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1-9)

 

 

벽돌 하나 남지 않은 바벨탑

 

최근에 많은 개발도상 국가들이 자기들 국력을 자랑하려고 경쟁적으로 최고 높은 빌딩을 지었다. 대만 말레이시아 한국 중국을 거쳐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할리파가 163층에 823미터 높이로 최고가 되었다. 미국 뉴욕의 엠파아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2층 381미터인데 겨우 30등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흔히들 이런 마천루를 두고 물질문명에 눈이 어둔 인간 죄악의 열매로서 제2의 바벨탑이라고 비난한다. 이는 성경 특별히 본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먼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물질문명은 선(善)한가 악(惡)한가? 결코 악하지 않고 선하다. 물질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런데 어떻게 악할 수 있는가? 정확하게 말해 물질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가치중립적이다. 거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분 뜻대로 물질을 개발 활용하는 문명은 선하고 때로 거룩하기까지 하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인간의 욕심대로 개발 활용하면 사악해진다.

 

고층빌딩을 다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원시적 표피적 신앙이다. 고층빌딩은 한 곳에서 거주, 쇼핑, 취미활동, 비즈니스 등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에너지와 비용의 절감 효과가 상당하다. 한국에 고층 아파트가 없었다면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하늘 높이 쌓았다고 벌을 준 것이 아니다.

 

노아 홍수 심판에 비해 바벨탑 사건의 기록은 너무 간단하고 짧다. 노아 홍수는 전 지구적인 심판인데 비해 국지적이기 때문이다. 또 노아 홍수의 기록에 하나님의 뜻을 이미 다 계시해 놓았기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이 간단하다고 해서 해석과 적용마저 그러면 안 된다. 간단하니까 더더욱 심층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바벨탑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첫째 전제는 과학적 증거가 많은 노아 홍수 심판과는 달리 그 흔적이 벽돌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남아 있는 ‘지그라트’라는 높은 탑들이 바벨탑 유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기원전 18-17세기 바벨론 하무라비 왕조 때에 자기들 우상 신인 마르둑에게 경배 드리는 제단이었다.

 

세상 거의 모든 종교가 큰 탑을 쌓는다. 최대한 하늘 가까이에서 최고의 정성을 바쳐서 신에게 제사 드릴 목적이다. 또 왕들이 자기 이름으로 탑을 쌓는데 자기들 신의 도움으로 큰 치적을 쌓았다고 자랑하고 기념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바벨탑을 놓게 쌓은 배경에 어떤 신에게 경배하겠다는 종교적 동기는 전무했다. 홍수 심판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트라우마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높게 쌓아서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게, 흩어짐을 면할 목적(4절)으로 지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지개 언약을 통해 다시는 땅을 물로 저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창9:8-17)을 벌써 망각했거나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것이다.

 

오순절 방언과 바벨탑 사건

 

이 사건에서 정작 추적해야 할 과제가 하나 있다. 민족으로 나뉘고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이 언제이냐는 것이다. 성경 기록상으로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혼잡하게 했다고 하는데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과연 탑을 건축하는 중에 모든 이가 지금껏 사용하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해서 모두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고 그래서 탑을 쌓는 계획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을까? 정말로 그랬을까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가?

 

신학적으로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방언을 하게 된 사건을 대조 일치시킨다. 바벨탑에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인류를 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라는 한 가지 언어로 하나님이 다시 통일시켰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순전히 객관적 외양만 따지면 사도들이 전혀 배우지 않았고 지금껏 하지 못했던 각 나라 방언으로 말을 했다. 언어가 혼잡하게 되는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여호와 신앙을 가진 경건한 헬라인들로 자기들 언어로 복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도들로 새 언어를 말하게 했지만 그들의 지정의는 그대로 두고 그렇게 했다. 스스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이 가능했다. 그러다 결국은 베드로에게 모두를 주목케 해서 모두가 알아듣는 공용어인 아람어 내지 헬라어로 설교를 했고 그날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바벨탑 사건에서 만약 현장에서 언어를 혼잡하게 했어도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을 짐승처럼 소리만 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정의 인식은 분명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언어가 달라진 것을 알고 크게 당황했어도 조금 있다가 손짓 발짓 아니 그림을 그려서라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을 것이다. 오순절에 모두가 베드로에게 주목했듯이 바벨탑을 지을 때는 최고지도자는 있었을 것이며 그 지도자의 뜻대로 따랐을 것이다. 정말로 언어가 혼잡해진 이유로만 헤어졌다면 탑은 그대로 있었고 그럼 뭔가 흔적은 남을 것 아닌가?

 

말하자면 그들이 탑을 세울 계획과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흩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애굽의 바로가 열 번의 그 엄청난 재앙을 목격하고도, 마지막에는 자기 장자가 죽었음에도 유대인들을 노예로 계속 부려 먹으려는 탐욕을 포기하지 않았지 않는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또 인간을 노예로 묶고 있는 죄의 세력이 너무나 끈질기고 교묘하고 음흉하기에 쉽게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 하나만 혼잡해선 오히려 더 단합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언어 혼잡의 또 다른 가능성

 

대신에 벽돌 한 장 남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작업이 끝나고 단잠을 자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모래성처럼 산산조각 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유황불이 비같이 내려와 깜짝 놀라 일어나 탑이 파괴되는 것을 생생히 목격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엄청나게 높이 쌓아서 방금 전까지 큰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그 탑이 완전히 폭삭 내려앉게 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목도케한 것이다.

 

그래서 무지개 언약에서 다시는 물로는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약속대로 이젠 불로 심판하는구나 깨달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어느 누구도 말 한마디 안 하고, 아니 못하고 누가 주도 강제 선동하지 않았는데도 짐을 싸들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을까? 또 각지에 흩어진 후에 언어도 여럿으로 나뉘었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또 하나님을 거역한 잘못에 대해 아예 거론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성경이 언어로 소통되지 못한다고 진술한 참 뜻이 아닐까?

 

만약 현장에서 방언이 나뉘었다면 현대적 장비가 없어서 원시적 수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그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다. 또 그 흩어진 각자가 모든 종족의 선조여야 하는데 인류의 종족이 그리 많지 않다. 성경도 본문전체가 특별히 8절에서 언어 혼잡보다 흩어진 것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미련이 남아서 당장 안 떠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탑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그곳을 완전히 황무지 사막으로 바꿨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살려고 했으면 입지조건과 생활여건이 가장 좋은 곳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계절을 보장하고 심음과 거둠이 계속할 것이라고 보장한 무지개 언약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도무지 경작이 불가능해지니까 모두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이 현장에서 언어를 혼잡케 하는 일을 못하실 분이 아니다. 말씀드린 둘 중에 어떤 방식으로 심판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둘 다를 동시에 시행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벨탑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고 탑을 지은 데는 종교적 동기가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하나님이 심판하신 목적은 물론 그 방식까지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모든 징계와 심판은 반드시 인간으로 자기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죄를 짓게 되었는지 원인을 정확히 깨닫게 해주어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라는 것이 목적이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라는 뜻이고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만 행한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게 한다.”는 속담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일반섭리를 대변한 것이다.

 

성경에도 대표적인 예가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의 롯이다. 롯은 시집도 안 간 두 딸을 성적 유희대상, 죄송하지만 윤간의 희생물로 내어주려 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두 딸과 근친상간의 죄, 하나님의 율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히는 이방족속 암몬과 모압의 선조가 되었지 않는가?

 

바벨탑 사건에 적용된 하나님의 심판 원리

 

바벨탑 심판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정확히 응징하셨다. 언어를 혼잡케 한 것 자체가 심판이 아니었다. 본문의 결론 9절이 어떻게 말하는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고 한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것이 인간의 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죄의 핵심은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이었다.(4절) 인간이 흩어짐을 면하려 했기에 하나님은 흩어지게 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죄는 모여서 함께 살려한 것이었다.

 

대체 인간이 모여서 잘 살아보려는 것이 왜 죄인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이자 명령이 무엇이었는가? 첫째 명령이자 축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할 근거와 목적이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다. 생명을 고귀하게 가꾸고 번식시키라는 것이다.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땅에 퍼져 살라는 것이다. 그럼 오히려 물질문명을 발달시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단 하나님 대신에 다스려야 하므로 그분의 뜻이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물질문명을 개발 발전시켜야 한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창세기 10장이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인류가 흑백황인종로 나뉘었다는 인류유전학적 보고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바벨탑 사건도 인간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인류언어학적 논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분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뜻과 계획과는 무관하게,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두지 않는 인간의 뜻과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인간이 보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해도 또 어떤 최고 기술과 정보와 자원과 능력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이 오케이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공중 분해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원과 여건과 능력은 물론 그럴싸한 계획을 세워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주신 이도 그분 하나님이다. 그분을 무시하거나 부재한 계획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너무 어리석지 않는가?

 

인간끼리 모여서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을 부인한 인간제국을 최초로 건설하려 했는데 청사진대로 완공되기도 전에 철저히 파괴된 것이 바벨탑이다. 역사적으로 인간끼리의 유토피아는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대 최고의 부귀영화를 자랑했던 로마제국은 사치, 노예, 근친상간 같은 성적 타락으로 망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왜곡되고 우상숭배로 타락하면서 멸망은 시작되었다. 교회가 부패하는 바람에 로마는 망한 것이다.

 

역사상 최고선진문명을 자랑하는 미국은 이차대전이 종전된 1945년부터 세계의 제국이 되었다. 이제 겨우 70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쇠락의 기미가 완연하다. 그러나 전 세계가 경제 불황에 시달려도 미국은 괜찮고 몇 주 전에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라 시인했다. 그럼에도 막상 미국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미국의 미래가 분홍빛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자식을 키우기는 물론 생존하는 것마저 두렵기만 하다. 이 또한 그 궁극적 원인은 미국에서 예수 십자가 복음이 쇠락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의 권능이 사라지고 약해졌기 때문이다.

 

왜 불신자는 풍요롭게 사는가?

 

다시 말하지만 물질문명 자체가 사악한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부재하는 문명은 반드시 더럽고 추해질 따름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는 불신자들이 더 풍요롭고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국가인 중국이 미국 다음의 제2의 제국이 되어가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인간의 죄를 정확히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아무 벌 받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갈수록 더 번창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반드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마지막은 결국 멸망이라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인간적 시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청사진에는 철저한 실패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당장의 벌을 일일이 주지 않을 뿐이다.

 

또 일일이 벌을 주면 그들이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은 불신자들이 깨달아 돌이켜서 당신께 돌아와 깨우침을 받을까 당신께서 염려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해도 들리지 않게 했다고 한다.(사6:10) 이 얼마나 놀라운 진술인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이 땅의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쾌락과 번성과 풍요만 추구하고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그냥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얼마나 갈급하고 허망하며 사악하기까지 한지 그 안에서 탐닉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벌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그래서 마음에 상실한 그대로 살게 해둔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이 상실한 마음이라는 것과 또 그 상실한 마음으로는 참 행복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벌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이 땅을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가 전혀 없고 짐승, 아니 물질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이 택한 백성들은 들으면 들리고 보면 보여서 깨달아 당신께 되돌아가 당신의 고침을 받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더 고달프고 상처와 시련이 많은 이유도 딱 하나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또 달리 말하면 쉽게 현실적 복을 준다고 우리가 더 잘 믿고 따를 존재가 아님을 그분이 더 잘 아신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한다고 인간의 진짜 복도 아님까지 그분이 아시는 것이다.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합당할 때만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그런 과정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실상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의 일생이 선과 의를 쌓아가는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적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밖에 안 된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잊거나 교제를 등한히 하다가 반드시 실패하게 되는 어려움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그 많은 상처와 한숨과 슬픔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품 밖으로 나갈수록 손해요 실패임을 체험하고는 다시 하나님에게로 되돌아온다. 나갔다 쥐어 터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의 되풀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보잘 것 없는 모습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정말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하나님 밖으로 뛰쳐나가는 빈도와 세기가 점차 현격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반비례해서 또 그와 동시에 하나님 그분과의 순전하고 진정한 교제와 동행의 빈도와 세기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겉모습은 여전히 후패하다. 어쩜 날로 더 궁핍해질 수도 있다. 세상에서 대접을 받기는커녕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핍박일 수 있다. 그럼에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특별히 현실의 질곡과 인간관계의 상처 중에 그런 수난 중에 하나님에게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권능과 사랑을 받아 누리는 기쁨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해서 초자연적인 신령한 감정적 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재물, 권력, 명예가 늘어난 것이 아니요 현실적 고난 중에 얻는 기쁨이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다. 또 자기 생각에는 아무래도 완전한 실패 같아서 후회만 남는데도 나중에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하고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그 앞에 항복하게 되는 일도 많아진다.

 

그러다보니 예수 십자가 밖의 삶은 상상도 못하게 된다. 아무리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많이 준다고 해도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내 혼자의 힘으로 나 만의 일은 시도도 하지 않게, 아니 꿈도 꾸지 않게 된다. 그분과의 교제와 동행이 깊어질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희열이 커진다.

신자가 누리는 복은 결국 다윗이 고백한 대로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고, 하나님 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낫다.(시84:10) 쉬운 현대말로 바꾸면 예수님 없는 재벌회장 되느니 예수님 모신 재벌그룹 수위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신앙여정은 그래서 날마다 자기 것을 버리는 싸움이다. 결국은 아브라함처럼 외아들마저 완전히 손을 떼고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과 나만의 일대일로 인격적 만남과 교제만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내 인생의 소망이요 목적이요 전부가 되는 자리다. 젊어서 아직 실감을 하지 못하는가? 그럼 최소한 여호와가 집을 세우지 않으면 헛수고라는 솔로몬의 고백은 할 수 있을 것이다.(시127:1)

 

바벨탑 사건은 물질문명이 사악하다든지 인간언어 다양성에 관한 설명이 아니다. 여호와 없이 스스로 세운 집은 아무리 궁궐 같아도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여호와가 세운 집이 초가라도 최고 아름답고 풍요롭고 무엇보다 견고한 장막이라는 것이다.

 

7/1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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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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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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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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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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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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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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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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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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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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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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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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