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4:3-9) 모든 신자가 반드시 받아야 할 진짜 축복

구약성경강해 (49) / 민수기강해 (39)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민24:3-9)

 

마음에 울림이 없는 말씀

 

하나님은 발람의 두 번째 신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신의 저주는 물론 점괘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발락은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이스라엘 진영이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광야의 브올산 위에서라도 저주해달라고 발람에게 세 번째로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이라면 발람의 신탁이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고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해봤지만 역시나 전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이었습니다.

 

여호와가 당신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는데 발락에게 적용하면 이스라엘을 또다시 저주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한 셈입니다. 발람은 알아듣기 쉽게 또렷하게 전했고 발락도 그 앞에 일어서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락에겐 그 말이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귀에 안 들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전혀 울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욕심이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처음 발람이 모압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당대 최고의 주술사를 불렀으니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승리하여서 큰 이득을 얻을 꿈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과 자기들 군대의 힘을 믿고 자신감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신탁에서부터 그의 자신감은 여지없이 깨어졌고 둘째 신탁에선 거의 바닥을 쳤습니다. 지금 세 번째는 이왕에 시작한 일 한 번만 더 확인해보고 그래도 가망 없으면 그만둘 작정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흑암의 세력이 아무리 극성을 떨어봐야 하나님의 역사를 절대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분의 백성이 이방 백성들보다 현실적으로는 뒤쳐지는 것 같아도 이 땅의 겉으로 보이는 측면에서 그것도 일시적으로 그럴 뿐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선 사탄과 그 졸개들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만 점차 강성해집니다. 흑암의 세력들은 단번에 하나님께 심판 받아 소멸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발람에게 주신 여호와의 세 번의 계시 모두 언뜻 보기에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위험에서도 보호해주신다는 단순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고 완전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앞뒤로 비교해가며 자세히 따지면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이 점점 구체적으로 강화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발락 즉, 세상 세력의 힘이 점점 줄어든다면 이스라엘은 그 정반대로 여호와로부터 위로와 힘을 많이 받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신자들이 이런 너무나 당연한 진리조차 성경에서 읽어내지 못합니다. 현실 삶이 고달파서 계속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고 악인들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이번만큼은 뾰족한 수가 없어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발람의 세 가지 계시도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두리뭉실하게 읽고 치우니까 왜 나는 그렇게 해주지 않는지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돌아갑니다.

 

성경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아는데 발락처럼 자기 심령에까지 파고들지 못합니다. 한 번 간단히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이 신자가 완전히 망하도록 절대로 그냥 두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그분이 뭔가 준비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정도까지는 생각이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참 믿음이란 그것으로 그쳐선 결코 안 됩니다. 나는 완전히 망해도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히 흥한다고 확신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체화되어가는 축복

 

발람의 첫째 축복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여느 민족과는 다르게 통치함으로써 홀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발락과 발람에게 가장 먼저 “히브리 민족은 너희와 다르다. 함부로 전쟁을 쳐서 정복할 상대가 아니다. 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저주도 해선 안 된다.”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독특한 정체성을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에선 하나님은 사람과 달라서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후에, 아브라함과 맺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언약을 당신께서 반드시 지키실 것이라고 재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세상 어떤 이방신의 저주라도 당연히 당신의 그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는 아예 씨도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당신께서 어떻게 보호 인도하는지 밝힌 것입니다.

 

세 번째 축복인 본문에선 먼저 “네 장막과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한 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7절)고 했고 결국에는 “그의 적국을 삼키는”(8절) 위치에 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축복에선 그 안에서도 이스라엘이 받을 복은 점점 더 커져갑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은 첫째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밝혔고 둘째 당연히 그 위치와 신분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인간과 다른 당신의 이름을 걸고 확인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그 결과 이스라엘이 받아 누리게 될 풍성하고 아름다운 과실을 열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이 땅에 살아가는 신앙여정도 바로 이 셋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전혀 다르게 대우해주기에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인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소명대로 충성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자가 하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살아가면 세상의 죄악 흑암 죽음의 세력들을 당당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국을 삼키는 위치에 이르는 것 같은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해주면 사례하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거꾸로 축복했으니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축복을 들은 후에 발락은 저주 안했다고 배상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축복의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23:25)

 

흥미롭게도 발락이 네 번째 제사를 지내자고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발람은 도리어 이스라엘이 모압을 멸망시킬 것이라고(24:17) 선포했습니다. 신탁의 대상인 이스라엘은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저주하는 신탁을 했으니 손해배상을 두 배로 물려야 합니다. 아니 그 자리에서 발람의 목이 발락의 칼에 날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발락은 아무 소리 않고 군대를 철수해버립니다.(24:25)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든 전후사정을 모를 리 없는 발람이 여호와의 권능에 붙들렸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예언한다는 사실을 발락도 알았던 것입니다. 발락이 그렇게 깨달게 된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여호와의 권능을 느꼈다는 표시입니다.

 

이 세 번의 축복을 한마디로 줄이면 신자는 세상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일에만 충성 순종하면 됩니다. 그럼 그 장막과 거처가 아름답게 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들이 든든히 서며 그것을 허무려는 흑암의 세력들을 하나님이 다 패배시켜 줍니다. 이는 구약성경, 아니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신자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다 막아준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능력만 기대해선 안 됩니다. 신자부터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맡기면서 그분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하는 일 자체가 정말로 신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이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 기쁨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주님과 함께 정말로 기쁘게 교제 동행하면 그 자체가 신자의 보상일 뿐 아니라 세상은 그런 신자를 절대 대적하지 못합니다. 신자가 기쁨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로 주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열매가 이미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흑암의 세력이 결코 맞설 수 없습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기 바쁩니다.

 

더 근본적인 복

 

본문에서 정작 살펴봐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방해를 막아주신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하고 있으면 자칫 신자의 행위에 비례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고 그럼 복을 받으려는 그릇된 동기로 순종할 소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전에 신자가 하나님께 반드시 순종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신자가 받는 복의 진짜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미 여러 주에 걸쳐 배워왔고 본문도 결론에서 명확히 진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24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봅시다.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습니다. 복과 저주는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복도 저주도 받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발람사건에서 이스라엘이 모압과 전쟁을 하지 않았으니까 현실적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없이 제로입니다. 모압이 이런 흉계를 꾸미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복을 굳이 하나 꼽자면 발락의 저주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은 복 하나만 약속하셨습니다. 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을 다시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참 하나님이 나타나 당신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떠나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그 때까지 그를 보호해주던 인간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장치를 전부 포기하고 완전히 맨 몸으로 오직 당신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르에서 소유하고 있던 땅과 현실적인 과실들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 바 전혀 모르고 믿음으로 따라나서서 얻을 결과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약속하셨습니까? 새 땅과 큰 민족과 창대케 되는 이름입니다. 따지고 보면 장소만 달랐지 그가 버린 것을 다시 받는 셈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현실적으로는 플러스 마이너스 없이 제로입니다. 질과 양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을 버리고 똑같은 것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질과 양으로 따져도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오히려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 않았습니다. 땅은 죽을 때에 자기 시신 하나 안치할 수 있는 막벨라 굴을, 후손은 첩의 자식을 빼고 약속의 자식으로는 이삭 외아들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의 이름이 꽤 유명해지긴 했지만 갈대아 우르에서도 제사장 가문이라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그곳은 정착해서 살았으므로 이곳저곳 옮겨가며 살았던 가나안 땅에서보다 더 유명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흔히 말하듯이 창대한 후손과 창대한 이름과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도 이백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최소 필요조건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이 반드시 마련해주어야 할 그분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도 없는데 당신의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완악하게 계속 반역해도, 사십 년이나 한 세대를 광야에 방황시켜서 다 죽이고는 기어이 새 세대를 가나안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출애굽의 영웅이요 죽도록 고생만 한 모세와 아론도 못 들어가게 한 것도, 대신에 새 세대에 맞는 새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앞세워서 가나안 전쟁에서 연전연승시켜 주신 것도,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당사자로 반드시 행할 의무를 행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당신만의 시기에 당신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행하십니다. 문제는 항상 언약의 다른 쪽 당사자인 신자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발람의 축복을 받았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도 자꾸만 이름이 창대케 하고 큰 민족을 이뤄준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뭔가 현실적으로 대박의 형통을 보장해주었다고 지레짐작하고 치웁니다. 발락처럼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이 먼저 가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고, 발람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받았고, 오늘날 신자들도 현실적으로 받을 복은 따로 없습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이고 현실에선 사실상 줄어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신자로 인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신자가 받는 복입니다. 혹시라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다시 추적해봅시다.

 

우선 그가 가진 믿음의 실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4:18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설명합니다. 젯밥에만 관심이 가있는 신자들은 이 말씀도 완전한 불가능을 완전한 가능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이해하고 치웁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라는” 말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무능력 무자격을 강조한 것이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 순종의 구원과 예수님의 대속 은혜 구원을 대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가 아무 공로 자격 행위 없이 이삭을 선물로 주심을 믿었다는 뜻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은 오히려 하나님 말씀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에 있습니다. 다시 그의 순종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정말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믿고 따랐던 그가 완전히 여호와만 믿고 따르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추악한 이전의 삶으로는 부모 친척 본토를 떠나더라도, 실감나게 말해서 생명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철저한 단절이었습니다.

 

그의 중심이 오직 한분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그의 영혼에 당신을 믿고 따르는 맘으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대우하여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게 해준 것입니다. 발람의 첫재 축복처럼 여호와 안에서 아브라함의 정체성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의 재물 명예 권력에 집착하지만 그는 자기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하늘에 따로 있음을 확신하고 이 땅을 나그네 같은 삶을 살기로 결단했기에 갈대아를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풍요하고 화려할지라도 여호와가 없는 땅보다, 아무리 황폐하고 궁핍해도 여호와가 지시하는 땅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시하는 대로 어디든 감사하며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정말로 그의 이름은 창대해졌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최초로 있었던 연합 전쟁에서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예수님과 방불하여 족보도 근원도 없는 멜기세덱 대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으나 그들이 그를 도리어 살려주고 많은 재물을 주었습니다. 고대 왕에게 거짓말하면 바로 즉결처분이나 함께 하신 여호와가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방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절대로 응하지 못한다는 발람의 두 번째 축복도 이미 그에게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삭과 야곱을 통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자들의 선조가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말한 다음에 그렇게 된 연유를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이미 불임이 된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들을 주는 일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만사를 다스리는 그분에게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갖기를 당신께서 더 원하셨습니다. 그보다는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워 그 백성들에게 거룩한 복을 주시길 정말로 그분이 더욱 간절히 또 먼저 원했습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 것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그분과의 언약에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기에 당신 백성을 향해선 거짓말이 절대 없으시고, 이방을 향해선 당신 백성에 대한 저주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발람이 둘째로 축복한 내용도 이미 아브라함에게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복을 누리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가장 큰 복이 남았습니다. 발람이 세 번째로 축복하면서 결론으로 내린 그 진짜 복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자들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살려준 애굽은 당장 그의 손자 요셉으로 인해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아내의 닫혔던 태가 열려서 왕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조카를 구하려는 아브라함과 힘을 합친 소돔과 고모라 연합군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복을 받았다고 아브라함이 이웃 사랑에 헌신하는 이타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일반적 도덕을 초월하며 선행 구원만 고집하는 다른 모든 종교들과도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참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참 생명 되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야만 선이며 그렇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갈 바 모르지만 그분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평생토록 뚜벅뚜벅 걸어가는 씨름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 바로에게나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잘해준 것은 하나 없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바친 일을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 혼자 살려고 마누라를 팔아 넘긴 천하의 치사한 죄입니다. 조카 롯을 위해선 수고 희생하며 전쟁을 치루고 또 소돔의 심판 때에 그의 목숨이라도 구하려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끈질기게 간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애초에 친척도 떠나라고 했으나 인간적 정의로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이자 책임이었습니다.

 

신자 이전에 인간이라면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후에 서로 돕는 배필이 되라고 명했고 그들이 그대로 따름으로써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정말로 아름답고 신령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부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는 두 사람이 전부였기에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남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만 진정으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타적 삶은 인간에게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넘어서 인간 자신을 위한 복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정체성을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셨기에 서로 사랑하면 그 정체성이 충족되어서 자연히 행복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체성에 혼란 왜곡이 생겨서 삶도 같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따르는 삶을 즉, 자기 정체성을 충족하며 살았기에 이타적 삶은 그 열매로 자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12:7,8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이 어디로 가라고 하든지 순종하였고 또 그곳에 가게 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갔고 하라는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전의 갈대아 우르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았고 이방신의 음란한 제사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신상도 없고 화려하고 장엄한 제사의식도 없었습니다.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돌로 단을 쌓고 기도드렸습니다. 자기 종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었고 축복하는 기도도 해주며 외아들의 아내 선택에 대한 전권까지 일임했습니다. 집에서 기른 군사들이 조카를 구하려는 주인의 개인적인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그 흔한 첩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갈을 후처로 둔 것은 자기 몸에서 날 자를 후손으로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한 본처 사라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하나님이 그렇게라도 약속을 이루시려나 보다 여기고 어쩔 수 없이 따랐던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와 아비말렉에게 사라를 누이로 속인 것도 자신이 살아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이라고 스스로 계산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대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완전히 생명을 거는 모험입니다. 도적떼의 습격을 받거나 타인종의 미움을 사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가는 곳마다 여호와만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명하신 최초의 해외선교사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증거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평안하게 풍부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조카 롯 더러 양을 칠 땅을 먼저 고르라고 양보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입니다. 정말로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오직 하늘의 본향을 바라본 것입니다.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보상만 바란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갈대아 우르에서의 그 더럽고 추악했던 생활로는 죽으면 죽었지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불신자가 받는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을 보는 온갖 죄롤 타락한 이방 족속들이 그에게서 영적 권위를 못 느꼈다면 도리어 이상합니다. 분명 양심에 찔림은 생겼을 것입니다. 최소한 저 사람이 사는 것이 정말로 인간답게 바르게 사는 것이 맞다고 인정은 했을 것입니다. 편안하고 떵떵거릴 수 있는 조국을 버리고 외롭고 고달픈 이국에서 계속 이곳저곳으로 고생스럽게 옮겨 다니며 고생을 사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염려도 하지 않고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집에서 비단 옷 입고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사는 자기들이 왜 그 앞에 도리어 고개가 숙여지고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믿는 신의 형상도 제단도 번듯한 제사 절차도 없이 단순히 이름을 부르고 기도만 하는데도 바로나 그랄 왕에게서 살아나오고 연합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너무나 이상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믿는 신이야말로 참 신이거나 가장 강력한 신인 것 같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그가 믿는 신의 영적 권위를 느꼈다면 발람 같은 사탄의 최고 종조차 그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 내지 인정해줄 수 있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자를 하나님이 복을 주거나, 설령 축복 안 해주어도 여호와를 알고 그 영광의 빛이 비취지는 복은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그가 바로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복덩이를 저주하면 스스로 그분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요, 대신 복스럽다고 칭찬하는 자는 그분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부터 사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청교도 선조들이 그랬습니다. 최근 20세기 초반 세계적인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 불신자들까지 자진해서 죄를 통회 자백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받는 복입니다. 정확히 말해 신자가 받을 복이라기보다 신자를 보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신분과 권능을 지닌 정체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반드시 예수 십자가 빛을 남이 보게 만드는 자입니다. 신자가 되는 순간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며 그 외의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평생토록 내주하고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가 신자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 주술사의 점술 복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로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현실적 복을 더 얻으려는 욕심 내지 기대가 있다면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죽기 살기로 노력하든지 더 늦기 전에 그런 것들을 보장하는 다른 종교로 찾아가야 합니다. 이 땅이 정말로 나그네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신자가 누릴 복의 실상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정체성부터 새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목사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이가 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며 그 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인생으로써 누리는 최고의 기쁨은 없습니다.

 

11/1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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