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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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7-20)


강력하게 다가온 말씀

이제 마태복음의 결론에 다다랐다. 어떤 책이든 마지막에는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다시 강조하는 법이다. 본문은 신자들이 잘 아는 내용이다. 모든 족속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이라 마태가 아닌 예수님의 결론이다.

주님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서 사역하진 모든 일들의 최종 정리인 셈이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다. 그 길에 먼저 들어선 제자로선 당연히 아직 그 길을 모르는 자에게 가르치고 인도할 책임이 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20절). 주님이 다시 오시어 마지막 심판을 하는 그날까지 신자는 이 명령을 성실히 준행해야 한다.  

주목할 사항은 마태는 누가나 요한과 달리 예수님의 부활 후의 행적을 대거 생략하고 곧바로 지상명령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 말씀을 중요하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어떤 사안이나 말씀이 크게 인상 깊어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생전 처음 듣는 신기한 일이거나 아니면 자기 생각과 전혀 반대인 경우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마태에게 금시초문일 리는 없다. 스승이 살아 있을 때에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가는 훈련도 받았다.

그 때에 주님으로부터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의 마을보다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 가라는 당부를 받았다.(마10:5,6) 지금 모든 족속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했다고 놀란 것은 아닐 것이다. 주님이 공사역 중에도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로마 헬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곁에서 목격했다.  

하나도 변함없는 주님의 뜻

그렇다면 두 번째 가능성이 남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의 생각과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도하라는 명령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마태는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이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뭔가 조직하여 체계적 활동을 하시리라 오해했던 것이다. 유대의 썩은 정치 종교를 개혁하고 로마와 일전을 벌여줄 것을 은연중에 기대했을 것이다.  

주님은 그런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당신을 그 극심한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 죽음으로 내몬 원수들에게 보복은커녕 항의할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천국 복음을 죽도록 전하라는 권면을 처음 듣는 순간 분명히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스승이 이전부터 당신 개인의 억울함, 피해, 고통은 항상 감수해왔고 또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실현한 것은 잘 알았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나 현실의 형통은 바라지 않지만 세상의 경제, 정치, 종교의 모순과 부패는 이제는 척결해야 하지 않는가? 단지 모든 이들로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니 또 다른 종교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뜻인가?

그러나 마태가 가만히 따져보니 지난 삼년 간 스승은 시종일관 죄에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천국에 관해서만 가르쳐 왔음을 상기했을 것이다. 주님이 그런 뜻을 중도에 수정, 타협,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도 깨달았을 것이다. 마태가 스승이 부활 후에 달라질 것이라고 잠시 기대한 것은 그만의 착각이요 잘못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가온 사실은 따로 있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전후에 유다는 스승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마태 본인은 그런 주제도 못되고 비겁하게 도망쳐버렸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가 겨우 그런 존재 밖에 안 되고 자신의 바깥보다 자기 내면 전부가 썩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의 외부적 환경을 개혁한다고 인간 문제의 근본해결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밖에서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즉, 인간 자체가 더럽고 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또 주님이 왜  아무 변론 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부활 후에도 마찬가지로 항변 하나 하지 않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만민에게 죄 사함의 복음만 전하라는 이 마지막 명령이 정말로 가슴 깊이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신 예수

문제는 마태와 정반대의 심경을 가진 자들도 이 엄숙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제 갈 길로 가버린 유다를 제외한 11 제자와 갈릴리에서 만났다. 그런데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17절)고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보고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제자들이 부활 예수를 처음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누가와 요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이미 일차 상봉을 했고 그 때 의심 많은 도마에게 못과 창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 후에 갈릴리로 모였다. 열한 제자들 중에는 의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본문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이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인 사건(고전15:6)으로 해석한다.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몇 있다. 우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있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또 로마와 유대 당국의 방해와 감시를 받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변방이다.

지금 모든 족속에게 전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도 적합한 장소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뜻으로 갈릴리를 당신의 사역의 출발지요 근거지로 삼았다. 그 오백 명 중에는 부활 예수를 처음 본 자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므로 의심할 수 있다.

만약에 이때에 오백 명이 모인 것이 사실이라면 마태를 비롯한 열한 제자들이 상당히 흥분했지 않았을까? 주님은 공식적으로는 로마 반역죄로 십자가 처형당했다. 대제사장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공포해 놓은 상태다. 로마와 유대 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아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러 온다는 것은 상당히 예민하고 조심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오백 명이나 모였으니 거기에 예수님의 초능력을 보태면 금방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잠시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나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족속 즉,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회복하라고 명했다. 마태에게 그 명령이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다.  

갑자기 결론으로 점프한 마태

지금 마태는 너무나 싱겁게도 갑자기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도 있다고 은혜가 떨어지는 언급도 하고 있다. 부활 후의 주님의 행적을 생략했다는 것은 본문을 바로 앞의 기사와 연결시켜 읽으라는 뜻이다.  

대제사장이 증권가 찌라시 수준도 안 되는 헛소문을 조작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즉, 주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사실처럼 두루 처지고 있었다. 지금 부활한 직후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오백 명 전부가 예수를 믿은 것은 아니고 개중에는 정말로 시체를 훔쳐갔는지 확인하러 온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예수가 너무나 멀쩡하고 평범하게 온전한 육신으로 회복되었다. 뭔가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 비춰 나오지 않았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를 대면하여 율법을 전수받은 인간 선지자 모세의 얼굴에 반영된 광채만으로 눈이 부셔 바로 쳐다보지 못해 수건으로 가렸을 정도였다. 지금 예수에게 그런 모습이 없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 소생시켰다는 소문이 사실일 수 있겠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런 의심이 없었던 자들도 부활한 예수가 이끄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자원하려고 왔는데 예수는 모든 족속에게 죄 사함의 복음만 증거 하라고 했다. 모든 족속은 모든 인간이다. 로마와 유대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포함된다. 나아가 독립군에 참여하려는 자기들 같은 의인들마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면, 자기들도 죄인 취급하는 셈이니 실망할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승천 직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본문과 동일하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행1:8) 또 그러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는데 그 때 모인 무리의 수가 약 120명이라고 했다.(행1:15) 숫자적으로만 따지면 본문에 모인 자들 중에 380명이나 불참했다. 부활한 예수에게 다시 실망한 형제들(17절)이지 않겠는가?

물론 네 복음서 모두 갈릴리에 몇 명이나 모였는지,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의심했는지, 그 오백 명의 이후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해선 침묵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복음서를 상호 대조하여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마태가 강조하려는 점은 육신으로 완전하게 부활한 예수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회복의 서로 다른 두 길

그 이유는 지금껏 말씀드린 대로 헛소문을 사실로 착각했을 수 있고, 예수에게서 신령한 광채가 나지 않고 또 다른 이적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태와는 정반대로 주님의 지상명령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딴 세상의 이야기로만 들렸던 것이다. 예수가 자기들 기대와 소원을 부활 후에도 끝내 외면하자 자기들도 예수를 거부하기로 한 것이다.

예수님이 거기까지 따라온 그들의 소원을 몰랐을 리 없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 관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게 하여 온전한 여호와 신앙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주님이 더 바라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예에서 보듯이 한 죄인의 타락한 영혼부터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당신의 자녀들이 말씀과 기도로 매일 주님과 교제 동행하게 해야 했다. 또 그렇게 변화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주위에 나눠주어야 했다. 신자들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서 다른 이들로 예수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해야 했다.

그럼 신자가 소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누룩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또 바로 그것이 각 개인에게도 내면의 허망하고 갈급함을 해소하여 참 행복과 만족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스라엘 회복의 생각과 길이 본문의 의심하는 자들의 생각과 길과 달랐던 것이다.  

마태가 의도했던 안 했던 이 갑작스런 결론은 대제사장의 역사상 최고의 거짓말과 예수님의 모든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대조하고 있다. 주님은 그 헛소문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거짓은 진리 앞에 오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빛이 비취면 흑암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당시 유대에 은밀히 돌던 두 소문 중에 하나는 분명 진실이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이 그 들을 귀를 열어준 자는 이 지상명령이 단순히 기독교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에 모든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을 피력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과 예수님의 정체성

마태가 부활 예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강조한 뜻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고는 십자가 복음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럼 구원 밖에 있다는 것이다.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왔지만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주님은 의인에게 상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러 왔다. 율법, 선행,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 등에 능통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외면했다. 대신에 열등하고 소외되어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과 주로 교제했다. 병으로 고통 받고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했다.

그들이 더  불쌍하고 형통하고 풍요로운 자들을 도와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과 죽기 직전 죽은 후에 구원을 받았다. 말하자면 주님과 아무런 교제 없이도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 대열에 합류했다. 주님이 생전에 교제했던 자들과 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불구자나 세리 등은 과연 내가 바리새인들 말처럼 하나님께 저부 받았는지, 정녕 하나님이 나를 거부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부자요 공회원이요 종교인으로 인간 세상에서 의인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칭찬을 받을수록 자기는 더 계면쩍었고 자기만은 자기 속이 추하고 치사함을 잘 알았다. 성전 제사를 지내면 그런 수치심과 자괴감이 없어질까 기대했는데 갈급함이 더 늘어났다. 율법을 순종하며 실천하면 더 거룩해질까 믿었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외모의 우열을 따져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진다고 절감하여 애통해 하는 자들 곁에만 계셨다. 바로 하늘의 생명수를 목마르게 찾는 자들이었는데 그들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을 보라. 남편 다섯을 두었고 지금도 젊은 남자와 동거하는 여인이었다. 세상의 평가로는 가장 음란하고 팔자가 드센 여자다. 본인도 부끄러워서 사람들이 외출하지 않는 한낮에 살짝 물을 길러 왔다가 먼저 와 계신 예수님을 만났다.

주님이 자기의 과거행적은 물론 현재의 심령 깊숙한 내면까지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소리쳤다. 주님의 정체성을 알아본 것이다. 주님에게서 내가 갈급해 하던 죄 사함을 받았고 성령의 생수로 마음의 허망함이 완전히 해갈되었다. 남들 앞에 나서지 않던 자가 바로 그길로 동네에 복음을 전하러 달려갔다.

마태가 잠시 이스라엘의 현실적 회복을 기대했다가 곧바로 지상명령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된 까닭과 근거가 무엇인가? 죽음을 이기고 완전한 육신으로 부활했다는 사실만큼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증거도 없음을 회상했기 때문이다. 그도 주님의 정체성을 알아서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고도 오히려 의심한 자들이 부활했다는 사실마저 불신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부활까지 한 예수가 여전히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지 않기에 예수 그분이 싫어진 것이다. 예수가 죽기 전과 똑같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들이 정해 놓은 메시아가 따로 있었다.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도 자기 뜻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바로 하나님이 된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증거 해야 할 내용?

그렇다면 신자들이 세상 끝 날까지 증거 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자동적으로 확정되었다. 마태가 지상명령을 헛소문과 대조하고 있지 않는가? 가장 먼저 그 헛소문을 깨트려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가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시체를 훔쳐서 그렇게 선동했다는 것이야말로 새빨간 거짓임을 아는 것이다. 간혹 예수님의 대속죽음의 은혜는 믿는데 부활 예수를 믿지 않는 신자가 있다. 그들이 아무리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고 주여, 주여 불러도 입술로만 되뇌는 공염불일 뿐이다.  

예수는 부활했다. 그분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오직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부활 주님에 근거해야만 바른 복음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요일1:22) 구체적으로는 육신으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다.(요이1:7)

예수의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은 육신으로 부활도 믿지 않는다. 부활을 부인하거나 관심 두지 않는 자도 적그리스도다. 부활예수를 못 믿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부활하신 주님이 곧 바로 승천했기에, 또 자신이 먼 장래에 부활한들 지금 당장 이 땅의 형통과의 연결 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초대교회 신자들의 믿음도 아주 간단했다. 예수가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부활 생명을 자기들도 이미 소지했었다. 그러니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산 채로 맹수 밥이 될 때에 감히 단언컨대 성령의 강력하고도 충만하게 임재 했을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극렬한 풀무 불에 타지 않았거나,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은 그런 기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선 도무지 맛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안식, 기쁨, 자유, 충만을 느꼈을 것이다. 천국 보좌의 장엄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죽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당신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마11:6) 예수님이 고의로 사람들을 죄악에 빠트릴 리는 없다. 또 신자들로 귀신과 사탄의 농간에 넘겨줄 리도 없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비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상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실족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자유주의 신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제사장의 찌라시가 옳다는 뜻이다. 대신에 산상수훈이 기독교의 핵심이자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모르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산상수훈은 심령이 가난해져 이미 천국을 본 자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과 자신의 거리가 멀어진 것을 가장 안타까이 여기는 자다. 세상의 선하고 의로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봤고 철학 도덕 종교도 섭렵해봤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는커녕 그 자리에 맴돌거나 더 멀어지는 것을 절감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 십자가 부활 생명이 성령의 간섭으로 임하자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빠라 부르며 따르게 된 자들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그분의 부활 생명 즉 거듭나는 새 생명이 심어진 것이다. 천국을 본 자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산상수훈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자기 전존재가 깨트려졌다. 자기 내면에 의로운 면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추하고 더러운 것만 솟아난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했다.

지상 최고 수준의 도덕인 산상수훈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일등 신자가 아니다. 그대로 살기로 노력은 하되 진정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 한 구절도 온전히 못 지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가 참 신자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그 고통이 너무 심한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천국에 편안히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아브라함 즉, 유대 민족의 믿음의 조상에게 자기 아버지 집에 형제가 다섯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회개토록 하여 이 지옥에 오직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브람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모세와 선지자에게서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도 회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유대 관용구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구약성경 전체가 당신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했다.(요5:39) 또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지 토론하면서 아브라함도 당신의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했다.(요8:56) 한마디로 당신은 구약에 계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이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바로 그런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지금 갈릴리에서 지상명령을 주심으로써 그 예언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의심되기에 그분의 메시아 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천국과 지옥의 실재조차 의심하는 것이 인간이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지 못하니까 부활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 부인하는 것이다. 메시아가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는 자로 해석하여 계속 그 일만 요구하느냐, 타락한 영혼에서 건져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로서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겸비하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그분의 부활을 믿는 신자 중에도 간혹 실족하는 자들이 있다. 쉬운 예로 이렇게 오래 끈질기게 기도했는데도 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의심하는 신자다. 현실의 형통을 바라지 않고 당장의 고통만 중지해달라고 요구하는데도 왜 침묵하느냐고 불평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과연 그런 기도를 했을까? 그들은 십자가 교리를 잘 몰랐다. 삼년간 주님을 직접 대면하고 동고동락하며 배웠으나 부인했다가 다시 화목했다. 그들이 산 채로 맹수 밥이 되면서 주님 내가 그렇게 뜨겁고도 열심히 잘 믿었는데 이 꼴이 뭐냐고 불평하지 않았다.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없이는 인간이 절대로 만족과 행복은커녕 평강도 누리지 못함을 확실하게 체험했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그 가운데는 자기 생명도 포함해서 포기해도 주님만은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랬더니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면 구원 받을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예수 그분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지상명령을 주신 뜻이 기독교나 개별 교회를 키우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실족하지 말되 바로 너부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과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되어 있는가?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받고 있는가?

2/15/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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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 강해(6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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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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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부활절 - 요17:1-5)

부활 가운데 서있는가? 2013년 부활주일 설교 http://youtu.be/-mgg9qhnS_s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 마18:1-4) [2]

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http://youtu.be/Bce9n74I0g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강해 #195 - 마21:1-11) [1]

로마에서 해방을 소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강해 (195) http://youtu.be/RU-_SvdrAC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태복음강해 #148 - 마13:31-35) [1]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주기도문#1-마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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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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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신년예배-빌3:10-14)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가? (빌3:10-14) 신년예배 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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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7
  • 조회 수 746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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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 조회 수 735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창21:1-8)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기도시리즈(9)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기도시리즈 (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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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7
  • 조회 수 724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고난주간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

  • master
  • 2018-03-25
  • 조회 수 722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151 - 마13:47-50) [4]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사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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