위를 가르치는 비유다. 주님이 이웃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대했는가? 생면부지의 사람, 그것도 고난 중에 있는 자까지 이웃이라고 했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비유이긴 해도 의도적으로 비유의 주인공으로 유대인들이 멸시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을 들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 제사장은 고난 중에 있는 자를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가 오히려 이웃의 범위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웃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지 않는가?

 

사마리아인은 응급치료를 해주고 혹시 추가비용이 들지 모르니까 돈까지 맡겼다. 그는 입구와 출구의 크기가 똑 같은 대표적 예였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멸시 받으며 왕따를 당하는 모두가 신자의 이웃이다. 그들을 섬기는 것이 입구와 출구의 크기가 같은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 실제적인 본을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보이셨다.

 

신자들의 가장 큰 착각

 

신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중에 시간이나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 때는 정말로 선교사로 가야지 결심하기도 한다. 내 믿음이 아직도 너무 미숙하고 인격적으로도 남 앞에 나설 정도의 그릇이 못된다. 괜히 전도하고 봉사한다고 나섰다가 가뜩이나 말이 많은 이민사회에서 잘난 체 생색낸다고 뒷말만 무성해질 것이다. 그럼 교회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훼방할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이는 착각이다 못해 어리석은 것이며 겸손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교만한 것이며 엄격히 말해 신앙도 아닐 수 있다. 어떤 인간도 평생을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도 남들보다 월등 뛰어날 수 없고 남들이 완전히 수긍할 정도의 성자는 절대 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비기독교적이고 나아가 불신앙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모든 선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불신자들은 선이 인간의 속에서 나올 수 있다고 착각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거짓, 음란, 궤휼뿐이라고 선포했다. 신자가 된 후에는 그 빈도와 세기만 조금 약해졌을 뿐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받은 복과 하나님 그분을 받은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 신학과 교리를 몰라도 된다. 자기가 체험한 은혜를 그냥 그대로 전하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역으로 말해 아무리 신학과 교리에 능통해도 전할 만한 은혜가 없거나 있어도 나누지 않고 있다면 그 신자 됨마저 의심할 만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교리를 몰랐고 신약성경도 없었고 의신칭의 교리의 이응자도 몰랐다. 그들은 보고 듣고 만진바 된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다. 또 실제로 삶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감 없이 진솔하게 전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동행하는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기쁨으로 초대했다. 신분과 소속과 계급과 인종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로마의 왕족들이 이방인 노예들을 진정한 형제와 자매로 대했다. 정말로 지상의 천국을 이루고 맛보았다.

 

현재의 경제상황이 아주 힘들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일이 너무 빠듯하다. 자동차는 최하 두 대는 있어야 하고, 집의 모기지도 갚아야 하고, 아이 교육비도 들고, 의료 교육보험에도 들어야 하고, 은퇴연금도 적립해야 하고, 가끔 외식과 여행도 해야 한다. 도무지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잘 살펴보면 당장 필요 없는 것에 소비한다.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낭비하는 시간이 많다.

 

엘에이에 제가 잘 아는 여자 전도사님이 한 분 계신다. 이분은 무조건 남에게 퍼준다. 차에 남에게 나눠줄 온갖 물건들을 싣고 다닌다. 길 가다 힘든 사람 보면 옷도 벗어주고 갖고 있던 돈도 준다. 여자 전도사님 사례비가 얼마나 되겠는가? 남편 목사님은 멕시코에 가서 선교하고 계시고 미혼의 따님과 투 베드 아파트에 비용을 나눠 물며 살고 계신다.

 

그런데 남에게 주고나면 또 나눠주라고 하나님이 꼭 채워주신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딱 맞게 하나님이 주신다. 그 어려운 사람의 구체적 사정을 모르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데 기도한 대로 다른 이가 나눠주라고 갖다 준다. 차가 필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이가 그 사정은 전혀 모른 채 타던 차를 남에게 주라고 갖다 주는 식이다. 제가 곁에서 여러 번 그런 경우를 직접 목격했다. 저희에게도 자꾸 갖다 주어서 우리도 그 받은 것 그대로 남에게 주었다.

 

불신자의 생각과 같지 않는가?

 

내게 시간과 재정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남을 돕겠다는 것은 자기 형편을 자기 스스로 개선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다른 종교인이나 불신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나를 절대 완성은 물론 성숙시킬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 내가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그분이 주어야만 생긴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께 즉각 순종하는 길 외에는 성장할 방안이 없다. 그것만이 신자 성장의 유일한 길이다. 다이어트의 정의를 우스갯소리로 “From Tomorrow”(내일부터)라고 한다. 순종은 반대로 “Right Now”이다. 신자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순종을 자꾸 내일로 미루면 하나님이 주실 복도 다이어트로 줄여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출구를 활짝 열게 하려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계속 붙여 주신다. 즉각 순종하면 그에 필요한 자원, 능력, 믿음,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그가 출세했는가? 형통했는가? 자기 질병마저 고침 받지 못했지 않는가? 그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사랑만 전했다.

 

기독교는 심각하고 진지한 철학적 성찰이나 각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순히 내 스스로는 나의 영성을 절대 충실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시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유일하게 선하신 분인 하나님만이 나를 성장시키고 복을 주신다. 전부 그분께 받은 것이라 어떤 은혜라도 나눌 수 있다. 만약 가시적으로 현실적으로 나눌 것이 없다면 내가 믿은 후의 보람과 가치라도 즉각 남에게 가르쳐줘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출구를 활짝 열지 않으면 하나님께 은혜를 절대 받을 수 없다.

 

물론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당장 저부터도 제 코가 석자라 제대로 되지 않고 평생을 노력해야 할 힘든 싸움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서있는지, 예수 믿은 특권과 은혜가, 또 복의 근원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신자가 아직도 남을 도울 처지나 수준이 도무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처럼 내가 나를 성장 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거나, 아님 가진 돈이 아까워 움켜쥐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아니 그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까지도 정확히 알고 계신다.

 

네 혼자 안 되니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또 그러니까 그분께서 자꾸만 우리 출구를 넓히려고 연단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입구로 더 많은 복을 부어주려는 목적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일에서부터 가장 적은 자에게 베풀면 된다. 도와줄 물건이 없어도 된다. 가서 기도만 해줘도 되고, 위로와 권면의 말을 전해도 되고, 어려운 사정 이야기만 들어주어도 되고, 정 안되면 그냥 함께 있어만 주어도 된다.

 

목사로서 드리는 말이 아니다. 내 것으로 남을 퍼주어서, 사실은 전부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로 하여금 예수님 사랑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그분 사랑을 누리게 해주어서 그 또한 다른 남에게 하나님의 복(blessing)으로 서게 되는 것만큼 인생에서 기쁘고 보람찬 일은 없다. 인생 성공의 최고의 비결이다.

 

바울이 무슨 일이든 주 안에서 가능하다고 해놓고 대신에 가장 괴로워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이 겪는 고난과 핍박이었다.(고후11:28) 가장 괴로운 일이 그것이었다면 역으로 말해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고난과 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에게 가장 기쁜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40에 하나 감한 정말 매도 기꺼이 맞았지 않는가?

 

구원 얻은 신자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자라지 않는다. 그 길만이 신앙성장의 유일한 길이다. 더 근본적으로 말해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그 창조의 목적과 본질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다.

 

8/2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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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판 것보다 더 큰 아브라함의 잘못 (창세기강해 #67 - 창12:10-20)

아내를 판 것보다 더 큰 아브라함의 잘못 창세기 강해 (67)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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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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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성공의 유일한 비결 (창세기강해 #66 - 창12:1-3)

인생 성공의 유일한 비결 창세기 강해 (6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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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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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강해 #65 - 창12:1-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 강해 (6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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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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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어 누리는 최고의 현실적 축복 (창세기강해 #64-창12:1-5)

예수 믿어 누리는 최고의 현실적 축복 창세기 강해 (6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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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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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강해 #63 - 창12:1-4)

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 강해(6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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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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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 관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강해 #62-창12:1-4)

미국 대선에 관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 강해 (6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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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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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상 최고 독종 아브라함 (창세기강해#61-창11:10-13, 26-32)

인류 역사상 최고 독종 아브라함 창세기 강해 (61)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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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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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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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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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피부 색깔이 왜 세 가지인가? (창세기강해#59-창10:6-20)

사람의 피부색깔이 왜 세 가지인가? 창세기 강해 (59)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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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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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강해 #58 - 창9:18-29)

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 강해 (5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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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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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강해 #57 - 창9:8-17)

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 강해 (5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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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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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창세기강해 #56 - 창9:1-7) [1]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 창세기 강해 (5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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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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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심판대의 네 가지 통과절차 (창세기강해#55 - 창8:20-22)

하나님 심판대의 네 가지 통과절차. 창세기 강해 (55)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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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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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4 - 창6:15,16 & &7:10-12)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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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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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강해 #53 - 창6:13-17)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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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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