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창세기 1:1이 갖는 근본 의미

히브리 성경에서 창세기의 이름은 ‘베뤠쉬트’다. 책의 첫 글자를 제목으로 삼는 유대 관습에 따른 것으로 ‘태초’라는 뜻이다. 이를 헬라어로는 ‘시작’, ‘기원’이라는 뜻을 가진 ‘게네쉬오스’로 번역했고 거기서 영어 제목 ‘Genesis’가 나왔다.

창세기는 그래서 우주, 인류, 가정, 언어, 민족, 문명 등 모든 인간사의 기원을 밝혀 놓은 책이다. 책의 첫 구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모든 시작의 행동주체가 인간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함이었다면 각각 당신의 뜻과 계획이 사전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런 뜻과 계획을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은 인간뿐이다. 따라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고 언약을 맺게 된 계기와 과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책이다. 또 성경의 모든 구절은 마지막 요한계시록 22:21까지 창세기의 언약을 계승, 확장, 발전, 성취, 평가하는 내용이다.  

요컨대 창세기 1:1을 수용하고 확신하는 바탕에서만 성경 전체의 기록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1:1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나머지 모든 기록도 의심쩍을 수밖에 없고 사실은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니다. 간혹 이 간단한 원리도 몰라 본말이 전도된 사람들이 있다.

당장 창세기 1장만 봐도 그렇다. 맨 첫날 빛을 창조하여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했다.(5절) 그러나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은 넷째 날에 창조한 것처럼 보인다.(14-19절) 이는 상호 상충되니까 초반의 3일은 논리적 과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여긴다. 창조 기록 전체에 모순이 있으니 창조 자체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비유하자면 3차 방정식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니 그 셈본의 출발인 99셈도 틀렸다고 말하는 셈이다. 첫째 날과 넷째 날의 빛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 신학적으로 타당한 변증이 가능하다. 그 이전에 창조 기사는 과학 논문이나 동영상으로 찍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목적과 과정과 의미에 주목하여 이해하면 충분하다.

반대로 성경의 후반부, 특별히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12장 이후는 그대로 잘 믿는다. 대신에 그 앞의 11장까지는 전설이나 허구로만 간주한다. 이 또한 비유컨대 역으로 3차 방정식은 이해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막상 99셈은 풀지 못하는 꼴이다.

이해하기 쉽게 창세기 1:1을 가장 간단한 99셈에 비유했다. 그러나 사실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고 걸어야만 하는 절대적 진리다. 성경의 대전제다. 성경의 어떤 난해한 구절도 이 선언, 이 진리에 비추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창조란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신반의하는 자들이 꽤 있다. 아브라함은 임포텐스였고 사라는 경수가 끊겼다. 아버지 어머니 양쪽 다 수태조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았음에도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잉태케 했다. 이 사실은 아무 의심 없이 모두가 잘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마리아가 동정녀라도 수태의 50% 조건을 갖추었기에 잉태케 못할 리는 없지 않는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고 그것을 하나님이 의로 여겼다고 논증했다.(롬4:18-25) 아브라함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 잉태의 가능성을 따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속할 제물로 합당하려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셔야만 했던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창조의 구체적 과정을 따지기 보다는 아브라함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 그분에게 우리 모든 믿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세 번의 ‘바라’

놀랍게도 히브리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만 가진 ‘바라’라는 특정 동사가 있다. 또 신기하게도 그 바라가 창세기 1장에 딱 세 번만 사용되었다.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을 하나님이 만드셔서 배치한 것이 세 가지 있다는 뜻이다.

먼저 창세기 1:1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를 ‘바라’로 표현했다. 천지는 하늘과 땅이다. 그 땅이 혼돈과 공허하다고 했는데(2절) 우리말 번역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 마치 큰 혼란과 무질서가 있는 chaos 상태라는 어감을 풍긴다.

영어 번역이 정확한데 먼저 혼돈은 아무 형체가 없다(without form)는 뜻이다. 형체를 갖춘 어떤 물체도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공허는 그냥 물리적으로 텅 빈 상태(empty)를 말한다.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무에서 창조해 이 세상에 존재케 한 것은 물질 즉, 무생물이었다.    

둘째로 새롭게 생긴 것은 물고기 새 같은 동물이다.(21절) 기존의 물질을 사용하여 형체를 빚고 그 속에 생명을 부여했다. 생명은 성장과 쇠퇴를 한다. 모든 동식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 물질로만 이뤄진 바위나 흙과 달리 성장해야 하는 생명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해, 공기, 물, 식량 같은 에너지 공급원도 하나님이 창조 주관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입히고 먹이는 들풀이 인간 솔로몬이 이룩한 어떤 영광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귀하다는 것이다.(마6;29.30)

마지막 세 번째로 바라라는 단어가 사용 된 곳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구절이다.(27절)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생기기 전에는 이 땅에 없었고 사람을 통해 처음 나타났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다. 또 시작과 끝이 없는 유일한 존재다. 외부의 에너지 공급원이 전혀 필요 없다. 비가시적, 영적, 무한자이자 절대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그런 특성을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겐 물질에 생명이 덧입혀진 새나 물고기와는 달리 제 3의 구성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드러났다는 뜻도 아니다. 동물을 포함해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롬1:20) 인간에게만 볼 수 있는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인간 고유의 특성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한 영혼이다.

과학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103개의 원소로 구성되어서 기체 고체 액체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 동식물은 그것에 생명만 추가된 것이다. 인간만이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덧붙여졌다. 그래서 바로 이 세 번째 ‘바라’는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된다.    

불신자들은 세상은 물질과 생명으로만 이뤄졌고 인간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물질이 장구한 세월을 거쳐 스스로 유기물을 합성하여 생명의 씨앗을 발아(發芽)시켰다. 그 씨앗이 오랜 시간이 흐르자 단세포 아메바로 발전했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에 우연에 우연이 보태졌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돌연변이 같은 비약에 비약을 거쳐 인간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 구체적 과정에 포함된 우연과 비약은 창세기 1, 2장의 기록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모순과 상충이 심하고 많다. 그럼에도 진화가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우긴다.

그들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이라곤 눈을 닦고 보아도 없다. 절대자는 연약하고 나태하며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들의 공상의 산물로 치부한다. 이 땅에는 물질과 생명뿐이다.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자기 인생도 끝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미와 가치는 물질계 내에서 그 육신적 생명을 어떻게 오래 풍성하고 화려하고 신나게 꾸려가는 데서만 찾는다.

신자와 불신자의 근본적 차이

성경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빼면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을 물질과 생명과 전혀 별개로 취급하고 있다. 그 전에 없었던 상태에서 인간을 새롭게 만드셨다고 하지 않는가? 이미 있는 동물에 추가로 손질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동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물의 우두머리이자 최고로 진화된 준재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 땅에 실존하는 의미와 가치는 오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특별히 영을 부여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간단한 진리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심각한 내용을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 창조가 사실임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확보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믿고 그대로 따르고 있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믿기 전과 정반대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정확하게 발견한 것이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갈 방향과 소망과 목적을 확고하게 정립한 것이다. 또 그 정립한 대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드디어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물질에 생명만 입혀진 동물 같은 존재라고 다들 스스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당사자끼리 좋아서 한 일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번식과 쾌락만 추구하는 동물에게 간통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과 같다. 순전하고 아름답고 진실하며 헌신된 사랑이 절실하긴 해도 구태여 힘들게 추구할 필요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에게 최고로 중요한 덕목은 인권과 자유와 평등뿐이다. 인간 사회의 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것들을 최대로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성적 자유라고 한국 사회의 대다수가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신자는 절대로 자기 인생이 물질과 생명의 테두리 안에서만 영위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게 된 자다. 그러는 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도 없다고 철저히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동물 중에 가장 고급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토록 그분에 의해 특별하고도 유일하게 창조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그 영광의 길로 지금 하나님이 거룩하게 보호 인도 중임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다.

불신자는 자기 생명을 고급화 시키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니까 동물세계와 같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실정법에 저촉만 안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최고로 쌓은 것이 가장 똑똑한 처사다.

스스로 모순 된 불신자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신자들도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세상에 물질과 생명 외에 영도 있음을 인정한다. 점을 치러 가지 않는가? 토정비결, 사주, 관상 같은 것을 일종의 통계학이다. 그에 비해 신 내린 무당이 훨씬 용하다는 것을 불신자들이 더 잘 안다. 복채도 더 비싸고 한 번에 수천만 원을 지불하며 굿을 한다. 귀신의 점괘를 따른다. 또 조상에게 제사도 지낸다. 조상의 혼백에게 음식을 바치며 그 음덕으로 후손에게 형통 무탈 시켜달라고 빈다.

심지어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있음도 믿는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 모든 종교의 하나님은 동일하나 그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을 가능성마저 일부에선 시인한다. 귀신과 영계의 실존도 인정한다. 끝까지 수용하지 않는 오직 하나가 있다. 바로 인간은 영적 존재로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겼다는 점은 죽어도 시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를 보면 된다. 점쟁이에게 오직 이 땅에서의 자기의 출세와 형통하는 법만 묻는다. 일류대학에 입하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사업이 형통하려면, 좋은 집에 시집 장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등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한 신의 뜻과 계획을 묻지 않는다. 장래 운명의 길흉사만 궁금하다. 미리 가르쳐 주면 자기 힘으로 알아서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귀신을 두려워하다 못해 좋아하고 그대로 따른다. 돈까지 갖다 바치며 그런다. 한마디로 귀신은 좋아하고 하나님은 싫어한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마귀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세상은 물질과 생명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진화론을 믿는다. 그와 동시에 영적 존재가 있음도 알고 귀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탁한다.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자의식은 동물의 수준에 머물면서 자기 미래는 오히려 귀신에게 맡긴다. 그 영혼 뿐 아니라 지정의마저 완전히 뒤죽박죽되어 있다.

불신자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해서 그 생각, 말, 행동이 기괴하다는 뜻이 아니다. 진리와 등을 진 거짓의 아비를 쫓기 때문에 거짓에 거짓이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거짓 속에 휘둘려 자신 정체성 자체마저 거짓으로 변했다. 완전히 거짓 속에 잠겨 있으니 본인도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 그러니까 설령 무당의 점괘대로 돈 벌고 출세하게 되었어도 여전히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다. 솔로몬이 전도서에 고백한 대로 하나님 없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다. 절대 진리인 하나님을 버리니 자동적으로 절대 거짓에 빠진 탓이다.      

신자 인생의 가장 큰 목적과 기쁨

기독교는 세상의 허다한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다. 완전히 판이하다. 하나님의 이름만 다를 뿐 모든 종교의 하나님이 같다는 것은 절대적인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이다. 세상전부를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은 대변, 상징. 표현, 설명될 수 없다.

창세기 1:1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객관적 교리에 그치지 않는다. 이 말씀 앞에 엎드리는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 발견과 실현을 이젠 이룬 자다. 신자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서 헤매는 구도자가 아니다. 이미 절대적 진리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자다. 예수 십자가 진리로 인해 자유케 된 자다.

하나님을 배제하면, 아니 조금 멀리만 해도 내 인생과 삶이 허망하고 갈급해지고 내 존재 자체도 억눌리고 메말라진다는 것을 철저히 실감한다. 나의 실존이 이 땅에서 절대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육신적 생명이 끝날지라도 물질인 육체만이 그 무덤에서 형체가 없어지고 썩어질 뿐이다. 그 영적 생명인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영생함을 믿는다. 바로 그래서 이 땅에선 절대로 동물 같은 모습으로는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내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세상 앞에 비추어내는 것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요 기쁨이 된 것이다.

신자란 나의 나 된 것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생성하고 성숙시키고 성취하는 자다. 너무 거창하게 따질 것 없다. 내가 태어난 것을 내 선택과 의지와 작정으로 하지 않았고 죽음 또한 그럴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간과정인 이 땅의 인생도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계획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이 장소에서, 이 모습으로, 이 사람들과, 이 여건에 거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아니라 그분의 작정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도 태초부터 완벽하고 아름다운 계획 가운데 포함되었기에 절대로 내 인생에 실패하지 않고 성공으로 끝맺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 그런 앎의 바탕에서 자기 인생을 영위해 나가고 있어야 신자인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아직도 연약하고 불안전한 옛 본성이 남아 있다. 물질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서만 자기를 비교 판단했던 옛 습성을 온전히 못 버려 실망과 좌절에 빠질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창세기 1장의 세 번째 ‘바라’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라는 정체성을 재확인하면 회복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세상 속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 그분에게 내가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신자의 능력이다. 그 능력에 힘입어 반드시 다시 성공하게 된다. 단순히 종교 철학, 사상, 교리를 붙들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과 권능으로 그분이 나의 속을 충만히 채워주신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일은 오직 하나다. 당신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이다. 실패와 고난과 부족한 중에라도, 심지어 죄에 넘어진 모습이라도 당신 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 누릴 수 있다. 기도와 말씀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일대일 대면이 일어난다. 삶의 세밀한 측면에서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한 합력해서 이루시는 선의 열매를 풍성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자는 세상의 어떤 극심한 환난 중에도 감사와 소망과 인내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무당집 같은 교회

문제는 죄송하지만 무당집 찾아가는 정신 상태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장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으려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고 형통하고 출세만 소망한다는 단순한 뜻도 아니다. 점쟁이에게 자기 인생에 대한 신의 뜻이 무엇인지 절대 묻지 않듯이,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소명에 대해 일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내용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의 용서는 미리 다 받았고 천국보험증서를 받아 쥔 것에만 국한한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예수 믿고 나서 할 일이라곤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일을 비는 것뿐이다. 성경을 소유했고 기독교적 용어와 형식만 다를 뿐 무당집을 찾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작금 신자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고귀한 일인지 인식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의롭고 거룩한 존재로 세워졌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실제로 무에서 유가 되었다.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삶은 완전한 무였다. 헛되고 헛되다 못해 사망이었다. 비록 열심히 살고 있어도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물질뿐이었고 아주 잘 봐주어야 동물적 생명이었다. 실제로 “개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것이 모든 불신자의 인생 모토이지 않는가?

예수 믿은 후는 완전히 다르다. 영의 생명이 살아났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고 증거하는 그분의 왕 같은 족속 제사장 백성이 되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인생의 온전한 의미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완전하고 절대적 실패였으나 예수 믿은 후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공에 들어섰다. 뜨겁게 잘 믿어서 하나님이 성공으로 이끌어준 것이 아니다. 그분께 진정으로 자신의 전부를 겸손히 내어드리는 순간 그분의 절대 성공으로 이미 옮겨진 것이다.  

지금도 귀신은 좋은데 하나님은 싫어서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돈을 바쳐 가며 따르는 자를 보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가? 계속 그러다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니 너무나 측은하지 않는가? 그 삶도 뒤죽박죽 된 지정의에 의거하니까 너무나 갈급하고 허망해진 모습이 그대로 보이지 않는가? 반면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일방적으로 부어지고 난 후에 점쟁이와 무당은 보기만 해도, 아니 그 이름만 들어도 역겹고 추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지 않는가? 거기다 귀신과 무당들이 평신도에 불과한 신자를 보고 도리어 두려워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자가 항상 자신에게 점검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창세기 1:1이 자신에게 절대적 진리와 생명이 되어서 나를 자유케 하고 있는지 여부다. 그래서 그 바탕 위에 실제로 살고 있는지 여부다. 이 또한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 없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내 삶과 인생이 완전히 쏟아진 물이나, 산산 조각 난 유리잔 같이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럴 때에 정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반드시 회복되고 성공으로 끝나리라 확신하는지 여부다. 만약에 그런 확신 대신에 의심 불안이 든다면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계획보다 내 자신의 정욕과 기분에 따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는 반증임을 깨달아야 한다.

3/8/2015

Sophia

2015.03.19 07:23:16
*.114.22.149

목사님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망가진 영적 요소들을 회복하기 위하여 삶에서 결신하는 삶을 살아내고자 갈망합니다.
옛 사람의 본성에 따라 자아가 시키는 대로 행했던 죄가 저를 주장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귀한 말씀 퍼갑니다..샬롬!

운영자

2015.03.19 22:24:14
*.63.152.149

Sophia 님
부족한 종의 글들을 주위에 열심히 나눠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는 일에 서로 최선을 다하는 동역과
성령안에서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어지길 소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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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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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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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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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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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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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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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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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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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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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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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 마28:11-15)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http://youtu.be/EIg462NOoq4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 마28:1-10)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http://youtu.be/9s-lOXKEru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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