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4)

 

새해 벽두에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은 인간만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당신과 교통이 가능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살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궤적을 추적 분별할 수 있는 영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이 있음을 알고 기억하고 평소에 그 의미를 고뇌한다. 필연적으로 영원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앗아가는 절대자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또 그 바탕에서 자기 실존의 정체성을 파악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죽음과 관련된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선물이 있다. 기억과는 정반대로 망각할 수 있는 기능이다. 매일 매시간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우울, 비관, 염세에 빠질 수 있다. 죽음을 비롯해 지나간 잘못과 실패를 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주 큰 은혜다.

 

오늘은 2018년의 첫 예배다. 새해 벽두에 가장 먼저 할 일도 바로 지난해의 안 좋았던 일들을 깨끗이 깡그리 잊는 것이다. 그 일들로 올해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새해는 정말로 새해여야 한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인생 말년에 자신의 사역을 회상하며 앞으로의 각오를 밝힌 신앙고백이다. 비록 신년의 결심은 아니나 그 내용이 신자들 삶의 중요한 계기에 즉, 새해 아침에 적용이 가능한 의미가 담겨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바울

 

그런데 바울은 힘들었던 일만 망각한 것이 아니었다. 한 일 뒤에 있는 모든 일을 잊었다.(13절)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고 얻었거나 이루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12/13절) 그럼 사실상 좋은 일과 뭔가 이뤄낸 성과들을 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나 바울의 경우는 그와도 전혀 달랐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높이려는 아주 끈질기고도 교묘한 성향이 있다. 지난 성공을 생각하다보면 자칫 과도한 자신감이 생긴다. 이번에도 이렇게 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앙 생활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나태 타성 교만에 젖을 수 있다. 성경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매일 매순간에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권능과 은총에만 전적으로 또 겸손히 의존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바울은 알다시피 각처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십자가 복음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쌓은 사도 중의 사도였다. 이미 당대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야단을 쳐도 찍소리 못할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직 잡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완전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자세로 남은 생애를 살겠다고 한다. 그것도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처형을 목전에 두고서 말이다.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순종 충성하겠다는 것이다.

 

백지 상태라고 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면서 두 손과 두 발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 있는 푯대, 부름의 상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간다고 했다.(14절) 그 상이 무엇인가? 큰 교회도, 가장 위대한 사도도, 심지어 성경의 저작도 아니다.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으로 어찌하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10,11절)

 

그는 매일 부활 소망을 붙들고 살겠다고 한다. 역으로 말해 죽음을 망각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기억하며 살았다. 바울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이다. 당연히 불신자들처럼 이 땅이 전부로 알거나, 죽음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에게만 마치 안 닥칠 것처럼 착각하며 살지는 않았다. 그는 또 바리새인이었기에 먼 훗날 마지막 심판 때에 부활이 있음도 믿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막연한 소망에서 훨씬 더 진전한 믿음이다.

 

그가 어떻게 고백했는가?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고후5:8) 이 땅의 장막은 결국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영원한 집을 마련하고 있음을 알기에 이곳에서 고난 중에 탄식하지만 하늘의 처소로 덧입기만 간절히 사모했다.(고후5:1,2) 한마디로 어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부활체로 살고 있는 초대교회 신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 부활과 연관해서 이런 뜻도 분명 있다. 관례대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때에 이미 완전히 탈진했다. 처형대 나무 틀을 지고갈 수 없어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져야 했다. 창에 허리가 찔리고 피를 쏟으며 극심한 고통으로 아주 빨리 운명하셨다. 도무지 되살아날 가능성이라곤 전무했다.

 

그런 처참하고도 완전한 죽음이 아니라 육신이 멀쩡한 상태로 죽었다면 육신적 부활에 대해 제자들이 뚜렷이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며 큰 감격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 후에 주님이 고기를 구워 드신 것도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하나로 회복된 존재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 생생히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최초로 순교하는 장면 또한 그렇다. 얼굴 표정이 너무나 온유했고 하늘 영광의 빛이 비춰 나왔다. 죽음에 대한 염려와 공포는 눈을 닦고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어느 누구에게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평강과 자유와 기쁨이 넘쳤다. 모든 목격자들이 하늘에 스데반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장막의 아름다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예수님의 대적자인 바울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로 오는 광채와 소리를 통해 일대일로 대면했고 삼일 간 봉사가 되었다.

 

틀림없이 금식하며 죽기 살기로 시력을 회복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또 그때까지 예수 믿는 신자들을 핍박한 잘못도 철저히 회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왜 그런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그 삼일 간은 백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음부에 자기 영혼이 완전히 잠겨버리는 실질적 죽음을 체험했다.

 

그러자 전혀 생면부지의 아나니아라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아주 평범한 신자가 성령의 인도로 찾아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안수해주자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이 바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의로, 흑암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바울은 스스로의 고백대로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바울을 포함해서 부활이 먼 훗날의 막연 소망이 아니었다. 부활은 그들로선 이미 목격한 진리요 사실이었다. 지난해 마지막 설교 때에 말씀드린 대로 부활은 하나님의 확정된 미래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천국이 강력히 침노했고 또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써 부활은 이미 실현된 과거가 되었다.

 

그에 따라 바울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지하고 있었다. 부활을 믿는 자가 아니라 부활 생명체로 살고 있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요17:3) 이는 대단한 진술이다. 예수를 알면 영생을 알고 믿어지며 소망이 생기게 된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영생 즉 부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알기에 부활체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 믿음의 엄청난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 모른다. 우리가 다 겪었듯이 사람들은 몇 년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간이라도 빼줄 것같이 섬기고 전도해도 믿지 않는다. 예수가 성자이고 역사상 최고의 선행을 베풀었지만 역사상 최고의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안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교리도 수긍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부르지는 않는다. 예수가 기독교의 창시자임은 인정하는데 그리스도임을 즉 개인의 구세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비록 지금도 우리가 우리를 볼 때 너무나 초라하고 죄와 욕심에 찌들어 있어도, 스데반과 바울 같은 초자연적 체험은 없어도,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특별히 그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할 때에 절로 눈물이 나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가 잘나서나 경건해서가 절대 아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 까닭이다. 이미 우리가 부활했다는 증거다. 육신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확정된 미래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라는 존재 전체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인생의 극적 계기를 통해 완전히 그 방향을 유턴했다.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은혜 안에 완전히 잠겨 있다. 우리가 딱 하나 아는 사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진리 하나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며 또 이전의 그 모습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다. 설령 모태 신앙으로 그런 감동적 유턴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만 보면 너무 불쌍해서 예수부터 전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영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에서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었다.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서 그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이미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산 채로 맹수 밥이 되거나 불에 태워죽을 때에 찬양하며 기뻐했다. 지금은 핍박이 없어 그런 일이 없지만 만약 동일한 핍박이 닥친다면 우리 중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대신에 세상과 사람들이 조성해내는 것들에,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롭고 강력해 보여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의 고난을 당하면 연약한 심신이라 괴롭고 심령에 두려움이 덮친다. 죄와 시험에 수시로 넘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 중심의 삶을 살면 최대한의 실패요 사망인 반면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최대한의 성공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지난 세월 동안 많이 체험했다. 시험과 죄에 넘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에겐 은혜가 된다.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 돌아오게 되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오직 주님만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울의 인생결산서

 

새해에 여러분이 소망하는 현실적 목표들을 구체적으로 맘껏 계획하셔야 한다. 모든 인간적 실력과 세상의 수단을 동원해 달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것들은 시공간으로 제한 된 물질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다. 따라서 세상의 것들에 영원하고 진정하며 최우선의 의미와 가치가 결여된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은 후에 악하고 탐욕적인 계획을 세울 리는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그대로 이뤄내야 한다. 간혹 잘못된 계획이라면 하나님이 기도 중에 고쳐주신다. 하나님은 신자의 형통을 금지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신자로서 반드시 먼저 행할 바는 따로 있다. 바울처럼 부름의 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하다. 그는 부활의 권능뿐만 아니라 고난에도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지하 감옥에서 부활의 권능만 소원했다면, 제대 말년의 병장이 제대날짜만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듯이, 매일 천국 갈 것을 소망하며 하늘의 위로와 평강만 구해야 한다.

 

바울은 그 대신 분명히 고난에도 참여한다고 했다. 그는 그 감옥 안에서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빌립보 교회에 보낼 환난 중에 기뻐하라는 서신을 작성했다.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만 전념했다. 하루하루를 주님 앞에 서있는 인생이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그 소명에 충성헌신 했다. 또 바로 그런 순종으로 인해 지금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빌립보 교인들더러 고난 중에 기뻐하라는 권면이 절대로 빈말이나 종교적 립서비스가 아니다. 그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회심한 후로는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실제로 그의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 외의 일들에는 참 기쁨이 없었다. 소명을 실천할 때만이 참 기쁨이 따른다는 것이 그의 인생결산서이자 유언이었다.

 

바울은 일생토록 매일 매순간 자신의 죽음을 고뇌했다. 실제로도 수도 없이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 때마다 부활의 영광으로 승화시켰다. 부활체로 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하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력투구했다. 다른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십자가 복음 외에 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16절)

 

신자의 새해 계획

 

한마디로 바울에게는 새해 결심 같은 것이 구태여 없었다. 매일을 소명자로 살고 있었다. 역으로 말해 신자들이 새해에 반드시 결심해야 할 내용도 바로 그것, 소명자로 살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구태여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새해의 계획이어야 한다. 지금 현재 소명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하면 된다. 매일 소명대로 살고 있다면 해가 바뀌어도 새로운 계획이 필요 없지 않는가?

 

눈앞에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정신없이 일을 처리할 때가 간혹 있다. 그때는 잡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다른 일로 스트레스도 받지 않지 않는다. 지난 일들, 나쁜 일은 물론 좋은 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매일을 새롭게 하고 새해를 정말로 새해답게 보내는 유일한 방안은 구체적 소명을 실현하는 것뿐이다. 그런 소명이 있으면 자연히 자신의 전 존재, 전 삶, 전 인생을 그 소명에 걸 수 있게 된다.

 

아직도 신자로서 내 소명이 뭔지 모르겠다면 참으로 곤란하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거창한 목표를 제발 세우지 말라.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그렇게 경건 신령하지 않고 특별히 믿음도 좋지 않다. 우리를 위한 하늘의 장막은 이미 아름답게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이 땅의 장막을 아름답게 꾸미면 된다.

 

쉽게 말해 세계 최고의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직장인, 성도가 되는 것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 또 그것이 신자의 소명이다. 우리 일생이 바로 남편 아내 아빠 엄마 직장인으로 사는 것이지 않는가? 그것 외에서 소명을 구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정확히 말해 최고보다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다른 이와 전혀 다른, 상대에게 가장 합당한,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직장인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상대가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상대가 내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어야 한다. 나로 인해 상대에게도 부활 생명이 활기차게 살아나게 해야 한다. 때로 다툼이 있을 수 있으나 영과 영이 통하고 그 영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을 빌립보서 4:8에서 풀어 설명한 대로 종말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옳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컨대 자식이 부모님은 세상의 부모와는 전혀 다르고 부부사이도 다른 부부와 전혀 다르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도 꼭 아빠나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결혼생활을 할 것이며 그런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룻이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듯이 영적인 생명력으로 서로 연결되고 교통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무엇보다 존경을 받아야 한다. 두 사람만의 완전한 인격적 교제가 어느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모습을 이루며 예수님의 사랑의 틀 안에 함께 묶여 있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새해 계획

 

우리 커비우즈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교회 조직체의 질적 양적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지 않아도 된다. 제 성향도 아니고 성경이 요구하는 바도 아니다. 여러분이 제가 오기 전 오래 동안 많은 고난 중에 인내 위로하는 수고가 많았다. 또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부임한 이래 지난 2년간도 저를 이해하고 따라주며 기도해준 것에 참으로 감사한다.

 

무엇보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서 서로 세심하게 배려하며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런 모습은 지난 2년간으로 충분하다. 우리만 좋으면 신자일 뿐이지 소명자로 사는 것은 아니다. 바울과 성경이 말하는 새해 결단과는 거리가 멀다.

 

그 교회 모임에 갔더니 재미있고 단결이 잘 되고 잡음이 없더라는 정도는 세상 집단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들 모임에 갔더니 머리를 꽝 때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뭔가가 있더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서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는데 생판 불신자인 내 영혼에도 위로가 채워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보니까 확인이 되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들이 더 힘든데도 힘에 지나치도록 도와주더라, 너무나 큰 환난 중에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있고 또 사소한 고민에 불과한 나를 더 위로해주더라,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 세상 사람과는 뭔가가 완전히 다르더라, 도무지 이상한 사람들이더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해야 한다.

 

우리 식구, 우리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깨고서 소명자들의 모임으로 서야 한다. 아직도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이웃들을 적극 찾아가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빛이 비춰지게 해야 한다. 함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어려운 사정을 들어주어야 한다. 예수님만 머리로 모시고 소명을 실천할 때에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고 참 기쁨이 넘치는 것을 우리 각자와 우리 모임에서부터 매일 매순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거창한 목표를 세울 것 없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할 실력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다. 사랑을 베풀 범위를 아주 좁혀야 한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 그것도 평소에 주님 사랑에 가장 실패한 사람 두서너 명을 올해 안에 제대로 사랑하겠다면 올해의 계획 아니 소명으로 족하다.

 

단순히 그에게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면 된다. 그것이 전도요 부흥이다. 부활 생명을 소지했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인들 못하며 무엇에나 경건하고 참되지 못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서로 사랑하며 소명자로 살겠다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과 은혜로 우리 새해 계획을 이뤄주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 자꾸만 소명 외의 일을 구하니까 신앙생활이 힘들고 삭막해지는 것이다.

 

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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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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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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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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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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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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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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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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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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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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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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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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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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