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창2:4-7)


특별한 방식의 인간 창조


인간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두 번째로 살펴보자. 우선 인간의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5.6절) 창세기 1장에선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한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그래서 2장과 1장이 각기 다른 전승과 문서에 근거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한 후에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고 한다.(8절) 분명히 각종 과실나무를 풍성하게 에덴에 먼저 조성하셨다. 결정적으로 5절에 땅에 경작할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채소나 초목은 사람을 위해 주셨고 또 사람이 경작해야 번성해진다는 뜻이다. 인간 창조 전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점을 밝히는 기술은 사실상 없다.


따라서 5절과 6절은 단지 인간의 창조가 없었다면 이 땅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인간이 거하지 않는 에덴은 낙원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물이 과일, 채소, 향신료 등을 즐기지 않지 않는가?


본문에서 주목할 내용은 7절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한 방식으로 창조하셨고 또 그런 창조 방식에 당신의 특별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든 다른 피조물은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이뤄내셨다. 인간만은 당신이 흙으로 지으셨다. 쉽게 말해 직접 Hand Made 하신 것이다.


거기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그래서 인간은 생령이 되었다. 생기는 생명의 기운, 정신, 영혼 등의 뜻을 다 망라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영이라는 생령도 단순히 호흡하는 생명체 혹은 의식과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만 이런 방식으로 창조했다. 다른 피조물에겐 전혀 없는 특성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인간 내면에 지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을 소지한 영적 존재라는 것이 전후 문맥상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릴 소명을 주셨다. 또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형상과 모습을 닮게 지으셨다는(창1:28) 것과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다.


하나님께로 온 영


사람이 풍선을 불려면 자기 속에 있는 공기를 집어넣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알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고전2:11.12)


한 죄인이 거듭나서 예수를 믿으려면 성령이 간섭해야만 가능하다. 그 후로 성령이 임재하여 영원히 내주하신다. 하나님의 사정을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권능을 통해 알게 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과 계획을 깨닫고 그에 순종하게 된다.


본문의 단계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이다. 하나님도 근본적으로 영이시다. 그가 하나님께 코로 받은 그분의 생기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그분의 영이다.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교제 동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불신자는 죽은 영이다. 육신의 생명과 사고하는 능력까지는 보유했어도 하나님의 사정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으니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도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죽은 영이다.


불신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사탄이 가로막고 있다. 스스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도 얻어낼 수도 없다. 부모 없는 고아요, 목자 없는 양처럼 잃어버린 자들이다. 무엇을 하든 갈급하고 허망하다. 실제로 죽은 자와 방불하다.


반면에 신자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을 이미 받았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하나님 그분의 일방적 은혜로 이미 옮겨졌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살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영이나 다름없다.


물론 일단 예수 믿은 신자를 하나님이 정죄 심판은 아니 하시지만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을 소멸치는 않으시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는 하신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만 생령이다. 그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풍성하고 활기차게 된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다.


더듬어 발견하는 창조주 하나님


인간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너무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의미로 여길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아는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이 영계는 물론 물질계 전부를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통치함을 알고 적절히 반응하는 존재다. 그 첫 번째 반응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기도다.


아담의 타락 후에는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죽은 영으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정말로 진지하고도 합리적으로 철학을 하면 그 끝에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바울이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찬 그리스 아테네에 전도하러 갔다. 예수와 몸의 부활을 선포하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새 교가 무엇인지 더 듣고 싶다고 관심을 표시했다. 바울은 당시 가장 지혜롭고 철학적인 헬라인들에게 범사에 종교성이 많고 특별히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하는 단도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너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사항이 있다고 말을 이어갔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인간에게 주시는 분이다.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어 온 땅에 거하게 하고 저희 년대와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다.(행17:25-28)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바벨탑을 쌓자 그 형벌로 언어를 섞고 천하각지에 흩으신 사건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했다.(27절) 비록 바벨탑을 심판하셨어도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기에 너희는 아직도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우상과 이름 없는 신이란 아예 실재조차 않기에 그것들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고도 하나님 그분을 거역하는 큰 죄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더듬어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로 곁에 항상 계시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은 바울 당시의 아테네에서 이미 형성되었다. 지금도 그와 대동소이하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 사변적 지혜를 자랑했다. 그러나 바로 곁에 더듬어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에 알지 못하는 신까지 경배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이자 코미디인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신이라면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인간의 경배할 이유와 필요가 없다. 요컨대 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단을 만들어 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라도 경배에 빠트린 신이 있어서 그 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고난을 겪을까 염려한 것이다. 몰라서 경배 못한 것을 두고 벌을 주는 신이라면 신으로서 자격이 없다. 조금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관습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그 잘못을 지적해주어도 시인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태생적 비극이다. 비극은 희극과 일맥상통한다. 아데네는 그래서 고대 신화뿐만 아니라 연극 공연이 융성했던가 보다. 자기들이 바로 최대의 희극이자 비극의 주인공인줄 모르고 연극배우를 보고 조롱하고 희희낙락한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다.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실, 아니 정말 불쌍해서 한탄하실 일이다.


세계 최고 IT 강국에서도...


고대 그리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최고 IT 선진국인 한국 불신자들 모두의 영적 실상이다.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을 공경 추모하는 마음은 갸륵하다. 그러나 분명히 죽은 조상의 혼이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고 나아가 그 조상의 음덕에 따라 자기들 삶의 질이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과 자기 인생을 자기 능력만으로 주도하는 것이 아님도 시인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처럼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상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키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들 사고를 하나님과는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영적 세계가 어떤 것인지 추적할 시도도 않는다.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원숭이와 인간의 가장 다른 점이다. 인간만 피조물 중에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을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증거다. 우선 육신적 부모에게서 왔고, 그 부모는 조부모, 조부모는 증조부, 고조부로 이어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족보를 기록 보존 승계한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자기들 가문을 흥왕 시킨 선조에게서 추적을 멈춘다. 이 땅의 형통만을 목표로 살기에 당연한 결과다


인간이 선조를 정말로 논리적으로 추적하면 반드시 최초 인간에 도달해야 하고 창조와 진화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창조가 옳으면 진화는 틀린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만약 창조가 옳으면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이며 그분께 경배해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화가 옳다면 이 땅에서 감옥에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 멋대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문제는 창조는 그 본질 상 인간이 증명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각 추론의 능력을 갖춘 것은 이미 창조된 후다. 창조의 증거를 수집할 수 없다. 인간이 이 땅에 실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창조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그럼 진화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창조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


창조가 전제된 진화론


진화론을 최초로 주장한 다윈이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진화가 가능한 물질이 선재(先在)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 당연히 그 물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따져야 한다. 진화가 가능한 물질이 선재했다는 전제는 다른 말로 그 선재한 물질은 진화하지 않았으며, 그렇다면 그 뒤에 창조주의 손길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인과 경위는 모르지만 단순히 만세 전부터 영겁의 세월동안 그렇게 있었다고만 한다. 이 또한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이야기인가? 과학적으로 따져 지구의 나이와 비교가 안 되는 오랜 시간 동안 전혀 진화하지 않던 물질이 어떻게 갑자기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또 어떻게 생명의 씨앗이 잉태되게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그런 대대적 변혁 뒤에는 엄청난 힘이 작용한 것이다. 전혀 진화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던 물질이 진화하여 생명을 잉태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야 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진화의 허구성은 끝이 없다. 파면 팔수록 텅 비었기에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껏 생명이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만 다시 밝힌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는 구실로 삼았다. 울고 싶은 아이 뺨을 때려준 격이다. 그 배역은 갈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완악한지 모른다. 진화론이야말로 최고로 완고하고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이다.


진화는 과학적 정설이 아니라 거짓된 가설일 뿐이다. 아데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듯이 아무 실체가 없는데도 끝까지 놓지 않는 신념이다. 진화론에 맞추어서 이 땅을 자기 기분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결론은 허무라는 두 글자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생령으로 창조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고 따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또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도 인간 창조 전에 조성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실체가 그와 항상 동행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동산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잊지 말라는 선악과 금령을 구태여 주실 이유도 필요도 없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이 종종 당신의 음성을 직접 들려준 것은 사실일지라도 아담에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아담은 자기 사고력을 동원해서 그분을 만났다. 이 풍성한 과일 나무들이 과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자기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진지하게 따지고 따졌더니 하나님의 실존하심과 동산의 주인 되심과 이 땅을 통치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요컨대 최초 인간들도 에덴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또 타락한 후의 인간들에게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가까운 데에 계시는 하나님을 언제든 더듬어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라.


따라서 지금도 불신자들이 정말로 성경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잘 살피며 읽어보면 예수가 구세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읽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처럼 얄팍한 과학지식을 접목시키라는 뜻이 아니다. 정말로 예수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따져보라는 것이다.


쉬운 방법으로 인류 역사의 최고로 위대했던 위인, 성자, 영웅들을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자리에 대입해 보라. 단 한 명도 예수님을 대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 중증 환자를 치유하는 일 등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어떤 인간에게도 불가능하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고,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서 그대로 완전히 성취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선택할 일은 두 가지 뿐이다. 성경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든지, 아니면 예수는 이 땅에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러 직접 오신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든지 둘이다.


인간이 정말로 자신의 뿌리를 진지하게 추적하면 창조주를 대면할 수밖에 없듯이, 성경 말씀을 따져가다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순전한 지정의 사고활동만으로도 예수의 예수됨을 시인할 수 있다. 여기까진 기독교 교리를 납득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았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생기를 직접 부어넣으신 분으로 다시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려 오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 그분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만나야 하고 그런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이전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뒤집어진다.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만 따르기로 하는 일대 전환이 이루진다.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과 직접 동행할 때에는 그 인생이 뒤집어지지 않았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지 50일, 승천하신지 10일 후에서야, 그것도 코에 생기가 다시 부어지자 옛사람이 산산조각 부셔지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심오하고 경건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수님 그분 때문에, 그분이 부어주시는 생기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스승의 삶을 본으로 삼는 것은 이차적 과제였다. 예수님 그분을 자신의 완전한 주인으로 모셨다. 기독교 교리로 세상의 죄악과 핍박을 이겨낸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생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로 실제로 예수님과 손을 잡고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데네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파했는가? “예수와 몸의 부활”(행17:18)이었지 않는가?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않았다.(30절) 그러나 이제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믿을만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니 이젠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이다.(31절) 십자가 이후로는 예수를 구주로 모시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겁쟁이 기드온처럼 징조라도 구하라.


지금 불신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께로 온 영을 이미 받았다. 그분의 실존 여부는 물론 그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그분을 직접 보지 못했고 나 또한 그렇지만 그분이 이 땅을 거룩하게 주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거기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릴 수 있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다. 그분의 영광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너무나 큰 축복, 특권, 은혜를 받았다. 몸의 부활도 이미 소지하고 있다. 얼마든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찬양을 부르면서 세상 죄악과 자기 생명을 걸고 맞서 싸울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져도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가까이 계신다.


신자는 단순히 생령으로 회복된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이미 탈바꿈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남아서 더듬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예수님 그분이 항상 함께 하시지 않는가? 대체 무엇을 더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정말로 진지하게 묵상하며 다시 읽어보라. 순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해보라. 성경을 부인하지 않는 한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또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적으로 영원한 진리이자 사실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또 그 약속이 먼 미래에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 이 형편의, 바로 나에게 신비하고 오묘한 방식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는가?


혹시라도 세상에 자꾸 미혹되고 내 체질이 약해짐을 느끼는가? 그럼 겁쟁이 기드온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징조라도 보여 달라고 간구해보라. 최소한 마음의 평강이라도 달라고 외쳐보라. 절대로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는다. 반드시 하늘의 평강과 안식이 임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벌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와 몸의 부활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지 못한다면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다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증거가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지금 코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겐 웃기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는 다시 생령으로 회복되었다.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에게 임재하여 나를 떠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 신자의 호흡은 성령의 호흡이다.


그래서 성경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고 하는 것이다.(시150) 신자가 호흡을 할 수 있는 동안,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그분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진지하게 따져 보라. 성령의 기도와 성경의 묵상의 통해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얼마나 엄청난 축복이자, 은혜이자, 특권인지를...


5/2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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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 조회 수 414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 마28:11-15)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http://youtu.be/EIg462NOoq4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 마28:1-10)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http://youtu.be/9s-lOXKEru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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