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2:1-7)

 

빈털터리가 된 두 과부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나오미와 룻은 아무런 현실적 대책도 없이 온갖 멸시 천대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시댁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오미가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했듯이 정말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기들 인생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은커녕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사회의 구조와 관습상 과부는 아무 대책 없는(helpless) 자의 대표입니다. 재혼을 하지 못하면 창녀나 거지가 되어 다른 사람의 적선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신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담대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까닭이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여호와를 멀리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했기에 그분께 순종 의탁해야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두 여인이 소지한 것은 오직 하나, 여호와를 믿는 믿음뿐이었기에 아침저녁으로 간절히 여호와께 매달리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들의 소원이 간절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도 기도만 해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뿅’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 중에 재혼은 상대가 없고, 창녀는 결코 될 수 없으니 구걸하러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들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해주는 규정이 있습니다. 추수할 때 가장자리의 곡식과 과일 일부를 남기고 떨어진 것들은 챙겨가지 말아야 합니다.(레19:9,10) 그 규정 마지막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덧붙여서 당신의 엄정한 명령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사회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제도적 장치이니까 가난한 자들로선 굳이 자존심이 손상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만 행하던 사사시대인지라 그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어쨌든 마침 추수철이라 나오미가 룻에게 그 율법 규정을 설명해주었을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더러 이 사람이 나오미냐고 조롱한 성중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하거나 한낮의 더위를 겪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즉, 율법을 준수하는 인자한 주인을 만나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혼자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율법대로 따르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모압 여자라고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전제한 것도 허탕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한 것입니다. 룻에게서 참으로 현숙한 성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처분에 온전히 맡기는 믿음도 돋보입니다.

 

뜬금없는 보아스의 등장

 

본문은 룻이 추수하는 내용 앞에 뜬금없이 룻기의 세 번째 주인공인 보아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첫째는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라고 합니다. 서로 잘 알아서 가깝게 지낸 친척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온 나오미를 바로 찾아와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남편 가문에 속한지라 계대결혼을 할 자격이 있는 자들 중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유력한 자라고 했는데 원어적으로 힘센 용사라는 단어와 재산이 많고 지혜와 능력 있는 자라는 두 단어를 합성한 것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도 힘이 세고 민첩한 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한마디로 보아스는 재산이 많고 지혜롭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였습니다. 서두에 이런 설명을 삽입했다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보아스와 룻과의 관계도 이 두 가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행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선 룻이 이삭을 줍고 있는 밭의 주인이 보아스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오자마자 추수하는 시종들과 이삭을 줍고 있는 모든 이를 향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인사법보다 더 정중하고 자상한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료나 이웃 간에는 ‘샬롬!’이라고만 인사합니다. 평화, 풍요, 완전, 정의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는데 간단히 말해 상대의 복을 빌어주는 통상적인 인사입니다.

 

보아스는 샬롬 대신에 모두에게 여호와가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적 행복보다 그분과 온전한 영적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내포된 셈입니다. 나아가 지금 이삭을 줍고 있는 이 일이 바로 모세의 율법대로 따른 것이므로 모든 이에게 여호와가 복 주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종들도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화답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주인과 종 또는 임금과 신하 같은 사이에는 낮은 자가 엎드려 높은 자에게 절합니다. 보아스의 종들이 주인에게 절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진심으로 주인을 존경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거기다 주인의 영향을 받아 종들의 믿음도 좋은 것 같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맥락으로 여호와가 주인에게 복을 주시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들보다 주인의 행복을 우선시 했습니다. 주인이 복을 받아야 자신들도 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 모든 일들을 여호와가 주관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지 에베소서 6:5-8에서 가르쳤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성실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눈가림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그 이유로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무슨 선을 행하든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주인의 명령대로 무조건 복종해야하는 종의 신분이지만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면 주님이 종에게도 당신의 선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상전들도 종에게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진심으로 대하고 무엇보다 공갈을 그치라고 권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상전 노릇하는 그 주인에게도 진짜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엡6:9) 지금 보아스와 종들은 인사를 나누면서 자기들 모두의 진짜 상전이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보아스는 종들을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않았고 종들도 보아스에게 눈가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의 성품과 믿음

 

보아스는 이삭을 줍는 사람들 중에 평소에 보지 못했고 히브리인처럼 보이지 않는 한 젊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종들을 거느리는 사환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사환은 먼저 나오미와 함께 온 모압 여자 며느리라고 밝히면서 룻이 자기에게 말한 내용과 또 그 날에 행한 일을 보고했습니다.

 

먼저 율법에 정해진 대로 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방 모압 여자인데도 모세 율법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와서 지금까지 잠시 집에서 쉰 시간 빼고는 계속 부지런히 이삭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시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주인은 대체로 저녁에 추수 마칠 때쯤 들리는 법입니다.

 

여기서 집은 장막이라는 뜻인데 어떤 곳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살고 있는 장막이라면 잠시 점심시간에 시어머니를 돌보러 들렸다가 다시 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추수할 밭이 넓고 일꾼이 많으면 들판에 쉴 수 있게 장막을 쳐놓기도 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더 타당한 뜻인데 잠시 점심요기만 하고는 아침부터 해가지도록 쉬지 않았덧 것입니다. 룻이 아주 부지런했고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효성도 지극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여자와, 그것도 이방 여자와는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모압 출신 며느리가 히브리인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섬긴다는 좋은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11절) 그의 인품이 말해주듯이 룻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환도 자기 임의로 모압 여자 룻에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것을 보면 보아스의 인품과 믿음에 영향을 받았고 룻이 효녀라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종의 우두머리는 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자가 맡기에 보아스는 그의 보고만으로 룻에 대한 첫인상을 좋게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룻에게 너그러운 조치를 허락하고 종들더러 최대한 도와주라고 지시했습니다.(8,9절) 룻이 나오미에게 말했고 집을 나오기 전에 잠시 기도한 것에 여호와가 응답하여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 자를 만나게 해준 것입니다. 

 

현실적 해결책이라곤 전혀 없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두 여인에게 소망의 빛이 조금씩 비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사실상 거지가 되어 구걸하러 나간 첫 날에 말입니다. 도움 받을 데라곤 하나도 없고 사방이 막힌 때는 진심과 전심으로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불쌍한 과부가 바로 그런 상태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주님은 곧바로 그들 믿음의 첫 열매를 맺게 해주었습니다.

 

기도의 본질과 응답

 

우리도 오래 동안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와 고난이 결국에는 이제 기도할 힘마저 없으니 나를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완전히 내려놓으면 이상하게 술술 잘 풀리는 것을 체험하지 않습니까? 간혹 40일 작정 금식 혹은 새벽기도를 하면 응답이 잘 된다고 가르치는데 비성격적인 잘못입니다. 그럼 인간이 정한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 하나님이 좌우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는 유일한 존재로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신앙적 이슈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통하는 매뉴얼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일대일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서 반드시 그에게만 적합한 개별적인 은혜와 권능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베푸실 뿐입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최대한의 정성을 담아서 자기 뜻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하나님더러 알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신자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뜻을 알리려는 것도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서 자기 고통을 끝내달라는 이기적인 목적입니다.

 

보아스의 종들이 주인이 복을 받아야 우리가 복을 받는다고 한 것처럼 최소한 이타적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 코가 석자라도 주변에 더 어려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들부터 기도해주어야 그런 자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도 룻은 나오미를 위해서, 나오미는 룻을 위해서,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 두 여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섬겼다는 스토리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기도의 첫걸음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지 무능함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을 자격이 자신에겐 전혀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바울이 세 번이나 고질병을 치료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전혀 응답받지 못한 까닭이 그더러 교만하지 말게 하고 대신에 스스로 낮아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드러나게 하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고후12:7-9)

 

인간이 완전히 무력해질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해서 신자의 믿음의 인내를 시험하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 일이 이뤄지는데 인간이 관여한 공로를 전혀 없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진리를 명백히 드러내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금식하거나 천일제단을 쌓았기에 응답해준다면 비록 신앙적 행위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공로와 자격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만이 받아야 할 영광의 일부를 인간이 가로채는 셈인데도 작금 오히려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물론 큰 환난 중에 금식 혹은 작정 기도하는 것은 아주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첫째 목적이 자기 욕심은 물론 계획마저 완전히 깨트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 전부를 내어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룻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뿐이고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일도 그분께 매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인자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주인을 만나서 이삭을 잘 주을 수 있게 해달라고 잠시 기도하고선 이른 아침부터 유일한 현실적 대안대로 거지처럼 구걸하러 나선 것입니다. 그녀는 금식도 하지 않았고 새벽제단을 최대한 정성들여 쌓지 않았는데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절대로 최대한의 치성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스스로 겸손해진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본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룻은 잠시 기도하고 아침 일찍부터 단 사이에 떨어진 이삭들을 열심히 주었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때에 마침 그녀가 머물고 있는 동안에 보아스가 그곳에 들렀습니다. 룻은 보아스라는 시댁의 친척이 있는지도 그 밭이 그의 소유인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예 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날 하루에 우연이 두 번 겹쳤으나 그 이전부터 따지면 그런 일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우선 나오미의 친척 중에 사사시대임에도 악한 세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보아스 같이 인품과 믿음이 훌륭한 사람이 있었던 것부터 우연입니다. 서두에 뜬금없이 보아스에 관한 설명을 삽입한 이유도 나오미와 룻이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이삭 주으러 그의 밭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한 두 여인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입니다.

 

룻이 엘리멜렉 집안에 시집 온 것부터 우연입니다. 모압 동족 대신 유대인 청년을 만나 결혼했고, 나오미라는 훌륭한 시어머니를 만났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일찍 죽었고, 그 전에 그들이 하필 모압 땅 자기 동네로 온 것 등등 모두가 룻이 소망하고 계획했던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유대 땅에 큰 흉년이 든 것은 물론 엘리멜렉 같은 유력자 가정이 외국으로 이주하려 결심한 것도 룻과는 아무 관계없는 우연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것만 들었지만 그 외에도 룻의 인생에는 셀 수도 없는 작은 우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룻에게 최고로 큰 우연 하나가 따로 있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르려고 결심하면서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담대하고 순결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크게 놀랬을 것입니다. 그녀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지 자기 공로가 절대 아니라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이런 우연들이 룻에게 바로 그 때에 바로 그 방식으로 발생할 확률은 인간 머리로는 계산도 못할 만큼 아주 낮습니다. 인간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광대하신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신 것입니다.

 

두 불쌍한 여인은 가진 소유라곤 하나도 없었고 여자라 특별한 생업의 기술도 없어서 어떤 계획을 세울 처지가 전혀 안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구걸하는 길 뿐인데 마침 추수하는 철이라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거룩한 율법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이삭만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상도 못할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획 가운데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 이후로도 룻에게 그런 우연들이 겹쳐서 결국에는 다윗의 증조모이자 예수님의 선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당사자들인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이 보아스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두 여인이 행한 일이라곤 목숨을 보존하되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한 것뿐입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흑암에 빠진 인류를 참 생명으로 구원하는 일을 묵묵히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누는 골고다 십자가로 가는 길을 이 두 여인을 통해서 닦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장 믿음과 인품이 좋았던 세 사람조차 평생 알지 못하고 죽었어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사역을 실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간 신자에겐 우연으로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광대하신 은혜와 권능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체험하여서 그분께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인간의 미약함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비추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너무나 미약합니다. 너무나 미약하니까 신자의 일생은 그분의 광대함을 담아야 하는 자기 마음의 크기를 최대한 넓혀나가는 씨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광대하심을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딱 그만큼만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 중에 제대로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그분에게 중심을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마저도 사실 아주 어려우므로 룻과 바울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맡겨야 합니다.

 

감히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완전 불신자 집안에 태어나 33살 때까지 극렬한 안티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던 일만 해도 제대로 기억도 못할 만큼 많았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처럼 모든 인생이 굴곡진 고난이지만 저도 아주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의 진리를 알고 나서 지난 인생을 반추해보면 매 순간순간이 제가 당시로선 전혀 몰랐어도 본문 같이 하나님의 우연과 마침의 연속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 많고 부족한 저를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세우셨고 특별히 2003년부터 인터넷 목회를 하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일반목회에서 인터넷 목회로 전환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하나 있습니다. 구강암 수술로 혀를 조금 잘라 내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발음이 어눌하고 오래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의심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다 나름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 찾은 것이 직접 말로 오래 상담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 목회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비대면 목회를 할 수밖에 없는 코로나사태가 닥쳤고 하나님은 무려 18년 전부터 저에게 비대면 목회를 준비 훈련시켜주신 것입니다. 비대면 목회가 더 바람직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며 사태가 나아지면 최대한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가장 합당한 사역으로 인도해주셨고 그를 통해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개인적인 고통을 호소해 오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어떤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실 지는 저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인터넷만 되면 평생 할 수 있는 사역이므로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진심을 보신다면, 아니 제가 복음을 전한 그 잃어버린 영혼들을 안타깝게 여기신다면 제가 평생토록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게 당신만의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거룩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에게 못할 일은 하나도 없으며 특별히 복음이 전해지고 열매 맺는 일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지금 제 간증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의 인생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거룩하게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형통과 출세 대신에 그분께 받은 소명에 충성하고 있던지 최소한 그분에게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긴다면 말입니다.

 

종말을 맞는 신자의 자세

 

이 진리는 종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금의 사태에 더 정확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죄악이 한계를 넘어가고 엄청난 자연 재앙은 겹치고 펜데믹으로 전 세계가 너무나 불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도 그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광대한 계획대로 묵묵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사태가 언제 해결될지 모르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인간을 특별히 자신이 천하의 죄인이라고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심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고 갈수록 더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성경이 종말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6-8)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의 음흉한 모략은 이미 세상에 활동하고 있지만 그가 나타나는 것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계신 성령님이 비밀리에 역사하여 그의 출현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그가 나타나도록 풀어주지만 예수님이 강림하여 죽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 약속입니까? 지금 같은 종말시대에 더 극렬히 설칠 사탄의 음모와 훼방을 성령님이 막고 계시고 최후에 발악할 때는 주님이 직접 오셔서 벌하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종말과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바로 룻처럼 행하면 됩니다. 종말이 닥친 것 같다고 우리끼리 교회에 모여서 기도만 해서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기도 없이 현실적 대책만 세워서도 안 됩니다. 신자 각 개인이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한 후에 일찍 일터로 나가서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하셔야 합니다. 그 후의 결과는 주님께 완전히 의탁하면 됩니다. 너무나 미약한 인간인지라 사실상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원과 에너지를 아껴서 사용하고, 지구를 오염하는 일을 최대한 줄이고, 코비나 백신도 앞장서서 맞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찾아가 기도해주며 섬겨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현실 고난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종말이 따로 없으며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종말이 닥치는 그날도 단순히 24시간의 하루입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주님이 이미 와계시든지 혹은 주님께 충성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보아스처럼 마침 주님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물론 신자 자신부터 현실적 정신적으로 큰 환난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이삭을 줍지 못하면 당장 그날 하루 굶어야 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기도한 후에 어떤 멸시 고난도 무릅쓰고 거지처럼 구걸행각에 아침 일찍부터 나선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고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관이자 믿음으로 누리는 특권입니다. 금식하고 작정 새벽기도해서 자기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참 특권이 아닙니다. 광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위해서 묵묵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당신만의 영광의 계획을 실현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럼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평강은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종말 같은 시대는 물론 개인적인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9/19/2021)

 

 


날마다순종

2021.09.19 16: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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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mango

2021.09.21 08: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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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목사님의 귀한 사역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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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기 강해 (1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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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31
  • 조회 수 265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기 강해 (10)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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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4
  • 조회 수 283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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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7
  • 조회 수 392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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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 조회 수 237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4]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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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3
  • 조회 수 530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1]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룻기 강해 (6)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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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 조회 수 284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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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9
  • 조회 수 458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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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 조회 수 214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기 강해 (3)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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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5
  • 조회 수 319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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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9
  • 조회 수 407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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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2
  • 조회 수 379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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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 조회 수 242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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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 조회 수 244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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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1
  • 조회 수 255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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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 조회 수 210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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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 조회 수 241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1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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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1
  • 조회 수 249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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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 조회 수 239

(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오병이어 기적 (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예수님이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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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7
  • 조회 수 259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2]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오병이어의 기적 (7)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 master
  • 2021-06-20
  • 조회 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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