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http://youtu.be/ZJFfgXGhOf8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9-14)


마지막 때에 올 큰 영적부흥(?)

예수님이 세상 종말과 당신의 재림에 관해 가르친 감람산 강화를 두 번째로 살펴보자. 당시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신자들 즉, 인간들의 일차적 관심은 아무래도 종말의 시기에 모일 수밖에 없다. 정작 하나님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믿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 시기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 하에 두고 모두에게 비밀로 할 수밖에 없다. 신자에게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천국 영광이 확보되어 있다. 종말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기에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 시기에 관심을 둘 이유도 없다.

성경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그로 말미암아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골1:16)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알고도 창조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를 십자가 복음 안에서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의 마감도 그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종말, 재림, 심판은 십자가 복음 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의해서 이뤄질 것이다.

본문 14절에서 창조의 주체요 목적이요 소망이신 예수님이 직접 그런 뜻을 확인했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면 끝이 온다고 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것으로 종말의 시기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이 땅에 큰 영적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해왔다. 이는 조금 불합리한 해석이지 않는가?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구태여 심판 목적으로 오실 이유는 없지 않는가? 이왕이면 아주 많은 신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통치하려는 것도 큰 설득력이 없다. 그 때는 지난 모든 세대의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여 함께 강림하실 테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부족할 리도 없지 않는가?

무엇보다 본문의 내용이 그런 해석을 부인한다. 신자들이 큰 핍박을 받을 것이고(9절), 서로 미워하게 되며(10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고(11절),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실종된다고 한다.(12절) 모든 현상들이 영적 부흥과는 정반대이다.

그래서 큰 영적 부흥(14절)이 있긴 하나 “멸망의 가증한 것”(15절) 즉,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환난을 야기하는 바람에 신자들이 줄고 부흥이 쇠퇴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또한 설득력이 그리 없다. 뒤에 기록되었다고 뒤에 그 시기마저 뒤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24장 내내 “그 때에”, “그 날에”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시간적 전후순서를 나타내려면 “그 후에”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 때와 그 날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4-14절까지 종말에 대해 개략적으로 가르친 후에 15절 이하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했다. 그리고 주님은 14절에서 명시적으로 끝이 온다고 했다. 본문의 14절은 종말에 대한 가르침의 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론을 다시 보자.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했다. 영어 번역으로 보면 더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는데 전파는 preaching 설교다. 복음이 전해진 것이지 예수를 영접하여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민족에게 ‘증거’ 된다는 것도 testify, witness 간증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큰 영적 부흥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복음을 듣게 되는 시기가 되면 당신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이 전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과 종말을 같은 시점에 두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목적을 복음 전파에 두신다는 것이다.

재림 소망의 올바른 의미

틴데일(Tyndale) 성경번역협회에서 향후 20-30년 후에는 전 세계의 미전도 종족들이 자기들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 세대 안에 실현될 만큼 임박했다고 예측하고 있다.

신자라면 당연히 주님의 재림을 소망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고 충성된 주님의 일군이라도 재림을 단 1초라도 인위적으로 앞당기게 할 수는 없다. 성경의 번역이 완료되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걸림돌 하나가 제거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과 재림은 별개이며 그 둘의 시간 간격도 인간의 계산이나 추측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 때와는 그 상황과 목적이 다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면 율법 없이도 양심이 그 의로움을 증거한다고 했다.(롬2:14,15) 문제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양심이 왜곡 부패되었다. 이방인은 양심의 소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유대인은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백성조차 율법으로는 죄의 저주만 있다는 엄연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데까지가 율법이 감당할 역할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로 율법과 대비해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니 유일한 것인지 절감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때가 차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죄에 찌들어 있음에도 단 한시도 긍휼과 사랑을 거두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셨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항복하는 자에게 참 생명을 불어넣어주어서 새 인생을 살게 하신다. 또 예수님은 그런 새 인생의 본을 이 땅에서 직접 보여주셨다.

따라서 십자가 이후의 모든 신자는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들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풍성하고 고귀한 새 생명을 주위에 소개하고 함께 나눠야 한다. 사탄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배역하고 죄에 찌든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게 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여 눈물로 회개하고 진리의 말씀 앞에 한 영혼이 날로 의롭게 변화 성숙하도록 곁에서 도와주고 지켜보는 것만큼 인생에서 큰 기쁨은 없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신자의 종교적 의무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복이다. 바울처럼 심정이 뜨거워져서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는 것이 전도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알고도 복음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구약 시대에 타락한 본성으로 살도록 버려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복음의 절실성, 절대성, 유일성을 충분히 깨닫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다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누는 중간 시점에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그 복음을 온 천하에 공표했다. 신약 시대 신자는 그 복음을 누리고 나누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면 역사의 끝이 올 것은 필연적 순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을 듣지 않았는데도 심판을 하시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쪽에서 골고다와 오순절로써 베풀 것은 정말 다 베풀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참으실 때까지 다 참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하실 바에서 단 하나 모자란 것이 없이 다하셨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그만큼 확정적으로 엄중하게 임할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양과 염소,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영생과 영벌로 단번에 나눌 것이다. 그 나눔의 기준은 오직 십자가의 당신의 피로 덧입혔느냐 뿐이다. 그 외의 타협, 조종, 변경할 수 있는 중간 지대는 없다. 두 번 다시 관용과 용서와 인내는 없다.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모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하셨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십자가에 충만하게 드러났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은 인류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종말을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만 이끌겠다는 선언이다. 본문 14절의 결론은 그 선언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자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심판을 유예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십자가를 위한 준비라면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양보, 타협, 연기가 없는 심판이 임한다고 해서 신자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복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심판이 그렇게 확정적이라면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 또한 그렇게 확정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비유하지만 신자는 이미 디즈니랜드 안에 들어와 있는 자다. 하나님이 절대 다시 쫓아내지 않으신다. 신자는 온갖 놀이기구를 신나고 스릴 넘치게 탐으로써 울타리 밖의 구경꾼들에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인간 본성의 타락은 더 극심해질 것이라고 한다. 울타리 밖에서 안으로 돌을 던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고”(10절)라고 했다. ‘서로’란 같은 공동체의 멤버들끼리라는 뜻이다.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여 밀고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부터 나올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많은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는 일이 종말로 갈수록 극심해질  것이다. 주님은 그런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13절) 그럼 주님은 심판의 근거로 복음을, 구원의 근거로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든 셈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미약한 적그리스도를 많이 보내다가 마지막 최고로 강한 적그리스도를 보내어서 고통의 정도를 에스컬레이트 시켜가며 믿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검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환난이 많아지고 세어질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죄악 자체의 엄청난 성장력과 파괴력 때문이며 또 그것을 절정으로 오르게 하는 사탄의 최후 발악 때문이다.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얄팍한 술수를 쓰지 않는다. 끝까지 참아내기만 하는 것으로 구원을 준다면 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다.

상여금 약속보다 회장님을 믿어라.  

종말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이뤄진다면 핍박을 참아 내는 것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그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 끝까지 견뎌야 하며 또 그래야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의신칭의의 교리를 열심히 믿고 끝까지 붙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큰 재벌 회장이 어느 날 현관 수위에게 언젠가 일억 원의 상여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회장은 그 수위가 진정으로 자기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얼굴 표정에 담겨져 있음을 보았다. 월급만으로 자녀들의 학자금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텐데도 가족 간에 아주 화목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마다 정말 가식이나 아부 하나 없이 밝고 힘차게 인사하면 자기 기분도 좋아지고 업무 능률도 오르는 것 같아 항상 고맙게 여겼던 차였다. 그런 구체적 사정 설명은 물론 언제 주겠다는 언질도 않고 그냥 상여금 일억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수위로선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한 것뿐이었다. 특별히 회장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것을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구해준 것도 아니다. 지금껏 월급도 다른 회사 수위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그런 큰 상여금을 받을 이유가 없으니 그 약속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장의 성품이 과묵하고 약속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직원과 한 약속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키는 줄은 알고 있다. 일억의 상여금이라는 약속의 내용만 생각하면 쉽게 믿어지지 않지만 회장의 인격에 비추면 충분히 믿어지고 기다릴 수 있다.

그렇다고 더 잘 보여서 상여금을 더 많이 더 빨리 받으려 하지는 않는다. 평소대로 성실하게 기쁨으로 자기 일에 충실할 뿐이다. 회장과 수위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격과 인격이 교통하여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수위는 상여금을 언제 줄지 신경도 쓰지 않고, 심지어 주던 안 주던 이전과 달라질 것이 하나 없다. 학력이나 실력 등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기에 그 직업을 오히려 과분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종말의 환난을 억지로 없는 힘까지 짜내어 견디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핍박이 닥치면 누구라도 자연히 그렇게 된다. 천국의 보상을 바라보고 참아내는 것도 사실상 아니다. 우린 천국이 얼마나 어떻게 좋을지 잘 모른다. 단순히 눈물과 상처와 고난과 죄악이 없어서 좋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지 겪지 못해 실감하지 못한다. 천국의 좋은 것만 바라보는 신앙은 추하고 힘든 것으로만 가득 찬 이 땅에서 어서 빨리 도피 탈출하겠다는 염세 비관주의의 일종이다. 자기 혼자만 편해지려는 극도의 이기주의일 수 있다. 수위가 일억 상여금만 받자마자 회사를 사직하고 음식점을 차리겠다는 심보와 같다.    

신자는 이미 예수님의 참 생명을 얻었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자다. 예수님과 인격과 인격으로 서로 교통할 수 있다. 현실에 아무 보상이 없어도, 예수님처럼 수많은 고난을 겪어도, 언제 그분이 다시 오셔서 천국 영광을 입혀줄지 몰라도, 예수님을 기꺼이 따라 가는 자다.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 두지 않으면 너무 허무하고 갈급하고 괴롭기까지 하므로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핍박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자다. 아직 연약하여 때로 넘어지고 실패해도 예수를 따르는 삶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여 십자가 복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복음 안에 사는 것이 그 외 다른 어떤 방식의 삶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고 풍성하기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신자가 서있는 그 장소가 바로 땅 끝이다. 그 날이 바로 끝 날이다. 매일이 그러하다. 매일 매일을 끝 날로서 살고 있고 그런 끝 날이 계속 이어지니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을 받은 자는 그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끝 날이 쌓여서 세상의 끝 날이 되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단을 쌓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나이 75세에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백세가 되도록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그 약속을 믿은 것이 결코 아니다. 중간에 여러 번 의심했다. 약속을 받고 십 년이 지나도록 달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충직한 종에게 기업을 물려주려 했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 그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분을” 믿은 것이다. 아내 사래의 경수가 끊긴지 오래라 그 약속 자체는 도무지 안 믿어졌다. 하나님이 나타나 그 약속을 재차 다짐해주자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비추어서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님을 새삼 상기한 것이다.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믿으니까 그분의 약속도 믿은 것이다.

그의 믿음이 종교적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지나온 삶의 생생한 체험에서 형성된 믿음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 모르고 불려 나온 사건,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서 부친 데라가 죽은 사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여 아내를 팔아먹은 사건, 가나안 종족들 간의 전쟁에서 조카 롯을 구출해낸 사건 등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익히 알게 된 것이다. 잠시 약속의 내용에 관심이 쏠려 의심했지만 하나님과 대면하자 그분과 인격적 교통이 회복된 것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에 많은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생생히 체험했기에 단을 쌓고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하여 경배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제대로 이해도 되지 않고 무엇보다 내 기분에 전혀 들지 않는 그분의 약속을 내 의지로 억지로 믿으려 드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같은 자들이 도덕적 종교적 하자가 없는 위인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고 또 그 마음에 자기들 마음을 맞추었을 뿐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해 갖고 있는 애통함, 긍휼함, 분노함의 의미와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그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이라도 믿은 것이다. 언제 실현될지 모르고 아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약속도 그분을 믿었기에 믿고 따를 수 있었다.

신자의 매일의 삶은 하나님과 실제적,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 동행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의지력만으로는 사소한 고통조차 온전히 이겨내지 못한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본 만큼 나중에 천국을 소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충성했는지 점수를 매겨 상급에 차별을 둔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 신자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이자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교제에서 오는 기쁨이 나중에 천국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을 막연히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았기에 그 소망이 견고해지고 더 잘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상처와 고난 특별히 죄악과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긴 기록을 갖고 천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실현되는 모습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신자는 마지막 환난 때에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을 필요가 없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와 있기에 하나님 그분이 나를 끝까지 놓지 않는 신분과 특권을 이미 소지한 것을 아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 때까지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살면 된다.  또 복음이 온 민족에게 전파되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주님 어서 오시라고 재촉하거나 기도할 필요도 없다. 매일 매순간 너무나 좋은 복음을 누리고 살면서 아직 복음을 모르는 주위 사람에게 나눠주면 된다. 그러고 있는 중 어느 순간에 주님이 오시면 반가이 맞으면 그만이다.  

6/29/14

사라의 웃음

2014.06.29 23:42:15
*.109.85.156

잘 견디고, 끝까지 견디고, 힘껏 견디고.... 견디라고, 견디라고 힘을 실어 주는 설교에 많이 익숙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라는 말씀 또한 이 땅이 넘 힘드니 어서 저 편한 곳에 가서 쉬고 싶다란 욕망으로 소망하기에 견뎌내어야할 이 땅을 그저 묵묵히 견뎌냄이 믿음인 것 같았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삶 속에서의 손길들로 인하여 인자하시고 참 부드러우신 그 사랑 앞에 엎드림이, 그래서 그 엎드림이 매일 이어지게 되고 또 앞으로도 그 부드러운 사랑을 더더욱 알려 주실 터이니 아브라함처럼 단을 쌓게 되는 것이 이미 천국 속에 있는 삶임을 자세히 배웁니다.

단을 쌓으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과 맘과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시는 아버지이시기에 너무 좋아서 아버지께 단을 쌓을 수 밖엔 없는 자녀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섬세히 말씀하여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임화평

2014.07.22 21:21:49
*.106.80.223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니 감사드립니다 ~^^

국중후

2014.07.25 02:18:22
*.167.0.245

마라나타!라고 날마다 주님 어서오시기를 기도하고
추하고 힘든 것으로만 가득 찬 이 땅에서 어서 빨리 도피 탈출하겠다는 염세 비관주의로 살았던 나를 회개합니다.
신자가 서있는 그 장소가 바로 땅 끝이다. 그 날이 바로 끝 날이다. 매일이 그러하다. 매일 매일을 끝 날로서 살고 있고 그런 끝 날이 계속 이어지니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을 받은 자는 그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끝 날이 쌓여서 세상의 끝 날이 되는 것이다. 이말씀을 붙들고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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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태복음강해 #159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태복음강해설교 (#15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

참된 개종보다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6 - 마23:15) [8]

참된 개종보다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6) “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이방...

모든 신자는 순교해야만 한다. (마태복음강해 #173 - 마16:24-28)

모든 신자는 순교해야만 한다. 마태복음강해 (#173) http://youtu.be/DUyzMzB-Gp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 마26:69-75)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http://youtu.be/ls8cu58O-R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

끈질긴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강해 #194 - 마20:29-34) [1]

끈질긴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강해(194) http://youtu.be/7wxKNidYDUY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 마24:9-14) [3]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http://youtu.be/ZJFfgXGhOf8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 마22:15-22) [1]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http://youtu.be/mLEnl_Tjke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

지금도 너무나 진지하신 하나님 (마태복음강해 #170 - 마16:13-17) [1]

지금도 너무나 진지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170) http://youtu.be/Q8Wm1DGQPq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강해 #157 - 미14:13-21) [2]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 강해 (157)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마태복음 강해 #230 - 마24:44-51) [1]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 마태복음 강해(230) http://youtu.be/hy8pTp1qZ4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강해 #198 - 마21:18-22) [2]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 강해 (198) http://youtu.be/ScHdExNJdSk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 마14:22-27) [2]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저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강해 #200 - 마21:23-27) [1]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 강해 (200) http://youtu.be/5lkkuMPM9QU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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