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십자가와 신사임당의 회초리

창세기 강해 (29)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예수의 수난은 사실은 가벼웠다(?).

 

유명한 영화배우 멜 깁슨이 2004년에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신학적 논란거리가 많아 실은 예수 영화로는 잘못 만든 축에 든다. 그나마 한 가지 긍정적 측면은 십자가 처형의 끔찍하고도 잔인한 실상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불신자나 신자 모두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대해 재인식을 시켰고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교회에 출석하는 자도 나왔다.

 

영화에선 예수님이 지금까지 배워온 것, 아니 상상한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 죄인들을 위해 저렇게까지 수난을 당해야 하는데 어찌 안 믿을 수 있겠는가 식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분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잘 믿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순전한 복음과 거리가 멀다. 복음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젠 그 영화를 볼 수도 없지만 그 때와 비슷한 인식과 동기로 믿는 신자가 꽤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은 수난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여러 전후사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반나절 정도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통상적인 십자가 처형의 고통보다 훨씬 적게 받은 셈이다. 다른 이도 죽음에서 살렸고 당신 자신에 대해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수차례 예고까지 했다. 오늘의 본문에도 사탄의 받을 심판과 대조한 상징적 표현이긴 하지만 그분의 발꿈치만 상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은 고통이나 죽음에 묶여 있을 분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에서 받은 고통의 크기와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그런 앎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끔찍한 수난을 통해 이룬 결과가 실제로 신자 자신의 삶과 인생에 적용되고 실현되어져야만 한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하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율곡이 공부를 하지 않고 엄마 속을 썩이자 보다 못한 신사임당이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때렸다. 엄마인 내가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뜻이었다. 율곡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장원급제를 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엄마 이젠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회개하고 결단까진 잘 한다. 그러나 그 때뿐 그 후로는 전혀 공부하지 않고 여전히 놀기만 하는 꼴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엄마가 그렇게 하면 가슴이 쓰리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지 않을 아들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보응만 하려는 믿음은 그래서 복음과 거리가 멀다고 한 것이다.

 

신사임당으로선 아들 교육을 잘못 시킨 점을 스스로 자책한 면이 분명 있지만 어쨌든 아들로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것이 최종 아니 근본목적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하겠다고 말로만 결단하고는 실제로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때린 회초리는 허사 중의 허사다. 신자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자신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말과 행동에서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야 한다.

 

죄의 오염까지 해결하신 예수님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인 사형을 대신 감당하셨다. 예수 믿는 신자에겐 더 이상 정죄함 즉, 지옥 가는 심판은 없다.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복음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신자들이 죄에 무감각해진다. 죽음의 심판 즉, 인간 최대의 고민이자 고통이 해결되었다. 이젠 현실의 고통만 해결 받으면 된다는 식의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심판의 면제라는 측면과 함께, 어쩜 더 강조하고 주목해야 할 내용은 본문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의미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고 또 인간으로 오셨기에 죄가 야기 시킨 오염, 부작용, 폐해까지 다 해결하셨다는 바로 그 점이다.

 

말하자면 구원은 말 그대로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인데도 작금 죄의 형벌에서 면제 되었다는 점만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죄의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은 죄에 건짐 받기 위한 전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야 완전한 구원이다. 쉽게 말해 구원 받았으면 예수 믿기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선하고 의로워져야만 하고 실제로 그 일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공사역 중에 산상수훈으로 천국에 입성할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쳤다. 또 실제로 그대로 살아서 참 인간다운 삶의 모습을 제자들로 보고 배워서 따르게 했다. 어떤 랍비도 행하지 못한 긍휼과 사랑을 불쌍한 이웃들에 베풀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사탄에게서 시발된 죄를 사탄에게 되돌려주었다.

 

예수를 믿어도 신자의 본성에 죄가 남아 있기에 피 흘리기까지 평생을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불신자 시절에는 죄의 노예, 종, 부하가 되어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아니 죄를 즐겨서 행했고 삶의 일상이 죄였다. 그러나 신자간 이후로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죄가 무엇인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알았기에 죄와 싸울 각오와 헌신이 되었으며 성령으로부터 싸울 힘도 부여 받았다.

 

신자는 아무리 교묘하고 강력한 죄라도 싸워 이길 수 있다.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면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권면하지 못한다. 그럼 전쟁에 나가 무조건 죽으라는 권면과 같아지는데 말도 안 된지 않는가? 피를 흘릴 정도로 힘들긴 하지만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어떻게 상하게 했는지 정확히 알면 그 피 흘리는 싸움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수행하여 죄의 오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가 없으시니라”(히4:15)고 말한다. 본문에서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했다.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참 인간으로 오시어 동일한 죄의 시험을 받아서 이겼다는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가만히 있는데 속에서 거짓, 탐욕, 음란 같은 죄의 본성이 솟구친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히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받았던 것과 동일한 시험을 사탄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것이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계기이자 인간 본성에 자리 잡게 된 그 시험을 이겼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죄가 없는 상태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으니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도 죄가 없는 상태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았지만 이겨냈다. 최초 인간의 최초의 원죄를 씻음으로써 죄가 이 땅에 존재케 된 근거와 죄의 효력을 원천 무효화시켰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우고 그분을 외면 거부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대신 높이어 앉혔다. 그러자마자 선악과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졌다. 하나님과 분리된 죄의 본성이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현실에 나타나는 결과적 모습이다.

 

요한 사도는 그 셋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표현하고 전부 세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 즉,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인간을 조종해서 생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한 후에 사탄으로부터 그와 동일한 방식의 세 가지 시험을 받았다.(마4:1-11)

 

예수님이 받은 세 가지 시험

 

먼저 돌을 떡 덩이가 되게 해보라고 했다. “네가 지금 주렸지? 어서 빨리 떡을 먹어라!” 먹음직한 유혹으로 다가온 것이다. 예수님에게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주님은 어떻게 물리쳤는가? 인간은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리 잘 먹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 즉, 사탄이 주는 떡이라면 차라리 먹지 않고 굶어 죽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해주겠고 했다. 세상사람 앞에 놀라운 능력을 보여서 칭찬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만큼 탐스러워 보이게 만든 셈이다.

 

예수님은 또 다시 하나님을 절대로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능력과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시험하지 않는 한 다른 어떤 것이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주 전체의 주인으로 창조자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오직 감사, 찬양, 경배의 대상이기에 피조물이 그분을 시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꿈 꿀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랑이나 능력은 사탄이 조종하는 세상에서 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주님을 높은 산에 데려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노골적으로 자기를 경배하면 이 모두를 주겠노라고 유혹했다. 세상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암직한 욕심 안목의 정욕을 충족시키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일관되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겠다고 대답했다. 하나님 외에 경배할 대상은 우주 전체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혹시 그런 대상이 있다고 여기거나, 다른 힘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보다 다른 것을 먼저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사탄에 넘어가 멸망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를 넘어뜨린 세 가지 욕망을 예수님의 마음에 집어넣으려 했던 사탄의 흉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경로, 과정, 동기를 주님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원상 복귀시켰다. 그 세 유혹을 주님은 오직 한 가지 방안으로만 물리쳤다. 하나님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만 연합하여 죄를 이겼다.

 

최초 인간이 그랬고 그래서 지금 모든 인간도 그렇게 하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바로 잡은 것이다. 죄의 본질과 통로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을 수 있도록 당신께서 사십일이나 금식하며 실제로 시험에 이기는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태초부터 마련된 구원의 경륜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자마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사탄이 가장 먼저 알았다. 죄가 없으신 순전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물질계 안에서 죄에 찌든 인간들은 맡지 못했으나 영적 존재인 사탄은 그 냄새를 맡았다. 사탄의 영적 능력도 뛰어나지만 파리가 더럽고 추한 시궁창에만 끓듯이 사탄은 죄가 있는 곳만 찾아다니고 죄가 없는 곳에 죄의 씨를 뿌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존재다. 죄가 없는 예수님도 어서 빨리 죄로 무너트리려 작정한 것이다.

 

거기다 틀림없이 메시아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아예 공사역 자체도 못하게끔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덤빈 것이다. 나사렛의 이름 없는 랍비로 겉으로는 흠모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말구유에서 비천하게 태어났기에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리라고 만만하게 본 것이다. 인간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죄가 없던 아담과 이브도 넘어지게 만들었던 사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마4:1) 광야의 시험은 사탄의 흉계 이전에 예수님의 계획이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갔다고 했으니 태초부터 마련되어 있던 삼위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경륜을 실현하려던 것이다.

 

세 번 다 오직 하나님과는 절대로 분리하지 않겠다는 한마디 말씀으로만 사탄을 물리쳤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능력을 높여선 절대로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탄의 머리부터 완전히 상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린 자가 회당에서 권세 있게 가르치는 주님을 처음 보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눈치 채고 우리를 멸하려 왔는지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현해 보였다. 그 전에 이 땅에서 메시아로 제일 먼저 행한 사역은 바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 죄를 실제로 이겨내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 3년 간의 공사역은 사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사탄과 그 졸개는 주님 앞에 얼씬도 못했다. 제자들도 전도 여행 중에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귀신을 쫓아내었다.

 

예수님은 대신에 당신 오시기 전까지 사탄에게 미혹된 제자들과 인간을 대상으로 십자가 복음을 가르쳤다. 나중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나면 그 십자가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죄의 형벌을 감면하고 그분의 의를 전가하여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와 동시에 주님은 광야에서 인간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실제로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광야 40일 금식이 앞으로 공사역에 대한 결단 헌신 각오하는 준비기간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고로 강력한 방안을 인간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평생을 땅에 기어야하는 최고로 비천한 위치로 떨어졌다. 예수님으로선 구태여 사탄과 상대할 필요, 요즘 하는 시쳇말로 그와 말을 썩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의도적으로 그 번거로운 절차를 광야로 나가 스스로 행했다.

 

그렇게 하신 뜻은 오직 예수 믿는 자를 죄에서 구원하려는 뜻이다. 죄에 대한 형벌은 태초부터 구원을 주기로 작정한 자에게는 이미 면제되어 있었다. 인간에게 더 중요한 일은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처럼 발꿈치가 상하더라도 사탄의 머리를 부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은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단순히 인간 의지로 죽인다고 죄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죄를 이기고 사탄을 물리칠 능력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이 다시 그분과 완전히 연합되지 않는 한 사탄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제발 진심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자신의 벌거벗었음을 철저히 자각하고 자신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채우라는 것이다.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세상에서 최고가 될 것 같아도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40일간 금식했듯이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든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도 하나님을 절대 놓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죄악이거나 중요치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그분이 인간이 안락하고 풍요롭게 지내길 더 바라신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탐스러운 욕심이 생기는 것 자체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섭리다.

 

그 세 욕망을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 처리하다간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다. 이 땅에서 강건하고 풍요롭게 살라는 뜻이다. 단 하나님의 뜻과 방식과 다르게 그 세 욕망을 절대 이루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자기를 높이고 치장하려는 것이 단연코 모든 죄와 실패의 원인이다.

 

불신자들보다 더 추한 교인들

 

그런데 작금의 신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불행하고도 유감스럽지만 불신자들보다 더 추하고 사악해진 모습이 너무 많다. 정말로 세상으로부터 개독교라는 욕을 들어먹어도 싸다. 다시 율곡의 비유를 들어보자.

 

신사임당이 회초리로 자기를 때린 것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측면은 분명이 있어도 결국 율곡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려는 뜻이다. 멜 깁슨의 영화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에 감격해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여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복음과 무관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신앙이다. 어쨌든 앞으로 어떤 계기가 되었던 신앙생활을 성실히 행하겠다는 즉, 율곡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가 회초리로 자신을 때린 그 현장에선 눈물 흘리고 반성했지만 공부하겠다고 책이랑 컴퓨터 사겠다고 돈을 얻어서 다시 악동들과 노는데 탕진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방에 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척 하고선 몰래 외출해버리면 그만큼 패륜아도 없다.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 받으려 간절히 구한다. 그 받은 은혜로 세상과 교회 안에서 자기를 높이기만 하고 죄와는 전혀 싸우지 않고 세상 방식으로 살고 있는 현재 신자들의 모습과 똑같지 않는가?

 

불신자는 세상의 형통을 그나마 자기 노력과 수고로 이루려 하지만 신자는 동일한 목적을 자기 노력 없이 하나님만 이용하려 든다. 자기들과 동일한 인생목적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 힘만 빌리려 하니 그들로부터 비겁하고 나태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다고 속아 넘어가줄까? 아들 방에 불 켜져 있어도 인간 부모조차 알고도 모른 척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교회에 가라지도 함께 무성히 자라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불에 태워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한 까닭이다.

 

이율곡은 과거 시험 역사상 가장 많이 장원급제 했다고 한다. 무려 9번이나 장원해서 율곡이 시험을 친다는 소문이 나면 유생들이 아예 일등은 포기할 정도였다. 율곡이 그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신사임당이 아들이 장원하는 모습을 너무 기뻐했기에 효도하려는 뜻이었다고 한다.

 

영적의미에 대입하면 율곡은 사탄의 광야에서 삼종세트 유혹을 아홉 번 받아도 아홉 번 다 이긴 셈이다. 또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자신에게도 가장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바로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게끔 예수님이 광야 시험을 거친 것이며 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부터 본문에서 이미 약속했던 바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땅에 기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처럼 신자가 말을 썩을 필요가 없다. 섣불리 상대하려다가 즉, 나름의 자신의 선함과 양심과 의지로 도덕과 종교 계명을 지키려 하다간 지금껏 경험한 대로 성공보다 실패만 훨씬 더 많이 겪을 뿐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해야만 한다. 주님처럼 광야 같은 인생길을 반드시 성령님과 함께 걸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높이려 들어선 기다리는 것은 실패요, 절망이요, 죽음이다. 자신을 죽이되 그 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라. 신자라면 하나님과 함께 하면 어떤 것에도, 비록 피를 흘릴지라도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당당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께 보응하려는 승리가 되어선 안 된다. 정말 하나님과 함께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승리를 신자 자신이 맛 볼 수 있다. 또 그렇지 않는 삶을 신자는 이젠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다.

 

10/1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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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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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강해#45 - 창4:9-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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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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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강해 #46 - 창4:9-15)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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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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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강해#47-창4:15&23,24)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 강해 (4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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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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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창4:16-2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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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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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눅22:31-34)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고난주간 설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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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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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강해 #49-창4:25-5:5) [1]

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 강해 (49)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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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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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창세기강해 #50-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강해 (50)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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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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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강해#51-창6:5-7)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 강해 (5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뒤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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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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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받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2 - 창6:8-12)

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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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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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강해 #53 - 창6:13-17)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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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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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4 - 창6:15,16 & &7:10-12)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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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9
  • 조회 수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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