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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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15-2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는 교회에선 봉사와 헌금에 열심을, 세상에선 시민적 의무에 충성을 다하라는 단순한 뜻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교만해지려는 죄에 관한 문제임을 지난 주에 살펴봤다.

오늘 다시 보는 이유는 로마는 분명히 아주 악한 권력인데도 예수님이 옳다 그르다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도덕적 성적 타락이 극심했고 우상을 숭배하다 못해 인간인 황제도 숭배했다. 약소국가를 침략해 수탈했고 패전 국민을 노예로 혹사하며 인격적 파괴를 자행했다.

예수님이 무력을 사용하여 항거하라고는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최소한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처럼 비폭력 평화적 저항은 가르칠 수 있었지 않는가? 예수님은 오히려 세상 최고의 악인 로마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셨고 반면에 당시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데 가장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은 저주했다. 거기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니, 신자들로선 예수님에게 뭔가 불합리한 점이 있는 것 같아 석연찮게 여겨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완용 같은 예레미야 선지자.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힌트가 구약성경에 나온다.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다. 그는 적국에 저항하지 말라는 정도를 넘어 아예 항복하고 협조하라고 권면하는 일이 그의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남왕국 유다는 그 약 150년 후인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했다. 멸망당하기 약 20년 전부터 다니엘과  세 친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유다의 마지막 두 왕은 느부갓네살이 세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자연히 유대인들의 바벨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애굽의 힘을 빌려 바벨론의 강압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 중에 유대 전 국민 중에 오직 예레미야 혼자서 바벨론에 항복하고 협조하라고 외쳤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시대에 민족의식이 투철한 자들은 해외로 도피해서 열강의 도움을 구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 갔고, 김구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기에 애국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반면에 일본에 항복하는 것만이 한국이 사는 길이라고 홍보 협력한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의 괴수로 욕을 먹고 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완용과 같은 입장이다. 그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때문이 아니다. 사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져서 엉뚱한 고집을 피운 것도 아니다. 전 국민이 자기를 미워하고 반대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실제로 목숨이 위험했던 경우도 수차례 겪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권면을 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했기에 그도 그렇게 선포했던 것이다. 예레미야 개인의 인간적 상식과 경험과 지혜를 초월하는 강권적인 성령의 인도에 따랐을 뿐이다.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은?

그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 포로로 잡혀간 그 곳에서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29:4)고 하셨다. 나무를 심어 열매를 먹으려면 몇 십 년이 걸린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70 년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상응한다. 나아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29:7a)고 했다.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29:7b)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을 하셨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29:11a)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들이 곤경과 환난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일본에게서 독립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일본 가서 살며 일본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평안의 뜻이 되는가?

만약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마쳤다면 정말로 이상한 분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한 말씀을 덧붙였다.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너희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29:11절b)인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29:14절)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독립이라는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70년은 그 길을 가려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중간과정이라는 것이다. 또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화적인 비유를 하나 들겠다. 집 주인이 먼지떨이로 방 안을 청소하는 것은 가구를 소중히 아껴서 깨끗하고도 광택이 나게 유지하려는 뜻이지 먼지떨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청소를 잘하기 위해 먼지떨이도 수리하고 잘 보관한다. 이스라엘더러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빌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먼지떨이에 때가 묻고 낡아서 못쓰게 되면 아무 미련 없이 버린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 직전에 바벨론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졸지에 넘어져 파멸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51:8) 이는 당시로선 어느 누구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유다가 그들에게 멸망당하고 있는 판에 어찌 바벨론이 망한다고 예측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나라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있기에 아무도 감히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쉽게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서 “졸지에” 즉, 아무도 예상 못할 때에 파멸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먼지떨이가 가구의 먼지를 탁탁 털어낼 때에 가구는 아플 수 있다. 그렇다고 가구더러 청소를 받지 말고 버티어라, 혹은 먼지떨이에 대항해서 부숴버리라고 말하는 주인은 없다.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않은 이유다.

바벨론을 위해 기도해주라는 뜻은 오직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궁극적이고도 기본적인 관심과 사랑은 이스라엘에게만 향해 있었지 바벨론은 사실상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도 지금 유다가 도덕적 성적으로 타락했고 여호와 외에 이방신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로 인해 당신께서 그들을 멸망시키는 와중에 그랬다. 당신께 배교하여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고, 심지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있는 중에도 죄를 지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었기에 당신께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면서 바리새인을 꾸중한 본심도 로마를 먼지떨이로 사용해서 당신이 사랑하는 가구이자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려는 것이다. 당신께서 지금 먼지떨이로 로마를 사용해 열심히 먼지를 털고 있는데 로마에 항거하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정작 인간을 묶고 있는 다른 힘

그런데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려는 목적이 그들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차원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정작 더 깊이 알아볼 측면이 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시키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당신께서 택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포로로 잡혀가게 한 이유도 바로 그들이 택한 백성답지 않았고 하나님이 택해주신 목적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당신께서 사랑하는 백성들로 포로로 잡혀가도록 계획했다. 현실에서 적국의 포로가 되게 하더라도 그들로 다른 것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정작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하는 인간을 묶고 있는 고난이 현실의 적국이 아니라 어떤 다른 힘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동전으로 세금을 바친다는 것이 인간 황제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일로 여겼다.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민족적 영적 자긍심이 구겨졌다면 자기 성찰과 회개로 이어지던지,  아니면 로마에 항거하던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죽이는 구실로만 악용했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나아가 자기 민족을 살리는 선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그렇게 착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니라.”(롬1:32)

율법에 따르면 과실치사는 용서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고의적 살인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졌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살인은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는 너무나 큰 죄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이 그 규정을 모를 리 만무하다.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고의로 살인했다.

그들이 미쳤거나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가장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맨 정신으로 주저함과 죄책감 없이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이 무엇인가에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 외에 이 일을 설명할 방도는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옳다고 우겼다. 무슨 뜻이 되는가? 자기 속에 자기가 둘이 있다는 것이다. 한 쪽의 자기가 다른 쪽의 자기에게 끌려간 것이며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아담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에게 심어놓은 죄악의 씨앗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사악하고 더럽고 추하며 흉악한 것으로 채운 것이 아니다. 자기를 바로 자기에게 노예로 묶여 있게 한 것이다. 거기다 인간의 더 큰 불행은 자기가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속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만약에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참 평안을 주는 길이라면 예수님이 왜 안 가르치셨겠는가? 베데스다 연못 한 귀퉁이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 치유해주셨지 않는가? 로마로 향하는 평화적 행진의 맨 앞장에 반드시 서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달리 바벨론 포로가 되는 것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했다. 아무리 현실의 먹고 사는 것이 풍족하고 고난이 없더라도 인간이 이런 노예가 된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한다.

욥이 받은 참된 축복

성경에서 욥만큼 어마어마한 고통을 졸지에 당한 자는 없을 것이다. 전 재산은 물론 전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전신에 악창이 도져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격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우리 같으면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만 들어도 심장마비로 죽었거나, 미쳤거나, 인생을 포기했거나, 최소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더 이상 찾지도 않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과 마누라도 그렇게 권면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게 말로도 전혀 원망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하나님께 고난 받기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 그 심한 연단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를 만나주었다. 그에게 백 개가량의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흔히 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의 배경에도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상상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하고도 완벽한 섭리와 주권이 신비하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그 역사하는 과정까지 구체적으로 안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그 모든 행사가 정말로 옳고 선하며 아름답고 풍성하다는 진리 하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육신의 고통보다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든 일이었던 고통의 원인을 몰라 하나님께 가르쳐달라고 대든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도 깨달았다.

욥이 자기 내면의 경건하고 성결한 도덕성을 열심히 키운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종교적 결단과 헌신으로 가득 채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영혼을 단 한 번 터치해주자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자기 속의 모든 것을 완전히 비우게 되었다. 자기를 묶고 있던 자기라는 사슬에서 드디어 놓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자기가 자신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하나님께 대든 것도 사실은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만족케 만들려는 헛된 시도이자 자기가 자신에게 노예가 되어 있다는 반증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야 참 자유를 알고 누릴 수 있다. 이해는커녕 불평과 원망과 불신만 앞서게 하는 고난도 선하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완전한 선(善)이라는 것을 욥은 깨달은 것이다. 성령 충만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모든 인간은 재앙이자 죽는 길이라고 여겼던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일도 선하신 하나님만의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욥에게 일어난 변화는 오직 하나였다. 인간 내면에 세상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만 채워지는 빈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아주 심오하고 고상하고 난해한 “진리”(眞理)라서 많은 수양과 정진과 탐구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당신을 닮게 창조했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事實)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회상하게 된 것뿐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물은 질문 모두가 단순히 창조에 관한 것들이었지 않는가?

바꿔 말해 현실의 고통이 없어진다고 인간이 결코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에 충족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묶고 있는 자기라는 족쇄에서 풀려날 수가 없다. 다른 것들에서 자유를 얻은 것 같아도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을 평생 동안 더 노예로 묶을 뿐이다. 사단이 심어 놓은 절대적으로 견고한 마음의 진이자 거짓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속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비참한 영적 실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신자들은 자기를 노예로 부려 먹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는 모른다.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그 사실을 감지한다. 자기 속의 자기가 실제 자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은 가진다. 지금의 자기가 온전한 자기가 아니며, 뭔가 부족한 자기이며, 최소한 이것은 아닌데 같은 인식은 갖게 된다. 흔히 말하듯이 바로 그래서 자아를 충족하려고 하고 그 이전에 자아를 발견하려 한다. 자기가 완전한 자기라는 확신이 있다면 자아를 충족 아니 발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불신자들은 취미, 일, 돈, 명예, 지성, 권력, 심지어 남녀 간의 불같은 사랑을 최대한 추구해본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면 종교에도 귀의해보지만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찜찜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기분 좋지 않는 느낌을 차라리 잊으려고 술, 마약에 손을 대다 중독되고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취미, 일, 사랑 심지어 선행과 믿음으로도 충족되지 않을 뿐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느낌이 도리어 더 강해진다. 그래서 자아충족된 것처럼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걸기까지 한다. 또 남들에게 나이가 들수록 더 텅텅 비워져가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자기가 소유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감추려고 몸부림친다.

그럼에도 끝까지, 정말 마지막까지 완악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모든 세상 사람이 다 사악하다고 믿는 로마에 대해 저항하라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로마에 지배 받는 것이 너희의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참 뜻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리지 않으면 너희 영혼에 만족은커녕 평안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너희에게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지 않고 어떻게 평안을 바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들더러 너희 전부를 하나님께 도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 같은 현실적 고난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데도 그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요,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순교하라는 뜻도 아니다. 너희 속이 텅 비워있다는 간단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사실 그대로 실토하라는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해지라는 것이다. 정말로 정직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이다. 제발 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평화적 저항을 가르치고 실천했다. 흑인의 인권을 회복하고 세상에서 소외되어 비참했던 자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분명히 위대한 업적을 낳았다. 예수님과 비교하자면 주님이 세리, 창녀, 고아, 문둥병자 같이 유대 사회에서 상실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위로하고 교제하며 사랑으로 섬긴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일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일은 킹 목사처럼 인간 중에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나온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려고 성육신 하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킹 목사의 자녀들이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킹 목사의 유산과 저작권을 두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평화 행진을 했으며,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운 자녀들이 그 모양이다.

인간이 고안한 사상, 철학, 도덕, 종교는 분명히 선하고 경건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마저도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에 계시하신 진리와 은혜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결코 자유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심지어 아주 사악한 것으로 둔갑한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인간인 로마 황제에게 절할 수는 없다는 간단하고도 분명한 영적 진리마저 예수님을, 하나님 되시는 그분을 죽이는데 악용하듯이 말이다.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들어 주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해져야 인간으로서 고상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최소한 하나님 그분의 품 안에 거하기라도 해야만 짐승이 아닌 인간다워질 수 있음은 너무나 지당하다.

하나님 당신을 경배하라는 것이 인간 쪽의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인간의 공간에 당신의 사랑과 인자와 긍휼과 권능과 신비로 듬뿍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니 제발 너희의 속을 완전히 비워서 당신 앞으로 나오라는 초대다. 네 스스로 자아를 충족하려 들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호소다. 또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 모든 인간이 당면한 가장 큰 불행이자 딜레마임을 제발 깨달아서 더 이상 네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욥 같은 불평이 생기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 옳다 그르다 언급조차 않은 것은 당신이 택한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깨끗케 하려고 지금 당신이 만든 먼지떨이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온전히 바치라고 했다.

그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외식하는 가면을 벗으라는 것이다. 네 있는 모습 그대로 제발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의 문제도 당신께서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더 외식이 심해지고 또 종교로 자신을 더 치장만 하려 드니까 나중에 당신의 먼지떨이인 로마를 더 세게 사용해 성전마저 파괴했지 않는가?  

혹시 지금 욥 같이 이해 못할 고난 중에 있어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리새인처럼 세상 악에 고개를 숙이기 싫어 영적 자존심이 손상당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 악에 수수방관하는 것처럼 여겨져 의아심과 불평이 드는가? 기억할 것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행사가 완전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오직 당신께서 택하신 신자 우리에게로만 향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무지 이해 안 되는 그 모든 고난과 세상의 죄악마저도 신자에게 가장 유익하고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 중간과정일 뿐이다.  

혹시라도 세상의 고통, 죄악, 상처, 유혹, 시험 등을 내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가? 물론 그러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것은 예레미야처럼 신자의 내면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욥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열심과 믿음마저 포함하여, 내려놓고 온전히 항복해야 한다. 자기가 속고 있고 자신을 묶고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참 자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참 된 믿음이다.  

역으로 말해 혹시 지금도 하나님이 현실의 고난과 인간관계의 상처를 허락하여 자기를 고달프게 만들고 있다면 지금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윤리적 종교적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기 이전에 바리새인들처럼 믿음, 영성, 진리마저 동원해서 자기를 치장하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를 속이려들고 있지 않는지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예수 믿기 이전처럼 여전히 자신이 자기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말이다.

2/16/2014

이선희

2018.04.27 00:43:05
*.193.65.237

목사님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스크랩해놓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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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강해 #63 - 창12:1-4)

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 강해(6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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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31
  • 조회 수 783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부활절 - 요17:1-5)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2013년 부활주일 설교 http://youtu.be/-mgg9qhnS_s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 마18:1-4) [2]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http://youtu.be/Bce9n74I0g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강해 #195 - 마21:1-11) [1]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강해 (195) http://youtu.be/RU-_SvdrAC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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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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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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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7
  • 조회 수 746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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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 조회 수 735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 master
  • 2022-02-27
  • 조회 수 724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 master
  • 2018-03-25
  • 조회 수 722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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