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6:8-12)

 

 

술주정뱅이 노아?

 

노아 홍수 직전의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계획하는 바는 항상 악했다. 온 땅에 패괴와 강포뿐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히려 부족할 판국이었다. 그런 타락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한 가족, 정확히는 노아 한 사람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차례다. 거기다 단순히 의인이 아니라 당세에 완전한 자(9절)라고 말하니 더더욱 궁금해진다.

 

성경 해석할 때에 가장 중요한 첫째 원칙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 독자가 꼭 알아야만 할 내용은 성경 어딘가에 직간접으로 반드시 계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노아의 경우도 그 개인의 성품과 행적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개연성 있는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창세기 9:18-27에 의하면 그는 술에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자다가 아들 함으로 아비의 나신을 보는 불경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이는 인사불성 될 정도로 취했다는 뜻이다. 비록 아들이 잘못했어도 전후 사정을 따지자면 원인 제공은 자기가 했다. 그럼에도 아들 함과 손자 가나안을 저주했으니 요즘의 상식과 이성에 비추면 몰상식하고 독선적인 아비처럼 여겨진다.

 

말하자면 노아는 평소에 술을 즐기는 가부장적인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홍수 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게 살다보니 나태해져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변명해줄 수 있는 계제는 아니다. 그 크고 엄중하고 냉정하기까지 한 심판을 직접 목도, 아니 참여한 동역자였다면 정말로 경건에 힘쓰며 살아야 했다.

 

노아가 맡은 위치와 신분과 역할은 엄청났다. 죄로 관영한 옛 세대가 멸망된 후에 하나님의 새 역사의 주역이 될 신세대의 선조였다. 아담과 거의 동격이었는데 술꾼 노아는 너무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성경은 그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와 의미를 안 따져 볼 수가 없는데 성경해석은 기록된 범위를 넘지 말아야 하므로 가장 먼저 본문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세 아들을 낳은 노아

 

본문 10절은 노아가 세 아들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새 인류의 선조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첫째 뜻이다. 거기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한 보통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온 땅이 패괴하고 강포뿐이었다고 강조한 것은(11,12절) 당연히 홍수 심판의 원인을 밝힌 것이다. 그럼 그 이유에 해당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쉽게 말해 땅의 모든 혈육 있는 자 즉, 사람의 탈을 썼다면 모두의 행위가 패괴했는데 노아만은 유일하게 예외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여자의 외모를 보고 자기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일을(창6:2) 노아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은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남편과 아내의 구분이 없어지고 가정의 울타리가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프리섹스가 만연했고 동성애가 일상화 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노아만은 한 사람의 아내를 두고 그에게서 세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 특별히 심오하며 경건하고 영적 능력과 권위를 드러낸 것이 아니다.

 

노아가 세 아들을 낳았다는 성경의 기록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당시 성적으로 극도로 문란해져 부부 사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어쨌든 아이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 아무 죄 없고 순진한 아이들까지 몽땅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너무 비정하지 않는가?

 

성경에 그와 동일한 경우가 또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 전쟁을 수행할 때에 하나님은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육축과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명령했다. 그 기사를 접하는 불신자는 물론 신자들까지 너무나 잔인한 하나님이 아닌지 의아심이 생긴다. 지금 노아 홍수 심판의 경우에도 이 문제를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죄 없는 아이까지 심판한 이유는?

 

주일 설교에 부적절한 은혜롭지 못한 설명이지만 정확한 실상을 알아야 하므로 말씀드리겠다. 우선 아셔야 할 것은 성적으로 문란해지면 아기가 잘 들어서지 않는다. 창녀 생활을 오래하면 구태여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혹시라도 임신이 되면 불구 내지 정신적 결함을 안고 태어날 확률이 높다.

 

성적문란은 성병이 만연하게 되어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간질의 원인이 조상 때의 매독 균이 잠복되었다가 후손에게 발병한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실제로 최근 가나안 지역을 발굴했더니 어린이의 유골은 거의 다 불구거나 뇌가 손상이 된 상태였다고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과 세 천사 사건에서 보듯이 성적 문란은 더 자극적이고 비정상적 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에서 동물과 교접하는 수간(獸姦), 그 다음은 소아나 유아까지 무차별로 상대를 넓히게 된다. 미국에 지금 아동포르노가 얼마나 성행하는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동 포르노는 제작 배포 소지만 아니라 보는 것만도 큰 벌을 받는다.

 

율법은 비정상적인 일탈의 성관계는 전부 사형의 엄벌에 처하라고 명하고 있다. 인간이길 거부해서 스스로 짐승의 자리에 떨어진 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이 땅을 창조하신 계획과 목적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땅 자체를 더럽힌 죄로 인간으로써 살아갈 의미와 가치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노아 홍수 때는 아직 율법을 받기 전이지만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선 법적으로 이미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다.

 

아이들 또한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없었다. 당시 유전학 병리학이 전혀 발달되지 않았고 위생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그대로 두면 질병과 불구만 더 번져나갈 것이다. 하나님이 눈물을 머금고 취한 조치였다. 아이들이 매일 보고 듣는 것이 전부 추하고 더러운 패괴와 강포뿐이었다. 직접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 감이 되었다. 커서 어른이 되면 똑 같아질 것이다. 그 자체로 이미 사실상 심판을 받은 셈이다.

 

최근까지 근친상간을 허용하고 프리섹스가 범람하는 서구사회에는 불구와 정신질환을 지닌 아이가 많이 태어난다. 불행하게도 한국이 점차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이 성적으로 가장 개방적이다. 서구사회는 그래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데 한국은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하고 잘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제2의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이런 영적 흐름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비브리오균으로 오염된 생선회는 잘못 먹으면 죽는다. 겉은 멀쩡하고 싱싱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한다. 노아 홍수 심판이 바로 그런 것이다. 치명적인 죄악의 독이 아이들까지 이미 완전히 오염시켰기에 불가피한 조치였다. 당시에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전한 노아의 세 아들을 패괴와 강포에서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당세에 완전했던 노아

 

다시 말하지만 노아는 특별히 경건하지 않았고 영적으로 뛰어나지도 않았다. 단순히 한 아내에게서 건강한 세 아들을 둔 것만으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불릴 만했다. 그만큼 세상에는 죄악만 관영했고 패괴와 강포가 충만했다.

 

당세에 완전했다(9절)는 원어의 뜻도 완벽하다(perfect)는 것이 아니다. 인간 중에 죄와 허물과 약점이 없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원죄의 굴레 아래에 있는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완전성은 불가능하다.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완전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죽을 이유도 없다. 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는 책이 되고 지금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올 필요도 없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노아는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훨씬 무식했고 영적 진리에 대해선 우리와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우매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유일하게 나은 점,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 놓고 그 큰일을 맡길 수 있었던 그만의 특성이 하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행적을 죽 훑어보면 가장 두드러진 점은 오직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반발 질문 의심하지 않았고 주저함도 없었다. 너무나 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실현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백이십 년의 방주 건축기간을 결코 묵묵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러니까 가혹할 정도로 아들 함과 손자 가나안을 저주할 수 있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진리나 사실에 대해, 인간적 지혜나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와 명령이라고 확신을 하면 단 한 치의 양보 타협 수정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눅9:62)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다간 밭이 제대로 갈아지지 않는다. 농부는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해야지 다른 일에 미련을 두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세상 나라에 미련을 두어선 안 된다. 현실이 중요치 않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다스리며 인간만 높이는 체계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다. 신자가 인간의 나라에 미련을 둘 수는 결코 없다.

 

노아는 정말로 하나님 말씀에 우직하게 순종했는데 자기 가족만을 구원하려는 목적 때문만이 아니었다.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이웃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있었다. 최소한 각종 동물들만이라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이유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인가? 노아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알기 쉽게 비교 판단할 수 있도록 노아를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한국의 모 재벌처럼 그룹 실소유주이며 회장이 노쇠하여 치매가 걸렸다. 아들들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불법과 폭력을 동원해서 아버지 재산을 먼저 빼돌리려 혈투를 벌리고 있었다. 부하 직원들도 앞 다투어 힘이 세어 보이는 아들 편에 줄을 서서 떡고물을 챙기기 바빴다. 모두가 불법을 범하므로 말단 직원들도 상사 모르게 자기 주머니 챙기기 바빴다. 말하자면 돈을 먼저 보고 먼저 챙기는 자가 임자였다. 노아 홍수 직전에 예쁜 여자는 먼저 보고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이듯이 말이다. 누가 봐도 회사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 순진하고 우직한 직원은 그런 불법에 일절 동참하지 않았다. 대신에 회사가 망해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회장을 찾아가 사실대로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자고 건의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못 알아듣고 아들 편만 들었다. 그런데도 이 직원은 정해진 월급 외에는 절대 손대지 않았고 상사가 부정을 시켜도 거절했다. 오직 자기 맡은 바 일만 성실히 정상적으로 행하면서 회사가 문 닫을 때까지 박봉으로 세 아들과 함께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바보 천치라고 놀리고 나중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아이들과 아내마저 그런다고 밥이 생기느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않느냐, 혼자만 손해를 자초하는 앞뒤가 꽉꽉 막힌 옹고집이라고 탓하며 제대로 아버지나 가장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평생을 회사에서 주는 월급 외에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있는가? 살 자신이라도 있는가?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 대한 예고를 하나님께 직접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했을 것 같은가? 아니다. 하나님께 예고를 들은 것은 13절이고, 그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한 것은 그 앞 9절이다. 성경에 기록된 순서 때문만은 아니다. ‘당세’에 완전했다, 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둘 다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평소에도 순수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의 믿음이 출중했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 성경은 물론 교회도 없었다.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니(창4:26) 가정예배는 드렸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고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믿음이 좋다고 인식하는 내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원이 다른 노아의 믿음

 

외눈박이 원숭이 동네에 들어간 두눈박이 원숭이 우화는 잘 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외눈박이 동네에 들어간 두눈박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거의 다 한 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외눈박이가 느낄 열등감과 이질감을 씻어주어야 해. 나부터 낮추어서 그들과 동격화해야 돼”라는 아주 겸손하고 의로워 보이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분명히 두 눈이 좋고 옳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타협, 왜곡, 부정, 불법을 저지를 것이다.

 

노아는 외눈박이 동네 근처에 가지도 않았고 또 그 안에 살게 되었어도 끝까지 두 눈으로 남았던 자다. 옹고집 기질이나 순종하는 믿음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우리가 쉽게 간과해버리는 믿음의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것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런 요소다.

 

장담컨대 노아도 처음부터 두눈박이로서 외눈박이 동네에 들어갔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외눈으로 지내는 불편함과 실패를 겪었기에 두 눈으로 끝까지 남을 수 있었다. 원래는 오래 동안 한쪽 눈으로 밖에 볼 수 없었는데 수술로 다른 눈의 시력도 회복한 것이다. 두 눈을 다 뜨자 외눈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결코 안 생겼던 것이다.

 

노아가 초기에는 세상 죄악에 동참하다가 회개했다는 뜻이 아니다. 본문 8절이 어떻게 말하는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령의 간섭으로 영적인 분별력이 생긴 것이다. 그는 온 땅에 패괴와 강포가 충만한 상황에 대해 철두철미 분노하고 저주했고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싫어도 너무 싫어서 죽어도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 속에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인간은 조금만 용납이 될 만한 측면이 있으면, 아니 적절한 핑계거리만 있어도 쉽게 죄악과 타협 굴복하는 존재다. 노아는 외눈과 두 눈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실감나게 체험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동네에 쫓겨나 외톨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외눈은 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것이다.

 

노아는 아이들마저 합류한 프리섹스의 풍조를 당시에는 그것이 더 인생을 살아가는 현명한 방식이라고 인정하는. 아니 라멕처럼 당당하게 자랑하는 상황에서, 지금 미국의 상황도 그러하지만, 지옥의 형상을 본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원문의 뜻은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온 땅에 강포가 충만하여 세상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자기마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임에도 하나님은 그래도 자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음을 노아는 깨달은 것이다. 또 그 자비로 인해 자기와 자기 가족을 통해서 새 세대 구원의 역사를 수행하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는 더럽고 추한 세상에 절대 발을 담글 수 없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은?

 

그럼 노아의 믿음 즉,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핵심 본질이 무엇인가? 아무리 많은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고 즐겁고 유익하며 심지어 의로워 보이는 측면마저 있더라도 하나님이 부재(不在)하면 절대로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반대로 아무리 적은 사람이 따르더라도 아니 자기 혼자뿐이라도 괴롭고 쓸쓸하며 자기에게 유익은 없고 손해만 생기고 나중에 보상의 약속도 없으며 고통만 따를 것이 뻔히 보이며 심지어 의로운 면이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의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그분이 주신 소명을 끝까지 붙들고 실현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과 정말로 동행한다면 그분은 반드시 당신의 진리를 신자에게 계시해 주신다. 또 신자는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면 자기 전부를 걸게 된다. 그렇다고 그분이 종교적 열성을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자가 예수를 믿기 전의 삶이 절대적 비진리 아래 있었고 완전한 거짓이며 실패 중의 실패, 나아가 죽음이었음을 절감했다면 다시는 예수님을 놓지 않겠다는 헌신이 절로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가장 크고도 첫째가는 의미다.

 

예수 믿은 후에도 하나님은 무조건 신자가 손해 봐야 한다고 명하지 않는다. 세상은 재물과 권력과 명예만 추구하기 마련이므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하게 된다. 예수님 말씀대로 집 안에도 원수가 생긴다. 신자는 노아처럼 외눈박이였다가 두눈박이로 바뀐 자다. 예수 믿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자기 생명을 걸만큼 크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예수 믿지 않았을 때는 너무 싫고 싫었던 반면에 후에는 너무 좋고 좋아서 예수님 쪽의 절대적 진리에 전부를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목사 입장에서 예수 잘 믿으라고 무턱대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다. 자기 속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재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옛사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는 당장 저부터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인도 아니요 완전하지는 더더욱 않다. 노아처럼 우직하게 끝까지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딱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뒤를 안 돌아볼 수는 있다. 예수 믿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의인이 된 것이다. 그가 의인이라서 하나님이 동행시켜 주고 또 큰일을 맡긴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여러분이나 저나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면 된다. 가정에서 매일 지극히 사소한 일로 배우자나 자식들과 투닥투닥 다투더라도 바람피우지 않고 다른 이를 속으로 흠모도 않으면서 한 아내와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 된다. 주일 예배를 종교적 죄책감이나 의무감으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빠지더라도 저절로 심령이 눌리면 이미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이다.

 

그럼 언젠가는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의 큰일을 맡기시고 그분께서 이뤄주신다. 아니 요즘 같이 모든 측면에서 반기독교적인 미국 상황에서 크리스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순전한 십자가 복음만 붙들고 증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큰일을 이미 하고 있는 것이다.

 

5/1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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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강해 #46 - 창4:9-15)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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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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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강해#47-창4:15&23,24)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 강해 (4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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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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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창4:16-2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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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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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눅22:31-34)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고난주간 설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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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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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강해 #49-창4:25-5:5) [1]

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 강해 (49)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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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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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창세기강해 #50-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강해 (50)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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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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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강해#51-창6:5-7)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 강해 (5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뒤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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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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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받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2 - 창6:8-12)

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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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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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강해 #53 - 창6:13-17)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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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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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4 - 창6:15,16 & &7:10-12)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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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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