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2:1-2) 성화의 개념부터 완전히 바꿔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더 나빠진 한국교회 신뢰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의 올해 초 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21%로 우리나라 국민의 5명 중 1명에 불과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외부 사역과 활동이 현저히 줄 수밖에 없었던 코로나 사태를 겪은 지난 3년 사이에 신뢰도는 더 낮아졌다고 합니다. 

 

그 보고서는 신뢰도가 최근에 그렇게 낮아진 이유로 크게 둘을 들었는데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첫째 개신교가 사회봉사 활동에 많이 참여하는데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도를 목표로 하기에 거꾸로 반감을 살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둘째로 펜데믹 중에 유독 개신교회들이 대면 예배를 고집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방역 노력에 역행한 것이 일반인들의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전도를 목표로 하는 구제와 코로나 때의 대면 예배 자체는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방안이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믿는데 소외된 이웃을 잘 섬긴 후에는 기독교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그들로선 그동안 받았던 구제와 봉사에 순수성이 없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4)고 가르쳤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의도나 목적 없이 단지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구제를 전도와 직접 연결해버리면 자칫 복음의 진실성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병균이 번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과학적인 진리요 상식인데도,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므로 반드시 교회에 모여야겠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면서 이젠 거꾸로 교회가 가진 종교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반박하면서 기독교인들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제가 불신자 시절에 기독교인들을 예수쟁이라고 비하하며 아주 싫어했던 바로 그 배타적이고 유아독선적(唯我獨善的)인 모습입니다. 

 

가뜩이나 교회와 신자들에게 세상보다 더한 추문이 빈번해서 지금껏 많은 불신과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한국의 삼대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 불교, 개신교 중에 신뢰와 호감과 친밀감이 가장 떨어졌고 최근엔 한국 사회에 도움 되지 않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말하자면 윤리적 차원에서 내세울 자랑이 거의 없는 데다, 종교적인 도그마(dogma)로 무장했으니 신자를 제외한 전 국민의 비호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어떻게 비방하든 신자와 교회는 하나님께만 충성하면 된다고 고집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며(마22:37-40),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마5:16) 명했습니다. 바울도 전도할 때는 헬라인에겐 헬라인으로, 유대인에겐 유대인의 방식으로 접근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9:19-23) 성경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바뀌었다고 선언합니다.(시69:9, 요2:13-17)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특유의 교리만 앞장세워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말씀드린 성경적 원리를 잘 알고 있는 합리적이고 성숙 된 신자들도 열심히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수시로 죄에 넘어집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게 된 까닭은 한마디로 신자들이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되어서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주위 여건이 열악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핑계만 계속 댈 수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신자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2:37)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나 신자가 순전한 복음이 역사했던 초대 교회 시절과는 즉,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뜻인데, 오늘의 본문이 이 오래된 숙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구원 이후의 첫째 과제

 

로마서는 11장까지 아무 공로 없이 죄 중에 있었으나 하나님께 선물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순전하게 받아들이면 여전히 죄의 본성은 살아 있는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으로(free from the penalty of the Sin),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입니다. 

 

본문 12:1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구원받은 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자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겠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된 후로는 평생을 두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죄의 끈질긴 힘에서 풀려나는 것으로(free from the power of the Sin),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원입니다. 

 

성화의 삶에 대해 가장 먼저 나오는 본문은 그 의미가 가장 중요하거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줄인 가르침이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나면 누구나 교회부터 출석해서 주일 성수를 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하여 응답받고,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교회의 성경 공부와 봉사나 전도 모임 등에 참여하는 일 등을 예상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종교적 활동에 전념하라는 권면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이미 세워져 있는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니까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교회에서의 종교 활동은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는 너무나도 기초적인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교회 생활은 비유하자면 직장인이 매일 회사에 성실하게 출근해서 맡은 바 직무에 충성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직장인이 아니며 바로 해고됩니다. 직장인이 정작 행해야 할 본분은 회사의 방침과 계획에 충성하여서 회사가 바라는 최대한의 실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활동은 신자라는 신분을 입증 유지하는 일이며, 관건은 하나님이 바라는 바대로 충성하여 정말로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화의 본질을 한마디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정의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처럼 육체적으로 힘겹게 수고해야 하는 봉사활동을 뜻하지 않습니다. 몸은 신자의 인격체 전부이므로 신자가 가진 것 전부와 삶의 모든 차원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몸은 또 살아있다는 의미도 되므로 시간적으로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내내 평생토록 그래야 합니다. 

 

산 제물은 영어로 living sacrifices라고 번역했듯이 살아있긴 하되 구약시대에 완전히 죽여서 바쳐지는 제물처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육신이 죽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죽은 것과 같아야 하니까, 신자 가진 것들 전부를, 심지어 생명까지 다 바치고 하나도 남지 않아도 원망 불평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기꺼이 감사함으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부터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자신의 존재와 일상생활과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분이 죽으라고 하면 죽기까지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더러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서 세상 땅끝까지 복음만 전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예배란?

 

바울은 지금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칭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다거나, 초자연적인 은사나 이적이 실현되는 예배를 드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시적이고 체계적인 교회의 공적 예배와 구분하려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의 절차와 형식이 없어도 각 신자가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정말로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 영적 예배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또 그러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어렵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각도로 살펴볼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본문 그대로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거역 대적하고 있으니까 그 정반대로만 살면 됩니다. 

 

인생사를 인간보다 더 큰 능력으로 실제로 주관 통치하는 존재는 하나님과 사탄 둘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사탄과 하나님 둘 중에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에 따라서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사탄의 흑암의 지배 아래 있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범사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 바로 신자가 드리는 영적인 예배입니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삶에서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탄 중에 누구의 통치를 받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성경에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한 최초의 타락 사건을 되살펴 보면 됩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추악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담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자신이 맡았던 청지기 직을 내팽개치고 하나님 대신에 에덴동산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그가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여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을 뿐, 먹어도 절대 죽지 않고 오히려 네가 이 땅을 네 맘껏 차지할 수 있다고 부추겼습니다. 아담은 너무나 매혹적인 그 유혹을 선뜻 받아버렸는데 오히려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육신은 살아 있되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자신이 너무 추악하게 느껴져 부끄러웠고, 자기 인생이 완전한 실패로 끝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원수 되어 죽어 마땅한 아담을 용서해주려고 짐승을 속죄의 제물로 대신 받으시고 구원해주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후손들로 원죄의 굴레가 씌어져서 아담이 타락할 때 품었던 그런 사고와 신념에 묶여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 없애고 자기들 맘껏 주인 행세를 합니다. 이 땅과 인간을 절대적으로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라 다스리는 절대적으로 거룩한 존재가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담과 달리 사탄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 자기 인생이 사악한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이 땅은 오직 물질로만 이뤄진 것이며 인간도 물질에 불과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름답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시 물질이 장구한 세월 동안 우연에 우연을 거쳐서 진화된 물질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물질로만 채워진 이 땅에선 물질을 활용해서 최대한 풍요롭고 편리하고 안락하고 쾌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해주는 데에 최고의 힘을 가진 것은 시쳇말로,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 돈입니다. 

 

세상 사람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던 삶을 완전히 청산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 돈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도 돈이 많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고 오히려 현실적인 불행을 불러오고 정신적 고통도 되니까 돈에 묶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탐욕으로 인한 윤리적인 죄는 덜 지을 수 있으나, 여전히 자기 일을 방해하려는 돈을 제거하려 한 것이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인식과 고집에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결국 돈이 인생을 좌우할만한 가장 큰 요소라고 그 가치를 계속해서 인정해주는 꼴입니다. 

 

마음의 보물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신자도 세상에 속한 신분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서 일상적 현실의 삶을 세상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힘껏 공부하여서 좋은 직장을 얻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이 인생의 목적, 방향, 의미, 가치가 절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대와 다르게 산다는 것은 돈이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생각하는 피조물로서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기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우선순위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뜻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고 보충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하나님과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로 나눴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종으로 부려 먹는데 최고 효율적인 수단과 통로가 돈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현대의 선악과 역할을 하게 된, 즉 하나님을 순전하게 따르느냐 마느냐의 시금석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불신자 시절에 재물을 가장 귀한 보물로 삼았으나, 이제 정반대로 하나님을 그 위치에 두게 된 자입니다. 여전히 재물은 삶의 필수적 요소이므로 없거나 부족하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그분이 책임져 주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자기에게 진짜 보물인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기에 그분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목표로 삼는 자는 그 인생이 절대로 안정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돈을 많이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날이 갈수록 그 경쟁이 격심합니다. 최근에 일류 대학을 나와도 평균적인 보통 생활도 하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돈은 인간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은 물론 안식도 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물질로는 결코 만족 될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물질로 만족할 수 없는데도 계속 물질에서 만족을 얻으려니까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줄 알지만, 자기들이 인식하지 못해도 사탄에 미혹되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니까,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만 자기를 채우려 드는 것입니다. 

 

휘발유만 넣어야 하는 승용차에 아무리 값이 싸도 디젤을 넣으면 차가 움직이지도 않고 완전히 엔진이 망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갑부이자 모든 것을 다 이룬 솔로몬이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행하는 자신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었다고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이 채워져야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삶의 현장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다스리는 두 주인을 말하기 전에 그런 점부터 먼저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이 땅은 도둑이 많고 하늘에 도둑이 없다는 식의 대조가 아닙니다. 부자일수록 철제 금고를 사든지 경비원을 두어서 절대 도둑이 접근조차 못 하게 하고, 또 아무리 신령한 자라도 하늘에 재물을 쌓아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물질을 주관하며 사람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도 당신께서 나눠주십니다. 당신의 뜻에 위반되면 언제든 폭삭 망하게 할 수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땅의 재물을 가장 귀하다고 여길수록 그 심령에 구멍만 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자는 그 인생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

 

연어는 새끼를 부화하려고 폭포마저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절대로 바뀔 수 없고 바뀌지도 않는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을 까고는 바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러합니다. 연어라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더더욱 하나님이 창조 때에 불어넣어 주신 정체성 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 따르는 모든 목표와는 전혀 반대인 목표가 있어야만 하고, 그러면 이 세대를 뒤쫓거나 합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또 필연적으로 연어처럼 거센 강물과 오르지 못할 것 같은 폭포가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에 두 종류의 길이 있고 각기 들어가는 문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머리 둘 곳도 없기에 따르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니까 세상으로부터 온갖 훼방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1절) 말하자면 로마서 11장까지 십자가 복음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비”라고 축약한 것입니다. 또 그런 자비가 신자가 된 후에도 항상 함께하니까 얼마든지 몸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가 된 경위를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아직도 원수 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믿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오직 돈만 밝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후의 심판과 구원은 안 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물질적 풍요, 사치, 쾌락만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대체로 물질에서 철저한 실패를 겪습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믿는 그 고집을 하나님이 깨트려 준 것입니다. 그 외에도 건강을 잃던지, 실연이나 이혼당하든지, 인간관계에서 큰 상처를 입든지, 공부에서 실패하든지, 자기가 세웠던 여러 목표에서 완전히 실패를 겪고는 교회 문을 두드립니다.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분홍빛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하나님이 산산이 무너뜨려 준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은 물질이 전부가 아니며, 내 인생의 주인도 내가 아니라고 절감하게 됩니다. 

 

나아가 자기가 생각보다는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자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돈이 최고니까 법이 저촉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서라도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여긴 보물은 산산조각이 나고 남은 것이라곤 너덜너덜 구멍 뚫린 가난한 심령 하나뿐입니다. 

 

결국 인생에서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됩니다. 생전 처음으로 이 땅과 자신의 진짜 주인인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앞에 겸손히 엎드린 자에게 각자마다 그 방식은 다르지만, 반드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인도해주십니다. 그 인생을 완전히 뒤집히게 해서 인생 최초로 영적인 만족 평안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십니다. 

 

비로소 자기에게 돈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토록 변치 않는 유일한 보물로 하나님을 소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생의 유턴을 이룹니다. 하나님만을 따르면 그분의 통치만 받으면서 사나 죽으나 그분의 영광을 높이고 싶은 새롭고도 절대적인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절대적 하나님, 절대적 진리, 전지전능하신 분을 목표로 삼았으니까 자기 인생이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끝까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연어처럼 자기의 근원인 하나님께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도 영어로 worth(가치) +신분이나 관계 등을 뜻하는 ship이라는 접미어의 합성어로, 모든 가치와 의미를 특정 대상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자기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전혀 흔들릴 수 없는 최고로 좋고 유일한 보물이 그 대상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해도 당신과 원수였던 죄인을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하여서 자기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돌립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절대로 변동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목표가 된 자가 현실 삶에서 그분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입니다. 

 

성화의 본질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았습니다. 아직 예배가 공식화되고 정기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한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경배 찬양했을 뿐입니다. 당시 세대의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세상 쾌락 죄악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재물이 주인이 아니기에 가진 것을 팔아서 서로 통용하며 도왔고 세상 사람들도 신자들이 사는 모습이 정말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숨어 있었는데도 그들이 먼저 찾아와서 날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안에 거하는 신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전반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말씀으로 정리하자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29,30)입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아서, 자비 안에 잠겨 있다가, 죽어서도 그분의 자비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잘하는 것 하나 없어도 그러합니다. 자비라는 말 자체가 신자가 아무 자격 조건 능력 공적 없어도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하고서 더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준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준다고 해서 재물도 충분히 넘치도록 채워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곤고, 핍박, 사망은 물론 사탄의 끈질긴 훼방도 있을 것이나, 신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 하나만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9-1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변증이라서, 본문은 사실 로마서 8장과 이어지는 것이 그 의미의 흐름으로는 자연스럽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은 복음에 관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절)고 결론을 짓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자의 인생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니 신자가 되어서도 자신의 연약한 믿음에 비추어선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뜻과 계획안에선 신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와 맞바꾼 신자는 단 한 명도 그렇게 되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제 성화에 대한 개념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본문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자신에게 합당한 종교를 갖고서 종교의 자유를 외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오직 이 땅에서의 물질적 형통이며 도덕과 종교도 그 목표한 범위를 절대 벗어나지 않습니다. 설령 아무런 현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이므로 아담의 원죄의 멍에 아래 자신의 정신적 욕망과 교만을 채우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자기는 분명히 남들보다 의롭다는 자기만족을 스스로 구하는 헛짓거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순수하다 쳐도 아직도 절대적 진리를 찾아서 헤매는 중입니다. 

 

신자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그분만을 주인으로 모실 때 삶과 인생의 진짜 선한 모든 것을 그분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의 자녀가 된 신분 권세 은혜가 절대로 감소 수정 취소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절대로 온전해지지 않음을 처절하게 체험하게 되므로 언제든 예수님의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좋은지 매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물론 그런 성화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고 교회 활동을 중심으로 종교적으로 경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화의 본질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현재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는 이유도 삶의 현장에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지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돈을 함께 주인으로 삼을 목적으로 교회에서 종교적 예배드리는 모습 중심으로 세상에 내보였고 또 그런 뜻으로 불신자를 교회로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 온전한 성화를 이뤄가고 있는지 솔직히 점검해보길 원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돈이 없거나 부족하면 불편하고 고통스럽긴 해도 하나님을 멀리하여서 괴롭고 눌렸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좁고 협착한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 그 여정이 너무나 좋고 기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 세대가 걸어가는 길이 철두철미 실패 절망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7/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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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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