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 강해(6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12:1-4)

 

 

가나안이 더 열악하다.

 

아브라함은 우리처럼 나약하고 치사한 소시민이었고 계속해서 쓰러지는 믿음을 보였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당시로선 생존조차 보장 못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묵묵히 순종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갈대아 우르 땅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전의 인생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 즉, 구원을 얻는 첫째 요소이자 구원 얻은 실제적 모습이다. 현실 삶에서 죄의 본성에서 100%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죽기까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의 그 정체성의 변화는 완벽하게 이뤄지고 그 후 그에 대한 어떤 변경도 없다. 또 그 필연적 결과로 비록 실천은 더딜지라도 그 때까지의 인간 중심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100% 바뀌며 그분 뜻대로 살려고 헌신하게 된다.

 

그런데 완전한 떠남이 되려면 이전의 삶이 싫어져야만 하는 것은 필수이지만 충분조건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떠난 곳과 옮겨 갈 곳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면 어차피 어딜 가나 그게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지금은 한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에서 최고로 잘 살게 되었지만 제가 이민 올 때만 해도 정치 경제 특별히 자녀교육이라는 측면에선 미국이 월등 나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왕에 정든 사람들과 익숙한 환경을 쉽게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떠난 곳이 지극히 싫어야 함은 기본이고 반대로 가야할 곳이 지극히 좋아야 완전한 떠남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가나안과 우르의 생활 여건은 옛날의 한국과 미국 같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거꾸로 가나안이 훨씬 열등했다. 바벨론은 알다시피 세게 4대 문명 발상지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는 아주 비옥한 땅이다.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들이 최초로 제국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

 

반면에 가나안은 어땠는가?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표현한다. 먹거리가 풍부해서 그런 고급 식품까지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다.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미국 서부지역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주로 황량한 사막에 있는데 곡물 재배가 불가능해서 염소젖과 벌꿀이 주생산품이다. 정부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한다.

 

거기다 우상숭배도 가나안이 우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창세기 10장 족보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예들이 살았던 곳이 소돔과 고모라다. 또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 족속과 절대 통혼도 하지 말고 진멸시키라고 명했다. 흔히 하는 말로 영육 간에 아무리 따져 봐도 아브라함이 떠난 곳에 비해 가야할 곳의 상황이 훨씬 열악했다.

 

더 고달픈 곳으로 밀어 넣는 하나님

 

아브라함으로선 우르의 우상숭배에 진벌머리가 나서 기왕에 떠나려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더한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또 아브라함이 순종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다. 새로 가는 땅에서 우상숭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는 철저한 실패와 죽음임을 그곳 사람으로 보고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럼 우상숭배를 동일하게 하는 우르에서 그러면 되는데 왜 구태여 떠나야만 했는가?

 

비록 인간의 몸으로 오시긴 했지만 성령이 충만했던 메시아 예수님도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 받지 못한다고 했다.(마13:57) 예수님과 비교도 안 되는 아브라함이, 그것도 우르에서 아비 데라와 함께 우상숭배를 오래 했는데 그곳에선 어떤 메시지도 씨가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저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제가 한국에 계속 있었더라면 제 스스로 제가 부끄러워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배려가 자상하고 지혜가 뛰어나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신자들이 본문 말씀을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창대케 해주고 복의 근원으로 삼아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위에 도움을 베풀만한 현실적 여유를 주시고 또 그래서 의인이라는 칭찬을 받게 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한 땅에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사고, 가치관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의 근원과 창대한 이름이 된다는 뜻이다.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번성케 해준다는 일차적 뜻은 분명 자식이 많음의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당시의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 많은 자식들에게 여호와 신앙교육을 잘 시켜서 그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뿌리 내리고 번성케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흑암의 세력을 몰락케 만들라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를 하나님이 세상에서 구별하여 불러낸 뜻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의도를 알고 기꺼이 동의하고 자기 전부를 헌신 했기에 묵묵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인지 점검하는 새로운 기준

 

우리가 정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인지 점검하는 한 가지 기준이 더 생겼다. 떠난 곳이 지극히 싫을 뿐 아니라 가려고 하는 곳이 지극히 좋다고 절감해야 한다. 세상에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에 대해 분노와 저주가 치솟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그분과 매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교제 동행하는 것이 너무 좋아야 한다.

 

특별히 아직도 사탄에 미혹되어 예수를 멀리하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가슴이 미워질 정도로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야 한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증명하는 일상의 삶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주 기쁘고 보람차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영역에선 아브라함은 그 육신만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주민등록 주소지만 변경된 것이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과 영은 즉,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격체를 형성하는 실체는 사탄의 사악한 지배와 농간에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통치 아래로 영원히 귀속된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서 어둠은 완전히 물러가고 오직 빛만 있는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제부턴 오직 빛 가운데 있게 되었다. 우르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에 발을 딛는 순간 그는 천국에 입성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을 소망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 구원 안에 들어왔기에 기뻐했던 것이다.

 

오늘의 주제와 적절히 연결되기에 제 간증을 하나 하겠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먼저 믿은 집사람을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고 했다. 성경책도 내 눈 앞에 꺼내 놓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3년 전에 소천(召天)한 처형이 뉴욕의 여자 목사였다. 이분도 처음부터 믿은 것이 아니다. 유학생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너무 고달프고 스트레스가 쌓여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목사까지 되어서 온 처가를 개종시켰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한국에 나와 몇 년 살았는데 주일마다 차를 몰고 와서 집사람더러 같이 교회 가자고 했다. 남자 체면에 속이 좁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처와 두 아들만 교회 나가도록 했다. 그 후 하루는 점심을 먹으며 목사 처형이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제 둘째 아들더러 식사기도를 시켰다. 그런데 대뜸 첫 마디가 “우리 아빠 지옥 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는가?

 

저는 그 순간 요즘 말로 완전히 맨붕이 되었다. 교회 나가는 유익은 도덕적 권면을 들어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며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하여 마음의 평강을 얻는 정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 어린 아이가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인지, 순진한 아이를 세뇌시킨 교회와 목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아들에게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거꾸로 세뇌시킬 자신 또한 제게 없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꿈에는 아빠가 지옥 가서 힘든 모습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 한참 후에 더 중요한 계기와 이유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어쨌든 아이의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기독교의 본질

 

제게 간증을 청하면 항상 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출발이 지옥 형벌을 사면 받았고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체험적 확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나 목사가 이 본질을 전하지 않거나 약하게 전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교회 출석하지 않아도 비교적 선하게 살 수 있다. 아니 실제로 불신자 중에 의인이 더 많다. 마음의 평강도 명상 운동 취미 활동 등을 통해 가능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필두로 믿음의 선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나온바 고향 우르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면 돌아갔을 테지만 더 나은 본향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다. 그곳이 가나안이 아니요, 우리로 치면 미국도 아니다. 곧 하늘에 있다고 했다. 천국을 사모했기에 절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에 이 땅에선 어떻게 살았다고 13절은 말하는가?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았다’고 말하지 않고 ‘증거했다’고 한다. 그냥 이국땅에서 외롭게 쓸쓸이 산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이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떳떳하게 증명하며 산 것이다. 살아 있을 때에 천국에 관한 자신의 소망과 믿음을 실제 삶에 확연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사탄에 미혹된 심령이었다. 가는 곳도 단 한군데의 예외 없이 우상숭배가 성행했다. 성경에 따르면 그가 많은 사람들과 우여곡절이 많은 관계를 맺었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평생 외톨이였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평생 고독한 자리로 부름 받았다. 예수 처음 믿어서 지금까지 아브라함처럼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증명하며 살고 있어야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죄악으로 타락하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종교도 그렇다. 기독교는 대형교회와 목사의 비리로 썩는 냄새가 진동한 지는 이미 오래다.

 

신자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종교인이나 커비우즈 교회의 교인으로 불려 나온 것이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따로 세워졌다. 평생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아도 된다. 사방으로부터 핍박 대적 비방 멸시를 혼자 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와 있음을 누가 봐도 알게 해야 한다. 초대교인처럼 부활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흔쾌히 떠날 수 있었던 까닭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농간과 지배 아래 있는 세상과, 죄의 본성에 묶인 인간이 산출하는 결과는 전방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더러, 예수 믿는 신자더러 그런 곳으로 가라고 한다. 그 결과가 그들이 하나님만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은 두려워서 대적 못한다. 아브라함과 신자를 대적한다. 인정 동조는커녕 이해도 못한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그런 사탄의 놀이터에 혈혈단신으로 던져진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만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이 굶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이 메말라 절망의 나락에 빠지는 것이 진짜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어느 인간이라도 가장 먼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지(死地)에 몰아 넣은 것이 아니다. 당신께서 창조할 때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서 정말로 참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게 해준 것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어쨌든 늦은 나이에 흔쾌히 출발했다. 그럼 가야할 곳이 지극히 좋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했겠는가? 성경의 기록상으로는 아직은 하나님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적은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일방적이며 선도적인 간섭과 인도를 받은 것이다. 성령이 그의 영을 터치했고 그는 그분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다.

 

그는 우르에서 사람,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를 산 채로 불을 바치는 모습에 너무 괴로웠다. 우상 신전에서 동성애는 물론 난교 파티를 하는 성적 타락을 목격했다. 우르가 바로 지옥이었고 그 속에 아브라함이 있었다.

 

어쩜 강 건너 편에 있을 때에 우상 숭배를 했던 데라의 장남이라 오래 동안 그 타락상에 직간접으로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 죄악에 대해 묵인하고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절망감으로 변하고 그런 영적 갈등과 고뇌와 회개의 몸부림을 수십 년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방이 죄악과 우상으로 둘러싸여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완전한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인생에 기쁨 의미 가치 보람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을 그 때에 어떤 방식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아 언제까지 계속 엎드려져 있을 것이냐? 그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내가 너를 떠난 적도 한 순간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해서 불렀지 않느냐?” 그는 이런 음성을, 성령의 미세한 깨우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본문의 명령을 듣기 전이나 듣는 중에나 들은 후에 반드시 들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는 지금껏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토록 절망적으로 타락하도록 버려두시는지 한탄했지만 내가 너를 우상 숭배하는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게 했다. 그 장소 그 모습으로 살게 한 것이 바로 나다. 그 이유는 너로 그곳에 절대로 있을 곳이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아무 소망이 없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지하고 불쌍한지 네가 겪어야 정확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만 그보다 더한 가나안 땅에 가서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네가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어느 곳에 있든지 외국인이자 나그네로 살 수 밖에 없는 자가 바로 내 자녀이다. 내가 나의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며 또 그래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증표로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후손을 번성케 하며 복의 근원으로 삼아줄 것이다.”

 

부모와도 다른 하나님의 사랑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 이유가 하나 있다. 아비 데라에게 너무 실망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인 영적 충만은 부모라도 절대 채워주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또 그렇게 깨달으라고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세상에 대한 욕심 소망 미련이 철저히 부숴 없어져야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 아닌가?

 

우리 모두 불신자를 보면 안타까워 눈물이 절로 흐른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름 모든 열과 성으로 그들을 섬기고 전도한다. 그러나 상대는 도무지 꿈적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심령이 더 굳어지고 정반대의 반응이 되돌아 오기도 한다.

 

전혀 실망할 필요 없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고 감정이 앞서서 잠시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혼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천국 안에 있다는 증거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의 심령을 보고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세상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다.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니고 내 안에 내주한 예수님의 영이 흘리는 눈물이 나를 통해 나오는 것이다.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포기하거나 기껏해야 어떤 신인지 알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 형통과 출세만을 빌고 또 빈다.

 

잘 생각해보라.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그들도 남의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선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예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다. 예수님의 영이 영원토록 함께 하는 신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또 예수님의 영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천국부활을 소지했다는 증거이지 않는가?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특권은 이것이다. 언제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그분의 이 음성을 얼마나 많이 듣느냐의 싸움이다. 역으로 말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절망하느냐의 싸움이다. 제단에 눈물을 뿌리지 않는 믿음은 절대 그분의 기쁨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7/3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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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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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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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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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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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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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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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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