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1:6-14)

 

하늘에서 비췬 한 줄기 빛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한 유대인 엘리멜렉의 가정의 아버지와 두 아들 남자 셋이 여호와께 벌을 받아 짧은 기간 안에 다 죽었습니다. 그 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 세 여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고대에서 과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약하고 비참한 신분이었습니다.

 

특별히 나오미는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여섯 가지 불행의 조건을 가진 성경에서 최고로 불쌍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나락에 빠트려진 것입니다. 그곳에 엎드려 머물러 있으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고 깊은 바닥에 떨어졌으면 이제 남은 것은 올라갈 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이 다 막혀서 앞이 전혀 안 보이는 흑암에 처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종에게 어렴풋이나마 하늘에서 한줄기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 빛을 보고 붙드는 자에게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며 그 빛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찾을 생각이 없는 자는 평생을 가도 그 흑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여인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흉년이 끝나는 현실적 복을 주셨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뒤늦게 십년 째 되는 해에 비로소 들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흉년이 끝났는지 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남편과 아들들에게 벌을 주셨다면 불공평하고 독선적인 폭군 하나님이 됩니다.

 

고향에 기근은 벌써 끝났고 남편도 먼저 죽었지만 나오미로선 아들과 함께 살아야지 혼자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본문 6절은 흉년이 끝난 년도를 밝히려는 의미라기보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6절)고 말합니다. 단순히 흉년이 끝났다고 하지 않고 양식울 주셨다고 합니다. 흉년으로 겪은 지난 피해를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풍년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남아있던 두 아들마저 죽고 나자 고향 형편을 알아봤더니 곡식이 남아돌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여자들끼리 돌아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약삭빠르게 현실적으로 살아갈 궁리부터 도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호구지책만 챙기려면 오히려 모압 지방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손 쉬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타향살이지만 십년이면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두 아들이 살아 있었으니까 어떤 일이든 생업을 꾸려나갔을 것입니다. 성경기록을 살펴보면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현지에 남아 재혼을 해도 함께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더 큰 고통

 

거기다 나오미로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미국으로 이민 온 부자 가정이 완전히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꼴입니다.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거류하려고 이사했으나 십년 세월 동안에 현지 며느리를 둘이나 보았으면 이민이나 다름 없습니다. 초창기 미국이민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잘 살고 자원과 기회가 풍부한 미국에서 소위 American Dream을 실현하려 온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정과 경위가 일치하지 않지만 어쨌든 엘리멜렉 가정도 궁핍을 면하려고 이주했다는 차원에선 동일합니다.

 

한국에 남은 친척과 친지들이 아들 둘도 결혼시키고 그런대로 자리 잡아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과 아들 둘 다 죽고 늙은 과부가 되어서 미국여자 며느리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저 같으면 도무지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 땅에 남아서 막 노동이라도 하든지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정부가 운영하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연명할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미가 유대 땅으로 돌아갔을 때에 온 성읍이 떠들썩할 정도로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19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대로 사람은 본성적으로 남이 잘 되는 꼴을 시기하는 대신에 잘 안 되면 고소해 합니다. 상당한 유력자 집안이 보란 듯이 외국에 살려고 갔다가 남자는 다 죽고 완전히 거지꼴이 된 늙은 과부가 자기들 대적인 모압 여인 며느리 한 사람 데리고 쓸쓸히 돌아왔습니다. 진정으로 염려해 주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해도 속으로는 고소해 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에는 부인을 잘 얻어야 남편이 출세 형통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는 부인은 칭송을 받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재수 없거나 신의 저주를 받은 여자로 멸시 박대했습니다. 단순 노동을 주로 하던 시대인지라 아들자식이 많으면 아무래도 재산을 늘릴 수 있습니다. 시편 127, 128편이 자식이 많은 것을 여호와의 상급이라고 찬양하듯이 유대인들도 동일한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두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남편과 두 아들 모두 먼저 죽게 해서 집안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죄인 취급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쫄딱 망해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천하의 죄인이라는 멍에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정신적 종교적으로 당할 수치와 비방은 현실적 고달픔보다 훨씬 더 큰 상처와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에 인터넷 댓글로 상처 받아 자살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 않습니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쓴 뒷 담화에도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도집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으로부터 뒷 담화를 듣게 되면 수가 성의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여인처럼 사람들로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격리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했다면 그 계기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나오미의 참회

 

그 해답은 13절의 두 자부에게 행한 고백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자기 가정에 일어난 모든 불행이 하나님의 형벌이었다는 것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에 와서 살았기 때문인 줄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땅에 더 이상 남아 있다간 자신과 함께 두 자부까지도 징계 받을 수 있다는 염려가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나오미와 두 자부들이 이 사태의 직접적인 죄인은 아닙니다. 남자들만 먼저 심판한 것도 당시에는 모든 의사 결정을 남자가 내렸고 여자는 아예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흉년을 피해 왔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나오미로선 남편에게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지 않았고, 아들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할 때도 끝까지 말리지 못했던 잘못은 분명히 있습니다. 남편과 아들 둘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도 간접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두 아들까지 잃은 그녀의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편 죽었을 때보다 하늘이 더 크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마지막 남은 자기 생명마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육신이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도 죽어서 남편과 아들 곁으로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를 더 강하게 붙든 생각은 하나님께 심판받는 식으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복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어떤 모멸과 천대를 받아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고향 땅에 양식이 풍족해졌다고 하니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그런 마음 상태를 본문 표현이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돌아오려고’라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가 1장에서만 열 번 넘게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장소를 옮긴다는 뜻도 있지만 영적으로 갱신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호세아서에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이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했습니다.(호3:5,6:1,7:10) 성경이 이 단어를 반복해서 많이 사용한 것은 분명히 나오미의 몸만 고국으로 역이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도 우상의 그늘에서 여호와의 품으로 역이민했다는 의미를 드러낸 것입니다.

 

두 며느리의 입장

 

그런데 주목할 사항은 나오미가 처음에는 두 며느리를 대동하고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7절b) 도중에 너희들은 너희 고국 땅에 남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녀들이 함께 떠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고대에는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 가문에 완전히 속하게 됩니다. 단순히 문화와 언어와 관습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신분을 결정짓는 국적과 종교부터 바뀝니다. 나오미로선 두 자부도 유대인의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유대인 신분이 되었으니 당연히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나중에 계대결혼 관습을 이야기해주는 이유도 그들을 유대인 취급했다는 반증입니다. 두 자부들도 진심으로 시모를 사랑했기에 기꺼이 따라나섰고 헤어진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길을 가다가 문득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방 며느리들은 이스라엘로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어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인 자기 가족을 진실한 사랑으로 섬긴 것을 하나님이 아시니까 어디에 있어도 그들을 징계하지 않고 복을 주시리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고국에 남으라고 권하면서 바로 그런 뜻으로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8절b)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 바란다는 것도 모압에 남더라도 그 동안에 나름대로 여호와에 대해 알게 된 믿음을 놓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오미는 자부들의 의사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형편만 생각한 것이나, 그전에 그녀들도 당연히 함께 가야한다고 여긴 것부터 자기 잘못이라고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남편의 의사에 아무 반대 의견을 달지 않아서 이런 비극을 당했는데 자기도 두 자부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는다면 남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셈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모압 여자가 그것도 남편들을 죽인 재수 없는 과부가 유대사회에선 도무지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당하는 수모보다 더 큰 멸시와 모멸을 당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런 수모는 자기 혼자 당하면 되지 며느리들에게 강요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과부가 된 아직 젊은 두 여인이 같은 과부인 늙은 시어머니를 부양하게 하는 것도 믿음을 떠나 인간적 양심으로도 도저히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향에 남아야 할 수밖에 없는 근거로 유대인 신분이 된 그녀들에게 적용될 계대결혼(신25:5-10)에 대해서 설명해준 것입니다. 유대 여인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와 결혼해서 그 가문의 기업과 이름을 이어나가야만 합니다. 장남이 죽으면 그 아내는 차남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두 아들이 다 죽은데다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

 

그럼 나오미가 집안의 남편의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척과 재혼해서 셋째 넷째의 아들을 낳아야만 두 며느리의 남편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 본인부터 이미 늙어서 재혼도 힘들고 설령 재혼해서 두 아들을 낳아도 커서 결혼하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도무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방안입니다.

 

마지막 방안은 두 며느리가 엘리멜렉의 집안 밖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선 율법을 범하는 일인데다 현실적으로 이방 여인 과부랑 결혼하겠다고 선뜻 나설 유대인 남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라오면 도무지 전망이 안 보이니까 고향에 남아서 모압 남자와 재혼해 새 인생을 시작해 행복하게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두 자부 중에 오르바는 그 권면대로 남았고 룻은 끝내 시어머니를 따랐습니다. 고대의 과부라는 신분과 처지를 생각하면 오르바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룻은 현실적으로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을 각오하는 대신에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14절) ‘붙좇다’는 히브리어 다브카는 단순히 친밀하게 따르는 것을 넘어서 전인격적으로 상대와 연합된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의 모든 것을 본받고 그대로 따르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룻은 나오미라는 인물과 그녀를 통해 알게 된 여호와가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이 세 여인의 이별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녀들끼리도 서로 끌어안고 울었지만 제 삼자가 봐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큰 고난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서로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이 아주 좋은 관계로 이어왔어도 갑자기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욥의 자녀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극적 참극과 필연적 상황이 불시에 닥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이별도 겪습니다.

 

오르바와 나오미는 흔히 하는 말로 서로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개인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더 귀한 의미 때문에 정확히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심판과, 이스라엘에 곡식이 많아진 것과, 그 소식을 듣고 이런 일련의 안타까운 이별과 동행이 일어난 것 모두의 배경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동한 것입니다.

 

나오미의 믿음

 

나오미는 성경에서 최고로 불행한 여인이 되어버렸을 때에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철저한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시대적 현실적 상황이 그랬기에 신앙마저 남편과 아들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아마도 이방 땅의 풍습에 물들어 여호와를 거의 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긴 채로 일대일로 엎드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절망에 빠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비춰주는 한 줄기 빛입니다. 현실적으로 큰 고난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그분의 오묘한 은혜와 권능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그녀더러 당신과 일대일로 교제하자고 부르신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부름에 응해 다시는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전혀 모르고 앞이 깜깜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여호와께 완전히 의탁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나오미의 믿음의 차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는 당신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게끔 세상에 오직 그 자녀 한 명만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서 만나주십니다. 그럼 신자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필연적인 반응은 하나님 그분 앞에 철두철미 겸손해져서 온전히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실제로 하나님과 인격적 개인적 관계를 맺고서 교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모든 인생사를, 당연히 나오미가 당한 것 같은 비극을 포함해서 기존의 문화 전통 관습 도덕 율법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의 관점에서 좀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분별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는 생기는 믿음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철저히 낮아지며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포용하고 용서하고 나아가 참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곧바로 완벽하게 의로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오미도 처음에는 자부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중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걸어가는 동안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난 세월을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자신의 실패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완전히 낮추고 며느리들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안을 권하면서 여호와가 선하게 인도해주고 그 신앙을 지키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축복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대면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도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죄 중에 있음에도 용서 하여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외모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면 사람들 앞에도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일대일의 영적관계는 다른 사람이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삶의 변화된 모습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혼자 있을 때의 행동도 제삼자는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 관계로 그 믿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져야만 믿음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그 전의 아브라함 야곱 모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인생의 쓴맛 단맛을 많이 겪은 후에야 또 겪은 만큼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약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고 난 후에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처음 믿을 때에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면서 철저히 낮아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럼에도 수시로 이전 본성이 올라오기 때문에 수시로 스스로 실패의 쓴 맛을 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다시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이 매운 손길로 쳐서 되돌려 놓습니다. 성화의 과정은 길고도 긴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말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

 

저도 감히 말씀드리건대 나이 70줄에 들어서니까 이제야 겨우 하나님과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조금 눈이 뜨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이 자기 잘못이나 절대적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나면 이미 늦었거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습니다. 바로 제 심정이 그러합니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이며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뿐임을 갈수록 깊이 절감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자꾸만 더 절망적이 되어갑니다. 작금 믿음이 없는 사람마저도 종말이 다가왔다고 걱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세상은 성경의 예언대로 되어갑니다. 성경적 역사관은 하나님이 창조한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완성시킬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종말을 감지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거역 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선 어쩔 수 없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성령이 은혜를 주기 전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엡2:3-5) 신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풍성한 긍휼을 다른 이에게 부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영적으로 우월해서 신자가 된 양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부 신자들이 코로나 사태를 두고도 백신이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적그리스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음흉하고도 거대한 음모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는 확실한 근거와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면서 백신을 맞는 신자를 믿음이 약한 양 취급합니다. 물론 새로운 방식으로 급하게 개발된 것이라 부작용이 걱정되는 사람에겐 강요할 수 없고 접종 여부는 개인의 자유에 속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백신 개발할 때는 물론 그 부작용을 실험 연구하는 대상으로 자원했습니다. 백신 음모론자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그들은 인간사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건 셈입니다. 이번 백신 건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큰 재앙이 닥쳐도 신자라면 아무리 위급해도 더더욱 이웃 사랑의 본을 먼저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이지 않습니까? 나오미가 진정으로 자부를 사랑하는 모습을 먼저 보이자 룻도 그녀를 진정한 사랑으로 반응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사태가 언제 어떻게 결말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종말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것이 초자연적 능력에 의존하거나 심오한 종교적인 진리를 강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은 인간들의 죄가 오랜 세월 회개하지 않고 누적되는 바람에 인간사회가 인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을 뜻합니다. 불신 세상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몰라도 뒤늦게나마 인간사회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어쨌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반드시 그들보다 더 앞장서서 그래야 합니다. 세상이 종말 같은 사태로 치닫게 된 근본원인은 인간들의 죄이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신자들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인간사회에 쌓인 추한 쓰레기를 하나씩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종말로 가는 시계를 되돌리거나 중지시키기는 많이 늦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이웃 사랑 외에는 다른 어떤 길도 없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이 어느 누가 봐도 이미 늦었으며 고향 땅으로 돌아간들 아무런 해결책은 없고 오히려 비방 멸시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할 바는 했습니다. 자기 바로 곁에 있는 사람부터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신자들은 이런 사태일수록 교회에 모여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보다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는 세상사람 곁에 다가가 함께 신음하고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인생의 종말 같은 상황에 빠져 있더라도 예수십자가의 한 줄기 빛이 반드시 어딘가에 특별히 그 고난 가운데 비춰지고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8/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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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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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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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7
  • 조회 수 392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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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 조회 수 237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4]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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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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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1]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룻기 강해 (6)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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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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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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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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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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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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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기 강해 (3)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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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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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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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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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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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2
  • 조회 수 379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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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 조회 수 242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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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 조회 수 244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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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1
  • 조회 수 255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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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 조회 수 210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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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 조회 수 241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1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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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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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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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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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오병이어 기적 (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예수님이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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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7
  • 조회 수 259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2]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오병이어의 기적 (7)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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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0
  • 조회 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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