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審判) 보좌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190)



http://www.youtube.com/watch?v=f1nVgh_OMMY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7-29)


베드로의 너무나 중요한 질문  

어려서부터 계명을 성실히 지킨 부자 관원이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예수님께 찾아왔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잘 지켰다고 자부했던 자다. 예수님이 그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자, 재산이 많은 그는 근심하고 돌아갔다. 그러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사실상 확률이 거의 제로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성질 급하고 순진한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예수님께 질문했다. 재산을 지키려고 돌아간 그 관원과 자기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질문이 예수님을 위해 충성을 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을 달라는 이기적 욕심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

영생의 길을 물은 관원에게 예수님은 답 둘을 제시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당신을 좇으라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 두 조건을 다 충족했다고 자부했다(27절).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하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정말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었는지 조금 불안해졌던 것이다. 영생을 얻었는지 다시 확실하게 다짐 받으려는 뜻이었고 그에 맞추어 예수님도 29절 말미에 “영생을 상속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도 구원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 자기들 구원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럼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거나, 최소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믿었다는 뜻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엄청난 대답  

그에 상응하여 예수님도 인간 랍비라면 도무지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여야만 할 수 있는 대답을 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될 때는 바로 마지막 심판의 때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그 때에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인자는 예수님 당신으로 그 때에는 구세주가 아니라 심판주로 재림하여 심판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아니 상상조차 못하는 말이다.

역으로 이렇게 가정해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영생의 길이 궁금해지면 대제사장을 찾아가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럼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장로의 유전을 범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답할 것이다. 베드로는 다 지켰다고 할 것이며 대제사장은 그럼 구원을 얻을 테니 돌아가라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또 부자 관원처럼 “제가 어려서부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도 잘 지켰지만 도무지 제 마음에는 평강이 없고 갈급하기만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다그칠 것이다. 대제사장은 다시 “나로선 더 해줄 말이 없네.”라고 답할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당신 외에 이 문제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자가 유대 땅에 누가 있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최고 영적 지도자 아닙니까? 당신이 사역하는 동안에 깨달은 진리라도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조를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네처럼 끈질긴 자는 처음 보네. 솔직히 고백하건대 대제사장 체면이 있어서 아무 말을 안 했지만 나도 갈급하기는 자네와 마찬가지네. 자꾸 이러면 피차 곤란해지니 제발 그냥 돌아가게. 그리고 지금 내가 한 이 말은 남들에겐 절대로 비밀로 부쳐주게.”라고 도리어 사정할 것이다. 아무리 추정해도 인간끼리 구원을 논하면 이런 가능성 밖에 없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또 대제사장조차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당신을 좇으라는 말을 들었다. 예수님이 제시한 구원의 길은 사실은 그리스도인 당신을 좇는 것인데도 그 관원은 재산을 다 팔라는 말에만 온통 정신이 쏠렸다. 도무지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을 좇는 일에는 아예 생각조차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어마어마한 약속을 붙들고 있는가?

반면에 베드로는 처자식과 생업을 뒷전에 두고 예수님을 좇은 지 삼 년이나 되었다. 유대 지도층들의 멸시와 비방을 감수하며 함께 고생했다. 그로선 뭔가 그런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티끌만치도 없었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마음까지도 품어 안고서 이 땅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 버린 것의 몇 배로 보상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다. 또 마지막 심판 때에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당신의 사역에 동참할 것이라는 엄청난 보상을 약속했다. 도무지 인간으로선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말씀이다. 만약 부자 관원이 안 돌아가고 이 약속의 말씀까지 들었다면 어쩌면 전 재산을 파는 문제를 다시 고려해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불신자가 성경의 이 구절을 정말로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수 자기가 뭔데? 아니 예수는 그렇다 치고, 예수 믿는 자들이 뭔데 감히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인가? 너희 광신자들끼리 다 해쳐 먹어라!”면서 성경을 내동댕이치지 않겠는가? 정상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부자 관원이나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못 알아보는 어리석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으로선 할 수 없으되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들을 야단치겠는가?

그보다는 이미 예수를 믿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 약속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이 약속을 온전히 실감하는가? 이 약속을 붙들고 살고 있는가? 이 약속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동기와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혹시 예수님을 위해 버리면 이 땅에서도 몇 배 보상해준다는 구절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 극심한 불경기에 시간과 돈을 쪼개고 쪼개서 헌금하고 봉사했는데도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지 하나님께 의심과 불만과 근심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베드로는 버리지도 좇지도 않았다.

문제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 관원에겐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명했지만 베드로에겐 그런 언급이 전혀 없었다. 재산의 소유권은 여전히 그에게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그는 잠시나마 갈릴리로 돌아가 남겨 두었던 배와 그물을 사용해 고기를 잡았다. 거기다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버나움에 있는 장모의 집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본부로 사용하면서 제자들이 모두 기거할 정도로 컸다. 상당한 부자였을 수 있다.  

더 결정적으로는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좇지 않았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스승을 세 번이나, 마지막에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지 않는가? 당장에 자기 목숨이 날아갈 판국이 되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영생 얻는 것이 확실하다는 본문에서의 자부심은 그의 기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던 부자 관원이지만 모든 것을 팔고 거지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 때까지 유대 사회에서 최고였던 의로움이 재물의 위력 앞에 여지없이 누더기처럼 산산조각이 났던 것과 똑 같지 않는가?

물론 베드로는 그 관원과 다른 점은 많았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고, 처자식을 떠났으며, 유대인들의 비방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시중들었고, 자기 집을 예수님을 위해서 내어 놓았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자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자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완전히 발가벗겨 하나님 앞에 세웠을 때는 그나 부자 관원이나 하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왜 베드로는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가? 예수님과 방불할만한 영광을 약속 받았는가? 그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뿐이다. 이외의 다른 대답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그것도 베드로의 철두철미하게 완전한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방적 은혜로 영생은 물론 그런 영광까지  베푸셨다.  

대제사장의 하녀는 어떤 사람인가? 영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자다. 그것도 당시에 인간 취급은커녕 물건처럼 여겨졌던 여자다. 그런 하녀 앞에서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고백을 세 번이나 번복했다. 예수님을 삼 년간이나 따르면서 배우고 보고 믿었던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거품과 안개로 변해버렸다.

이전에 제자들끼리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 다툴 때에는 분명히 자기들이 유대에선 도덕성, 종교성, 영성으로 최고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또 그래서 재산이 많아 근심하고 돌아가는 부자 관원을 보고 속으로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베드로가 본문의 질문을 했다는 자체도 영적으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표식이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하기 직전에도 자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보호하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공수표가 되었다. 기네스북으로 치면 역사적으로 최고 큰 거짓말쟁이로 꼽힐 것이다.  

비로소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베드로를 구원했다.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구원하셨고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보좌에 앉히실 것이다. 주님이 베드로를 편애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질이 급한 만큼 그 마음이 순수함을 아셨기 때문도 아니다.  

그가 비참하게 실패하여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만큼 철두철미 부셔졌을 때에, 비천한 하녀 앞에서조차 고개를 못들 정도로 비겁하고 치사해졌을 바로 그 때에, 베드로는 비로소 자기 모든 것을 정말로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재산, 집, 형제, 부모, 전토 등이  베드로의 멀쩡한 소유로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자기 마음의 보배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이끄는 소망, 목적, 능력이 전혀 되지 못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으니 최소한 영생은 확보했지 않느냐고 다그치듯이 예수님께 물었으나, 사실상 버린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해낼 것 같은 위대한 사람을 만났기에 어떻게 하든 높은 자리 차지해보려 했던, 말하자면 지난 삼 년간 비즈니스 출장한 것뿐이었음도 알게 된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찾으려고 구도자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위만 추구했을 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대제사장의 뜰을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을 때에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완전하게 부패했음을 알게 되었다. 겉모습이 어떠하든 마음과 심령이 누더기처럼 추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자기 심령의 깊숙한 곳, 자신도 모르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영혼의 가장 맨 밑바닥까지 꿰뚫어 아시고 세 번 스승을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예언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그런 경고를 받으면 누구라도 조심할 텐데 너무나 비겁하고도 뻔뻔하게 정확히 세 번을 부인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도 도무지 어찌 해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조금 의로운 사람이라면 두 번째 부인한 후에는 번쩍 정신이 들어서 세 번째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는 “내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다. 나도 스승과 함께 죽을 테니 나를 잡아가라.”고 자청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거꾸로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책망의 빛 하나 비취지 않고 오직 긍휼과 사랑으로 따뜻하게 자신을 품어주는 예수님의 눈길을 보았던 것이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불같이 관통해 나갔던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그를 깨끗케 하여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처음에 예수님이 자기를 불렀을 때 앞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자기를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세워준다는 것으로 오해했었는데, 지금 주님 당신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당신의 피로 자기를 죄와 사탄과 사망에서 건져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앞으로 자기도 주님의 그런 본을 받아 다른 사람을 주께 인도하라는 소명을 주셨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참 뜻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재산, 가족, 집, 전토 등이 아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다. 사실은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다.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라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는 물론 생명까지 전부 버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자 끝이 되어야 비로소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만약 부자 관원이 전 재산을 팔아 나눠주고 예수님을 좇았다 해도 베드로와 똑 같이 그 심령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체험을 통해서만 영생을 주셨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 쉽게 말해 생명까지 버리지 않으면 다 버린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 아닌가?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다른 것 아무리 다 버려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자기를 바치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당신께서 자신의 전부, 생명까지 우리 대신에 대속 제물로 주시고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또 그것만이 인간이 참 인간답게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좇는다는 참 의미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버리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일이다. 부자 관원에게 명하신 전 재산을 팔아 구제하라는 계명도 인간의 99.9%가 준행하지 못할 일인데 자기를 산산조각 다 깨트리는 일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는 말씀과 비유를 하면서(23, 24절), 개역성경에는 제자들을 ‘너희’라고 불렀지만 원어로는 ‘아이들’(children)의 의미를 지녔다. 아주 친근감 넘치게 “얘들아!”라고 부른 셈이다. 어쨌든 처자식과 집을 버리고 함께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주님은 기특했을 것이다. 또 영적으로 아직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모습도 귀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천국이다. 천국에 입성하려면 하나님 앞에 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그런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했다. 예수님은 벌써부터 열두 제자를 천국에 입성한 자로, 또 천국에서 큰 자로, 나아가 장차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자로 대우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아직도 교만에 가득 차서 무엇을 보상 받을 수 있는지 질문하기도 전부터 그를 어린이처럼 낮아진 자 즉, 천국시민이라고 불러준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제자로 삼아주셨다. 특별히 자신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인간적 기준으로는 당신을 세 번 부인하는 가장 치사하고 비겁한 짓을 했음에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위치로 올려주셨다.

결국 예수님이 그를 처참하게 실패하게 만들어서, 최고로 낮아지게 해서 구원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베드로 본인으로선 하나님의 그런 은혜는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하고 아름다운 은혜는 그런 비참한 실패 뒤에 오히려 가장 크고도 풍성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구원 받은 구체적인 과정은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결 같이 베드로처럼 처참한 실패를 통해서 구원 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 실패는 물론 현실적 실패가 아니라 영적인 깨어짐이다. 아니 사실은 십 중  팔구는 현실적 실패를 통해서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 실패를 통해서만 영적으로 정신 차리는 법이지, 스스로 영적인 고뇌를 통해 깨어져서 제 발로 하나님을 찾을 만큼 결코 신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이 많아야 근심이 적어지는 줄로 믿고서 오직 일확천금할 꿈만 쫓고 있었다.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으로 간음했었고, 형제는 물론 부모마저 생각으로 말로 살인을 밥 먹듯이  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눈치도 못 채고 있는 중에,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완전한 영적 실패를 맛보게 했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트리셨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로 그 때에 한 줄기 예수님의 참 생명의 빛을 비춰주신 것이다.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 영혼이 하늘의 소망과 기쁨을 찾도록 해주셨다. 집, 가족, 전토 같은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긴 해도, 영원한 가치는 없음을 비로소 알게 해주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는 세상의 어떤 것도 안개요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주님이 새롭게 바꾸어서 내 삶과 인생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케 채워주셨다.    

예수님의 본문의 약속을 먼 장래의 일로 치부하여 건성으로 읽어선 절대 안 된다. 영적인 차원의 일은 잘 알 수 없으니, 그저 착하게 살면서 교회 일에 성실하면 큰 복은 몰라도 최소한 악한 일은 막아주시겠거니 기대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특별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역은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다. 본문의 약속에서 신자가 아무런 힘도 얻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예수 믿는 신자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불신자들과 오십 보 백 보일 뿐이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최고로 치사한 거짓말쟁이로 등재 된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할 만큼 가장 의리 있는 남자로 예수님이 갱신시킨 것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모세와 엘리야와 지금 천국에서 똑 같은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또 그게 사실이라면 본문에서 열두 제자들을 장차 심판의 보좌에 앉히고 예수님의 새 왕국의 통치에 참여시킬 것도 분명히 사실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동일하게 철저한 영적 실패를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도 즉, 어찌 내 같은 죽어 마땅한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한 우리도 장차 베드로와 동일한 영광의 자리에 앉혀 주실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실패와 고난과 상처와 억울함과 질병마저도 그 영광의 보좌를 향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중도여정임도 분명한 사실이지 않는가?

예수님의 동일한 요청과 약속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제자들과 동일한 요청과 동일한 약속을 하고 계신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으면 천국에 입성시킬 것이고 천국에서 큰 자의 자리에 세워주신다고 말이다.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실감을 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를 아이라고 부르고 계시고 또 그렇게 대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참 생명의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 붙어있는 것뿐이다. 단순히 교회생활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고난과 상처와 억울한 일들이 장래의 천국 영광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어떤 실패와 고난을 겪어도 그 뒤에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하고 풍성한 은혜가 숨겨져 있기에 그것을 발견해 누리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단순히 기독교적인 의식과 교리를 준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는 물론이고, 아무리 위대하고 의로운 도덕과 종교라도 우리에게 결코 평강과 안식을 줄 수 없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또 확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런 확신의 바탕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거룩한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우리 속에 보배로 모시고 있기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출발이자 핵심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불신자는 부자 관원처럼 자기 밖의 것들이 풍요롭게 되어야만 자기에게 평강이 생길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다. 또 조금 의로운 불신자라면 자기 밖의 것을 완전히 버려야 자기에게 평강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 자다.

신자는 그렇지 않다. 자기부터 먼저 완전히 깨트려 버리지 않으면 절대 평강이 생기지 않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절감한 자다. 또 그렇게 깨트린 심령 안에 예수님의 참 생명이 충만하게 채워질 때에, 아니 그분이 당연히 채워주시기에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평강과 안식을 누리며 사는 자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재산을 다 팔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했고 또 바로 그것이 보상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10/20/2013

사라의 웃음

2013.10.21 23:31:41
*.109.85.156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셨을 때, 인간의 의지로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떠나고, 자신을 깨뜨리고...그런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베드로의 철없는 순진함, 아니 어리석은 질문에도 예수님께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심은, 현재 베드로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쳐가실 것이고 가르치실 것이고 깨닫기까지 도우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임을 배웁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니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 또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 재산을 버렸다고, 가족을 떠났다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그 베드로의 처절한 실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사랑이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음이 정말 신비로운 역설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여전히 어리석기 짝이없는 우리이지만 하나님께서 붙잡아 인도하여 주시는 구원이기에 지금도 또 여전히 그 손으로 꼭 잡으시며 한 발자욱씩 걸어가도록 도우시기에 평안할 수 있음이 보상임을 배우며 귀한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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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질투하고 있는가?(출애굽기강해#63-출34:29-35) [1]

(출34:29-35) 하나님을 질투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63)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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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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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돌아온 탕자 시리즈 (1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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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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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4)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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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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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를 희망고문하는 목사(민수기강해#22-민14:39-45)

(민14:39-45) 신자를 희망고문하는 목회자 구약성경강해 (32) / 민수기강해 (22)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12)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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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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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 상복(喪服)을 입는 신자들(레위기강해#10-레24:10-16) [1]

(레24:10-16) 주일예배에 상복(喪服)을 입는 신자들 구약성경강해(10) / 레위기강해(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그 이스라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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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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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7)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8)

(고전 13:1-7)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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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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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역하는 게을러빠진 신자들(민수기강해#21-민14:39-45)

(민14:39-45) 그래도 거역하는 개을러빠진 신자들 구약성경강해 (31) / 민수기강해 (21)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11)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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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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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는 교회에 무엇을 기대하는가?(행3:1-15) [1]

November 19, 2017 Morning Sermon from Kirby Woods Baptist Church on Vimeo. Vinson 목사님께서는 사도행전 3장 말씀을 “What Memphis and Shelby County has a right to expect from Kirby Woods” 주제를 통해 전해주셨습니다. 멤피스와 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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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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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에 부자가 설 자리는 없다.(민수기강해#42-민26:52-56)

(민26:52-56) 하나님의 일에 부자가 설 자리는 없다. 구약성경강해 (52) / 민수기강해 (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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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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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요나서 강해 (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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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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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는가?(민수기강해#2-민3;11-16) [1]

(민3:11-16)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는가? 구약성경강해(12)/민수기강해(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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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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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5-14)신자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구원-구원 얻는 믿음(9)

(빌2:5-14) 신자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구원 구원 얻는 믿음 (9)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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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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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도 신자를 대적하지 못한다면?(민수기강해#38-민23:18-24)

(민23:18-24) 사탄도 신자를 대적하지 못한다면? 구약성경강해 (48) / 민수기강해 (38)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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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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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4-7)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9)

(고전13:4-7) 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9)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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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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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1]

(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요나서 강해 (7)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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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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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9:28-30)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 -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8)

(요19:28-30)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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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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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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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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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심판으로 밀어 넣는 신자들(레위기강해#8-레19:17,18)

(레 19:17,18) 이웃을 심판으로 밀어 넣지 말라. 구약성경강해(8) / 레위기강해(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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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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