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일과 하나님 일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
마태복음강해 (212)



http://youtu.be/0-6uYvdNAY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1-7)


목사를 알아주는 식당주인

이곳 LA의 한인 식당 주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우스개가 하나 있다. 목사라고 말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물과 휴지와  음식 등을 갖다 주고 나갈 때에 계산할 시늉조차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목사라는 것이다.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6,7절) 잔치의 상석을 차지하고 사람들의 문안을 받기 좋아하는 모습이다. 말 속에 뼈가 있어 같은 목사 입장에서 씁쓸하지만 사실이 사실인 만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의 올무를 거는데 완전 실패했다. 올무란 대화로써 갈등을 풀어가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해놓고 자기들이 책을 잡히지 않으려는 명분만 찾았던 것이다. 그 모든 시도가 무산되었기에 이제 남은 것은 무리수뿐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로 불공평하고 사악한 재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위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께서 선포하신 진리를 추호도 타협, 변개, 왜곡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더 예리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23장 이후는 그래서 예수님과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마치 브레이크가 파손된 두 기차가 한 철로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모습이다.

골고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율법은 물론 인간 세상의 도덕, 관습, 상식, 양심 어느 것에 견주어도 도무지 말이 안 되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태초부터 품고 계셨던 인류구원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당신의 때와 장소와 방식으로 완전하게 달성하셨다.

따라서 예수 믿어 십자가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신자 각자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택하여서 구원으로 이끄셨다는 뜻이다. 또 이 자리에 이르도록 그분의 직접적인 보호와 인도 가운데 있으며, 나아가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모습으로 바꾸어 줄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란 바로 이 구원의 진리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제대로 가르칠 뿐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실천할 책임이 있는 자다. 하나님의 구원을 유효화, 현실화, 가시화 시켜야 함에도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대나 지금이나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고 있다.    

자기만 사랑한 바리새인들

지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대상으로(1,2절) 말씀하셨다. 서기관은 전문적으로 율법을 필사 보존 연구하는 자들인데 지금으로 치면 신학자에 해당될 것이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르쳐서 실제로 준행하도록 계도하는 자로 지금의 목사와 같다. 서기관들은 거의 전부 바리새인 출신이기에 실은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회당마다 하나씩 있는 돌로 만든 의자다. 당시 회당 예배 때에는 모두 서있어야 하는데 예배를 주관하고 율법을 강해하는 자가 앉는 자리다. 히브리어 어법상으로 모세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율법을 전수 받은 모세의 전통과 지위를 계승하고 대신한다는 의미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는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앉음으로써 모세의 적법한 후계자처럼 행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말하는 바는 지키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3,4절).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운다(4절)고 해서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다 장로의 유전까지 합해 613계명으로 분류했다. 그중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 365계명, 무엇을 하라는 것이 248계명이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정확히 시행하는지 감독하고 간섭했던 것이다.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죄인이라는 너울을 씌워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막상 자기들은 귀찮으면 그 규정들을 무시했다. 무려 613개나 되는 계명을 외우고 일일이 적용할 수 있다면 그 머리는 상당히 좋은 것이다. 그 팽팽 잘 돌아가는 머리가 자기들을 향해선 작동이 멈춘 것이다. 예수님 말씀(마7:4)대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정확히 끄집어내었다.  

바울이 사랑에 대해 정의(定意) 내리면서(고전13:4-7),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끝까지 참는 것이었다. 자기 잘못에 대해선 끝까지 참았으니 자기 사랑에는 100점이었다. 이웃의 잘못은 단 하나도 참지 못했으니 이웃 사랑에는 0점이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자기를 잘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했을 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했다. 그 의미는 자기와 동류인 같은 신분의 사람들과만, 쉬운 말로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은 자기사랑이지 이웃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 아니었는가?  

스스로 자기 자랑하는 바리새인들

차는 경문을 넓게 했다는(5절) 우리말 번역은 언뜻 타고 다니는 수레를 화려하게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경문(經文)은 성경의 문구 즉, 유대인들이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쉐마’(신6:5)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작은 종이 두루마리에 적어 자그마한 가죽상자에 넣어서 앞이마와 팔뚝에 차고 다녔다. 그것을 남들보다 더 크게 만들어 하나님을 더 뜨겁고 많이 사랑한다고 과시한 것이다.

옷 술을 크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율법은 유대인들 옷자락 끝에 청색 실로 꼰 술을 달도록 했다.(민15:38) 청색은 하늘, 즉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모든 유대인들이 출애굽의 큰 구원을 받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항상 기억하며 실천하라는 의미였다.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더 크게 만들어 자기들이 아주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이므로 상석에 앉고 문안 받는 일 정도는 당연하게 여겼다. 랍비라는 용어는 “나의 주”, “나의 선생”이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몇 번 랍비라고 불린 적이 있다.  존경의 뜻을 담은 이 명칭을 랍비들 스스로 권위를 높이려 나중에는 두 번씩 부르게 했다. AD 3세기 이후에는 그 인위적 권위가 더 높아져 제자들은 선생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고 길을 걸을 때에 앞은 물론 옆에 서도 안 되고 뒤에서 따라가야만 했다.

지금도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르친 내용이나 교회운영에 대한 지시에 대해 절대 순종을 강요하고 있다. 교인들이 목사를 향해 마음에서 존경이 우러나온다면 자연스레 순종할 것이다.  또 그런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임할 것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낯간지럽게도 목사가 자기 입으로 목사 즉, 자기에게 순종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한다. 만약에 현실에서 형통하고 싶다면 목사를 잘 대접하라고 설교한다.  

문안 받기를 즐기는 까닭

바리새인들이 상석을 차지하고 문안 받기를 즐기는 까닭을 예수님이 뭐라고 설명했는가?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에게 잘 보이는 데는 신경 안 쓰거나, 사람에게 그러는 것보다 신경을 덜 쓴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연구하고 가르치면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하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들만큼 잘 알고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니까 자기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요컨대 성경을 자기들이 독점한 데서 모든 잘못이 기인했다. 613 계명을 외우는 것도 대단한데 case by case로 분류, 적용, 판결하면서 스스로도 우쭐하며 교만에 빠졌을 것이다. 판결을 받는 자들도 그들이 우러러 보였을 것이다.

한국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 법정에선 판사가 입장할 때에 변호사 검사를 포함해서 모든 참석자들이 일어났다가 판사가 착석한 후에 자리에 앉는다. 판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그러나 판사 개인의 인격과 성품은 아무도 모른다. 대부분이 그를 생전 처음 보는 사이다. 법에 공평과 정의가 보장된 대로 불편부당하게 합리적 객관적 판결을 기대하며 또 그러면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판사가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공평한 판단을 하도록 연봉을 아주 많이 준다. 본인들도 굉장히 큰 명예로 여기기에 불공평한 판결을 거의 하지 않는다. 최소한 약자에 대한 억울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미국에선 약자를 너무 편들어 오히려 문제가 될 판이다.

법이 공평하기에, 그 집행도 공평해지며, 공평한 판결을 내린 판사도 존경하게 된다. 판사의 권위는 법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 랍비나 목사나 그 타이틀에서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공정하게 집행할 때에 사람들이 순종할 수 있는 권위가 생성되는 것이다.

성경도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더 존경하라고 했다.(딤전5:17) 단지 목사이기에 존경하라고 하지 않았다. 말씀을 순전하고도 정확하게 가르치고 그 말씀의 진리 됨을 자신의 실행으로 증명하는 자여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이나 성취가 없으면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신18:22) 율법 자체가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초보적이고 유치해 보이는 구약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다. 공평과 정의를 100% 충족시킬 수 있는 진리다. 세상 역사를 주도하고 인생들을 어떻게 인도할지에 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과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성경뿐이었다. 현대의 신자들이 보기에는 뭔가 초보적인 것 같고 심지어 사교(cult) 같은 냄새가 난다. 거기다 노예제도, 일부다처제, 인종차별을 수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절대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죄 중에 빠져 있는데도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께서 낮아진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모든 체면과 위신을 다 내려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을 주셨다. 그 당시 상황에선 그것만 100% 준행하면 인간 공동체가 순전히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츰 하나님 말씀 자체의 능력이 발휘되면서 그 공동체가 성숙되어진다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은 잘 아는 대로 율법에 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반대로 불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화를 당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바로 그 유치해 보이는 계명을 바탕으로 하신 약속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에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다면 그런 약속을 하실 리가 없으며 또 성립되지도 않을 것 아닌가? 유치해 보이는 구약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조차도 실행은커녕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 부패한 인간 영혼이 잘못이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을 정말로 진지하게 묵상하며 연구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죄를 너무나 저주하시되 죄 중에 있는 즉, 일부다처와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행하면서도 전혀 죄로 여기지 않는 자들을 당신께서 지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로 끝까지 참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한함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분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이의 티끌 같은 잘못을 지적해내어 그렇게 냉혹하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울 리도 없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핵심 단어는 ‘헤세드’- 인애(仁愛)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당신의 일방적 선택과 은혜로 언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이 아무리 큰 잘못을 자주 범해도 당신께서 하신 그 언약 때문에 끝까지 참고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이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그 헤세드를 백성들 사이에 정말로 헤세드답게 가르치고 실현해보일 책임을 가졌다. 최소한 율법이 제사장들에 대한 성결 절차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잘못을 범하면 가장 엄중한 벌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는가?

바리새인과 거꾸로만 행하라.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지적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 그 사랑에 너무 열심이어서 문제였다. 거기다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잘 시행하는지 감독하는 하나님 일을 분명 성실히 수행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행하면 자기들도 자동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해지는 줄 착각한  데 있다. 그들이 남에게 엄격하게 적용한 규정을 자기들에게도 똑 같이 엄격하게 적용했다면 그렇게 될 리 없었다. 예수님의 뜻은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스스로 실천하지 아 않으면 아무리 그 가르침이 바르고 훌륭해도 그 모든 가르침은 종교적인 일에 불과하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과 종교적인 일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아주 간단하다. 남더러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그치면 종교적인 일이다. 자기가 먼저 행했기에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인정해주면 하나님의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면서 분명히 옳고 해야 할 바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종교였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고 예수님께 잘못이라고 지적 받았다. 그럼 하나님 일을 더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들이 행한 바를 거꾸로만 하면 된다.

모세의 자리를 다른 이에게 양보해야 한다. 말보다 행함이 앞서야 한다. 행함으로 가르치면 구태여 말로 안 가르쳐도 된다. 경문과 옷 술을 크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실천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잔치에 가면 말석에 앉고 사람에게 문안 받기 전에 먼저 문안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을 자기 스스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특별히 누가 이래야 하는가? 목사들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목사들

본문 내용을 목사가 지킬 윤리나 행동강령 정도로 이해하고 치울 계제가 아니다. 목사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에 아무 잘못이 없다는 점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바리새인들도 613 계명을 정확히 적용했으니까 사람들의 문안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목사님들이 정통 복음을 가르친다. 절대로 이단이거나 거짓 교사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종교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 목사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있지 않고, 종교로 먹고사는 직업인이 되었다. 본인은 결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분명 그렇다.

가르치는 바대로 실행하지 않는 구체적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겸비하게 경외하며 항복한 적이 없다. 신자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이 자기에겐 절대자 하나님이 되어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을 독점하여서 그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다 보니까 어느새 자기가 자기의 하나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말씀의 권위에 전적으로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설교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하나님 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없고, 그 거룩한 빛을 도리어 인간 목사가 가로 막고 있다. 하나님 말씀 자체의 능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도 목사들은 그런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거꾸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오신다면 틀림없이 목사들부터 심판하지 않겠는가? 정말 두려울 뿐이다. 그 유치해보였던 구약의 율법도 제사장의 벌이 더 엄중하다고 선포하고 있지 않는가?

목사가 먼저 계산하라.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 높아진다고 가르친 그대로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그들 앞에 무릎 꿇고서 몸소 씻어주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정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그 가르침에 권위가 부여되었고 진리가 진리로서 온전히 세워졌다. 당신께서 정말로 당신을 산 제사로 드린 것이다.

바울은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우상은 아예 실존조차 하지 않으니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진리를 아직 모르는 믿음이 연약한 신자가 혹시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기에 자신은 평생을 두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어떤 경우가 되는가? LA 한인 식당 주인이 만약 불신자라면 목사들의 행태를 보고 목사는 물론 기독교 나아가 예수님마저 속으로 우습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목사가 평생 먼저 계산하고 또 교인들에게 휴지와 물과 음식도 갖다 주어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목사만이 아니다. 신자들도 심방이나 개업 예배 때에 목사, 그것도 꼭 담임 목사가 와서 기도해주길 바란다. 그리고는 돌아갈 때에 돈 봉투로 대접한다. 그래야 집안에 복을 받고 사업이 번창하리라 믿는다.

절대 그런 요구와 생각을 해선 안 된다. 물론 그 첫째 원인은 저 같은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목사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예수님 시대나 이전과 달리 목사가 성경을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다.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연구할 수 있다. 컴퓨터 성경 소프트웨어나 주석서를 구해 도움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성경을 잃지 않는 까닭은 성경을 읽으면 성경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이 싫고 귀찮은 것이다. 그러니까 가뜩이나 성경을 독점하고 싶은(?) 목사들에게 엉터리 권위만 신자들이 더 세워주고 있는 것이다.  

목사도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목사도 연약한 사람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사람들로 인정받고 싶어진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단 그렇게 하되 서로가 서로에게 공평하게 하라는 것뿐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위로와 격려와 칭찬이 있어야 한다. 신자가 목사를 대접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구태여 지금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제가 목사가 된 이후로 하나님이 특별한 영적 권위를 세워주는 일을 자주 겪는다. 그러나 목사를 섬기는 정성보다 더 크게, 최소한 동일하게 어려운 이웃을, 그중에서도 특별히 불신자들을 섬겨야만 한다. 정말로 목사가 그렇게 가르치고 신자들이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면 신자들이 그 목사를 구태여 섬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그런 목사를 반드시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신자들도 이미 만인 제사장이 되어 있다. 신자들끼리 서로 기도하고 함께 모여 말씀을 묵상 연구하며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세워줄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따로 목사에게 기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히 보상해주신다. 신자 개인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더 섬기라고 더 불쌍한 이웃을 더 많이 붙여주시고 섬길 수 있는 여유까지 주신다. 돈으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하나님이 마련해주신다. 또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자에겐 정말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넘치도록 채워진다.

최근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한다고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실제 조사해보면 영적 갈급함은 오히려 더 증대되었다. 너무나 살기가 각박해지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와 교인들이 싫다고 한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예수님 닮은 목사와 바울 같은 신자들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진리라고 말로만 믿으라고 하고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는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어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 기독교적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안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십자가 은혜를 통과한 것이고 또 그래서 교회에 출석한 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짜로 자기에게 절대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으로만 살고 죽어야 한다. 성경 말씀이 절대적으로 영원한 진리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게 확신하는 바탕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한다. 또 그러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룩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것을 현실 삶에서 실제로 계속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기독교에 한해 성경 말씀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정말로 성경 안에 살아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참 생명이 자기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십자가의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내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우리 삶에서 비록 더디더라도 하나씩 거룩한 열매를 맺고 있어야만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는 신자는 인생에서 절대로 실패가 없다. 실패의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한다. 신자의 실패는 자신이 하나님의 태초부터 예정하신 영원한 사랑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거나 잊고 있어서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의 성공은 물론 그 반대다. 본문의 바리새인이나 오늘 날의 일부 목사들이 범하는 잘못도 바로 이 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몰랐을 리는 결코 없고 성경을 독점하여서 종교적 일에 열심을 다하다 보니 차츰 이 기본적인 진리마저 잊고 만 것이다.

3/23/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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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201 - 마21:28-32) [1]

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 (201) http://youtu.be/SZQPKr9_-k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

종교적 일과 하나님 일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 (마태복음강해 #212 - 마23:1-7)

종교적 일과 하나님 일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 마태복음강해 (212) http://youtu.be/0-6uYvdNAY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태복음강해 #163 - 마15:15-20) [2]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태복음 강해(163) http://youtu.be/5i_BO3cMMFI (클릭하면 You-Tube 오디오로 들을 수 있음)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당신의 믿음은 얼마나 큰가? (마태복음강해 #165 - 마15:21-28)

당신의 믿음은 얼마나 큰가? 마태복음 강해 (#165) http://youtu.be/H478WztE6P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

새해 결심을 성취하려면? (신년주일설교-막1:35-39)

새해 결심을 성취하려면? 신년주일 설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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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1
  • 조회 수 1324

죄를 짓고 있는 교인을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가? (마태복음강해 #181 - 마18:15-17)

죄를 짓고 있는 교인을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강해 (#181) http://youtu.be/Rny7ftJ9mJ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

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강해 #58 - 창9:18-29)

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 강해 (5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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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26
  • 조회 수 1278

예수님이 던지는 너무나 심각한 질문(마태복음강해 #188 - 마19:23-26) [3]

예수님이 던지는 너무나 심각한 질문 마태복음 강해(188) http://youtu.be/YjZEbjthG3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

너무 간단하고 쉬운 예정론(마태복음강해 #144 - 마 13;10-17) [4]

너무 간단하고 쉬운 예정론 (마태복음 강해 #144 - 마 13;10-17)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순교할 각오가 없으면 전도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175 - 마17:9-13) [2]

순교할 각오가 없으면 전도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175) http://youtu.be/Vpbke7xmaCs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

당신은 예수의 형제 자매인가?(마태복음강해 #142 - 마12:46-50) [1]

당신은 예수의 형제 자매인가? (마태복음 강해 142) http://youtu.be/kcJ50NTwxYs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1) (마태복음강해 #155 - 14:13-21) [1]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1) 마태복음 강해 (155)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출애굽기강해#48-십계명8 출20:14)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 출애굽기 강해 (48) 십계명 (8) “간음하지 말라.”(출20:14)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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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5
  • 조회 수 1178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강해 #65 - 창12:1-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 강해 (6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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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14
  • 조회 수 1172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 마24:32-39) [5]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태복음강해 (228) http://youtu.be/zEh_opoKjSo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하나님 (마태복음강해 #164 - 마15:21-28) [1]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164) http://youtu.be/r9QBDS4JFIU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음)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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