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되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쓰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에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주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27:1-10)


인간이 행한 최선의 반성

마태는 유다가 자살한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관계없이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 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 독자더러 두 사람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지만 유다의 자살 사건은  마태만이 기록하고 있기에 그런 의도는 더 분명해진다.  

저자는 유다 자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재판을 로마 총독에게 이관한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1.2절)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은 로마 총독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뿐인 그들로선 필연적 조처였다.

그리고 유다가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뉘우친(3절) 배경에 대한 보충 설명도 된다. 유다는 스승을 밀고한 후에 전개되는 사태를 예의 주시했고 십자가 처형을 직간접으로 목격했다는 뜻이다. 한 때의 스승으로 아무 죄도 없는 자가 온갖 멸시와 능욕을 받으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을 확인하고는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꼈고 자살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 독자가 볼 때에 유다가 비록 스승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이끈 큰 잘못을 범했지만 그 후의 반성은 인간이할 수 있는바 최선을 다했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우선 받은 돈 은 삼십을 돌려주었다. 노예 한 명의 몸값에 해당되는 헐값에 주님을 팔았고 되돌려주기까지 했으니 그가 꼭 돈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 돈을 대제사장은 받기를 거절했다.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는 함께 꾸며놓고서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지자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배신자의 말로는 또 다른 배신으로 망하게 되는 것이 인간 사회의 통상적 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이 치사하고 비겁하다는 뜻이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

본문 4절의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참으로 흥미롭다. 유다가 무죄한 피를 파는 큰 죄를 범했다고 실토하면서 이 핏 값을 너희에게 돌려주겠다고 했다. 예수를 죽인 근본적 책임이 나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로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그런 의도도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유다가 십자가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비로소 주님이 무죄한 것을 알았던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 죽을죄는커녕 사소한 잘못도 없음을 밀고할 때에 그가 몰랐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고발한 까닭은 로마나 유대 당국에 체포되면 주님이 뭔가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유대 독립과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럼 동조자를 규합하여 적극 참여할 의도로 유다가 밀고했다는 일부 신학자들의 해석이 본문으로 인해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사태는 유다가 도모했던 것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스승은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저주하는 나무에 달리는 죽음을 당했다. 지난 삼 년간 미운 정 고운 정 든 것과 무관하게 인간의 기본적 양심에 따라 절로 회개가 되었다.

유다는 자신의 뉘우침의 표시로 돈을 돌려주었으나 대제사장은 그런 부정한 돈을 성전고에 넣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 부정이 자기에게서 발단되었고 그 검은 돈도 자기가 주었다. 참으로 치사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 도덕적으로 분명히 잘못한 일을 종교적 의식과 규례로 위장하려 들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늘의 하나님이 크게 진노할 것이다.

대제사장은 거꾸로 유다더러 그 핏 값을 네가 당하라고 했다. 지금 예수님의 피를 흘린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이는 더더욱 비겁한 짓이었다. 빌라도마저 예수가 무죄함을 알고 이 사람의 피와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발뺌하자 유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고함쳤다.(25절) 예수 죽음의 최종 책임은 자기들이 지겠다는 것이다.

비록 백성들이 소리쳤지만 당시 정황으로는 대제사장의 사주나 허락 없이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말하자면 대제사장은 자기가 맹세했던 말조차 입을 싹 닦고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했던 것이다. 시쳇말로 화장실 갈 때와 돌아올 때의 표정이 돌변한 것이 인간이다.

유다 자살의 숨은 의미?

대제사장은 돈을 받지 않았고 틀림없이 유다의 성소 출입도 막았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유다는 성소에 돈을 던져 넣었다. 어쨌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형식은 갖춘 셈이다. 그런데도 자살까지 한 배경에는 흔히 쉽게 간과해버리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하나 숨겨져 있다. 그가 율법을 엄격히 지키려고 자살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본 강해 243번째에 말씀드린 대로 율법은 형제 즉, 유대 동족에게 거짓 증거를 하여 억울한 형벌을 받게 했을 때는 반드시 그 거짓 증인에게도 동일한 형벌을 주라고 규정하고 있다.(신19:14-21)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생명은 생명으로 갚게 했다. 유다가 재판에 증인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고백대로 무죄한 스승의 피를 팔아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했다. 동일한 형벌인 죽음으로 갚고자 하는 책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물론 유다가 예수님을 밀고한 이유, 그 후 진행되는 사태와 결말에 대해 느꼈을 소회, 자살을 시도한 동기 등에 관해선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성정은 동일하다. 성경 기록의 앞뒤 문맥과 행간의 의미를 바로 우리의 평소 생각, 습관, 행태에 비추어 보면 개연성 있는 추정이 가능하다. 유다는 어쨌든 자기의 잘못을 율법대로 자기 죽음으로 갚으려 했던 것 같다. 이는 보통사람이 쉽게 실행할 수 없는, 아니 마음먹기도 힘든 대단한 회개였다.  

다른 한편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가 빌라도 법정에까지 따라왔는지 또 십자가 현장에 동행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네 목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마26:73)고 비자가 지적했듯이 갈릴리 방언의 엑센트가 너무 세었다. 어쩌면 금방 또 탄로 날까 두려워서 어디 구석에 숨었을지 모른다.  

이에 반해 유다는 떳떳하게 자기 잘못을 사람들 앞에 시인하고 고백했다. 돈을 돌려주었고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어느 모로 보나 그가 더 의로운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에게 영원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열두 사도의 자리는 맛디아로 교체되었다.(행1:26), 천국의 24 장로의 자리에서 그를 볼 수 없다. 주님도 마지막 만찬 때에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유다를 직접 정죄했다. 죽음보다 못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다가 베드로보다 더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죄의 본질

지난주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간단한 팁을 말씀드렸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나 문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선 “스스로”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유다는 스스로 뉘우쳤고(3절), 또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5절) 회개하고 자살한 행동의 주체가 유다 본인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당연히 본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하는 법이다.

마태가 본문에서 ‘스스로’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자고 하는 바는 그가 하나님의 개입을 일절 배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재(不在)한 상태라는 뜻이다. 오직 인간의 본성적 사고에만 의존했다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두고 만사를 스스로 주관한다는 가치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사건을 다시 살펴보자.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의 입장에선 하나 잘못한 것 없다. 서로 피해나 상처를 입힌 것도 아니다. 맛있는 과일을 나눠 먹었기에 신나고 재밌어야 하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부끄럽고 두렵기만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서 인간 이성과 상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전제가 없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처럼 아담의 원죄는 하나님이 실존하시고 그분이 선악과 금령을 주었다는 바탕에서만 죄로 성립되고 또 이해된다. 다른 말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에서 모든 죄가 시작된다. 피조물인 인간으로선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꿔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면 그 생명의 왜곡 현상이  자동적으로 생긴다.

성경은 맨 서두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한다. 그 이후의 모든 기록을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라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 또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윤리적 종교적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님 당신의 품을 떠나면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임을 제발 기억하라는 것이다. 사형의 형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품에 계속 남아 있어야만 정녕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맹세의 형식을 빌려 인간과 사랑의 언약을 세운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타종교인으로선 선악과 금령은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에덴동산의 실존 여부도 동의하기 어려운데 선악과는 동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죽음의 형벌을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후손이 하나님의 진노 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너무나 불합리하고 그런 독선적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도 없다고 반발한다. 아버지가 빨갱이면 아들도 그렇게 취급한 연좌제보다 더하다. 연좌제는 1-2 대(代)만에 끝이라도 나지만 성경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사형수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며, 그 죄의 삯은 죽음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계시된 그분의 사랑을 배제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 죽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준다는 것이 어찌 인간의 이성으로 믿어지고, 아니 이해될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기독교 교리의 출발이자 핵심으로 이해하고 그치면 안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참 인간답게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바로 참 생명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 크신 사랑을 깨달으면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 주님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솔직히 유다가 베드로보다 더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도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높이려는 원죄의 흔적이 예수 믿은 후에도 아직도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두 회개의 정확한 비교

스스로 뉘우친 유다에 비해 베드로의 회개는 어떠했는가? 스승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했다.(마26:75)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또 정확히 그렇게 되었다. 나아가 바로 그 때에 그 말씀이 생각났다. 베드로 스스로 노력하고 의도하고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실상 성령이 시킨 회개다. 성령의 회개라고 해서 특별히 더 신령하고 경건했다는 뜻이 아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자기 존재와 실존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회개였다.

본문의 유다에게는 그런 회개가 없었다. 인간사회 윤리로는 둘 다 비슷한 성격의 잘못을 범했다. 둘 다 죄책감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회개의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어쨌든 둘 다 참회를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죽을죄를 지었기에 자기 생명을 걸고 회개했던 유다에게 구원은커녕 어떤 긍정적 효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유다는 자기 전부를 거는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감나게 이 둘의 회개를 비교하면 이렇다.  

베드로는 “나라는 존재가 겨우 이 모양 이 꼴밖에 안 되는가?”라는 절대적 절망에 이르렀다. 완전한 영적 파산을 실제로 겪었기에 너무나 비참하고 애통해졌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었고 자기에게서 어떤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성령의 간섭으로 절대적 절망 즉, 죽음과 방불한 위치에 다다랐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죽음의 형벌을 받은 셈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한 것이다.  

반면에 유다는 잘못을 고백하고 돈을 돌려주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무죄한 피에 대해 책임을 졌다. 그 이면의 궁극적인 뜻은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나의 나 된 실체를 스승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내몬 모습으로만 절대 판단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자기 꼴이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됨을 겸허하게 인정했다. 또 그런 자신의 실체가 너무나 애처로워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유다로선 그렇게 슬피 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성령이 간섭할 여지도 없었다. 자기가 행동을 지은 죄에 국한해서 스스로 선한 행동으로 바로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을 내 죽음으로 갚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로 최대한 보상했기에 자기의 의가 높아짐을  느꼈으면 느꼈지 슬퍼질 이유와 필요가 없었다.

유다로선 자기의 진정한 자아는 바로 이렇게 의롭게 죽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유다가 확실하게 인식 내지 의도했던 안 했던 원죄 아래 묶여서 오직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에만 따른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전혀 구하지 않고 자신을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증명해 보이려는 회개였다.

실제로 자살하는 자의 심리를 연구한 결과 몇 가지를 증명하려는 동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무죄함이나 억울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또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이 끝까지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죽을 용기조차 없는 비겁한 겁쟁이라는 비난을 반발하는 심리마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베드로도 스승을 세 번 부인할 때까지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주님이 너무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덜컥 겁이 나서 순간적으로 살고 보자고 판단했다. 세 번을 부인한 그를 주님은 홀로 두지 않고 성령이 이끄는 회개를 하게 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전부를 보게 된 것이다. 회개의 대상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도 당연히 포함되었지만, 그에 앞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전인격체적인 뉘우침이었다.

예수님의 공사역 기간 중에는 사람들이 그더러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만났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 주님으로부터 그 고백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칭찬도 받았다. 스스로 인식했던 못했던 인간으로서 최고의 자부심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실체가 아니라 완전한 허상이었을 뿐이다. 비천한 하녀에게마저 맹세하면서까지 스승을 부인하는 바로 지금의 모습이 자신의 비천한 실재임을 절감한 것이다. 성전 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찢으며 나는 죄인이고 고백하는, 자기 몇가지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인격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세리와 동일한 고백을 한 것이다.

유다의 회개 대상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뿐이었다. 성전 중앙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구제, 금식, 기도, 십일조 같은 선행에 열심이었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동일한 모습이다. 누구나 한두 번 실수로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고치면 되고 그러면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런 인간의 의로운 행동은 하나님의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나의 나 됨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 나의 잘못된 지난 행동 때문에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보지 말라. 지금 이렇게 깨끗이 씻었으니 이 의로운 행동을 보고 자신을 의롭게 여겨달라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기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려 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그분의 구원과 심판의 절대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분과 분리되는 것이 죄의 본질임을 아예 알지 못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으니 사실상 올바른 회개를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몇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직접적으로 지목하며 배반을 경고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자기 생각이 옳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가 자기 삶을 주관했고 세상 또한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다.

두 회개의 결과는?

베드로는 우리가 봐도 참으로 치사하고 비겁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어디 숨어서라도 예수님의 처분을 끝까지 기다렸다. 최소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해도 자신의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고 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절대로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삼일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는지 주님의 세 번의 반문으로 자신이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죄를 다 용서 받았다. 그런 과정 중에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됨을 절감했고 주님을 자신의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였다. 그러자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자기 죄는 완전히 씻김 받았음을 깨달았다.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생겼고 그 확신으로 말미암은 참 안식을 얻었다.  

유다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얻기는커녕 구경도 하지 못했다. 예수 사건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앞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 또 비천한 아녀자들도 만나주었다.

유다는 어쩌면 자살하기 전에 스승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수 있다. 시체가 없어졌다고 유대와 로마 당국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럼 그 때라도 베드로를 찾아갔어야 했다. 스승이 부활하셨기에 구태여 스승의 생명을 자기 생명으로 갚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이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 차버렸다. 물론 그가 부활 소식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끝까지 자기 스스로 자기 의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에 베드로보다 더 의로워 보일지 몰라도 유다의 영적 실상은 사탄의 흑암 아래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베드로의 처절했던 절대적 절망의 터널을 통과했어야 한다. 자신의 전부가 예수 십자가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기중심의 사고와 가치관에서 하나님과 예수 십자가 중심의 사고와 가치관으로 완전히 뒤바뀌어져야 한다. 예수 참 생명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유하고 있기에 그런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유다의 자살만큼 의로운 일도 없다. 그러나 그가 자살했을 때의 그의 심령이 어떠했겠는가?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결단과 절대적 절망만 있었을 것이다. 죽음으로라도 자기의 의를 증명하려는 결의로 가득 찼던지, 아니면 혹은 그와 동시에, 스스로 아무리 뉘우쳐도 도무지 기쁨, 자유, 안식, 평강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간혹 이런 유다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사람들 앞에서 매사에서 자기의 의를 어떻게 하든 증명하려 들거나, 아니면 아주 사소한 도덕적 잘못을 범해도 죄책감에 빠져서 십자가 복음 안에서의 참된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한 걸음도 진전 못하는 자들이 있다. 둘 다 스스로 자기 의를 세우려 든다.  

신자란 베드로처럼 자기 전부가 무너지는 회개를 한 자다.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용서 받고 구원 얻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이다. 신자의 전부가 받아졌기에 비록 예수 믿은 후에 넘어지고 쓰러져도 그 신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십자가 은혜 밖으로 쫓아내는 법은 절대로 없다.

신자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를 본 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실은 아직 그런 모습이 되기는 요원하다.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스승을 세 번 부인하는 모습에서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강을 주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하나 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과 사람 양쪽에 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떨어져서 혼자 숨어서 통곡을 하더라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 영과 혼과 육을 반드시 소생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유다처럼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자기 죄를 씻으려 드는 자는 그 후의 결과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자기 인생의 복락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완전히 깨트려서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은 자는 구원도 성화도 영화도 주님이 당신만의 오묘하고 풍성하며 아름답고 완벽한 방식으로 이끄신다. 모든 인생이 참 된 소망과 목표와 능력으로 반드시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11/3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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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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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부활절 - 요17:1-5)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2013년 부활주일 설교 http://youtu.be/-mgg9qhnS_s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 마18:1-4) [2]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http://youtu.be/Bce9n74I0g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강해 #195 - 마21:1-11) [1]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강해 (195) http://youtu.be/RU-_SvdrAC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 master
  • 2018-09-04
  • 조회 수 751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 master
  • 2018-01-07
  • 조회 수 746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 master
  • 2016-07-10
  • 조회 수 735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 master
  • 2022-02-27
  • 조회 수 724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 master
  • 2018-03-25
  • 조회 수 722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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