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불쌍한 자?
마태복음강해(#166)



http://youtu.be/qTcPMbp-30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마15:29-39)


동일한 기적을 두 번 기록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난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복음서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르며, 심지어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도 있다. 당장 본문의 경우도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서 나온 후에 마태는 여러 명의 환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29-31절) 반면에, 마가는 귀먹고 벙어리 된 자 한 명만 치유한 것으로(막7:31-37) 기록하고 있다. 또 7병2어의 기적에서도 마태는 물고기도 두어 마리 있었다고 하는데 마가는 물고기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성(實存性)을 의심하며 오류가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7병2어 기적은 5병2어 기적을 되풀이해서 기록한 것뿐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신자들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7병2어 기적은 5병2어 기적과 내용이 비슷해서 그렇게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지 최소 20년 후에 기록되었다. 저자들도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다 상당한 나이에 이르러 세부적으로 서로 차이가 날 수 있다. 아니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또 자신에게 영적 깨우침이나 감동이 더 컸던 사건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조금씩 상이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시골마을에 노인 네 명이 20-30 년 전에 있었던 큰 홍수를 회상한다고 가정해보자. 한 노인은 열 명이, 다른 노인은 여덟 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망자 숫자에 두 명의 차이가 난다고 큰 홍수가 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억지다. 두  진술을 종합해 추정해보면 시신이 발견된 자 8명 외에 실종자 2명이 더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종자 가운데 친척이 있었던 노인은 사망자를 열 명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말이 조금 상이하지만 비교해보면 더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가가 귀먹고 벙어리 된 자의 치유만 기록한 까닭도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혀에 손을 대면서 치유해주는 방식이 아주 인상적이었던 때문이다.(막7:33) 또 고쳐준 후에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이르지 말라는 예수님이 당부하신 진의도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막7:36) 반면에 마태는 그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거나, 함께 있었어도 관심을 집중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보다 그 많은 무리를 예수님이 정성껏 치유해주는 모습에 더 감명 깊었을 수 있다.    

7병2어의 기적을 기록한 까닭은 너무나 간단하다. 조작이나 반복 기록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네 복음서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오류나 수치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큰 축복이자 자랑이다. 네 책을 서로 대조 보완하면 완전한 진리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또 각 저자가 느낀 감흥과 깨달은 지혜를 종합하면 더 성숙되고 심오한 영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각기 다른 영적인 관점을 넷이나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더 풍성해지겠는가?

두 기적에 무엇이 다른가?

7병2어와 5병2어의 기적의 다른 점이 참여한 사람과 떡과 물고기의 숫자 즉, 기적의 규모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다르다. 만약 일어난 장소가 같다면 전후 경과가 조금 달라도 같은 사건이라고 의심해도 크게 할 말이 없다. 반면에 장소가 다르면 분명히 다른 사건인 것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29절) 치유와 7병2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거기는 이방 땅 두로와 시돈이기에 마치 유대 땅에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마가는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막7:31) 이르렀다고 말한다. 데가볼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중근동을 정복한 이후에 요단강 동편에 건축된 헬라인 거주 도시 열 개를 말한다. 이방인 도시들 곁의 호수가 언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또 예수님께 불치병의 고침을 받자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31절)고 한다.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증거다. 만약 유대인들이었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쓸 리가 없다. 단순히 “우리의 하나님” 혹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5병2어 기적은 유대인들을, 7병2어 기적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라는 점이 첫째로 다른 점이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또 있다. 5병2어에선 해가 저물어지자 제자들이 먼저 집회를 마치고 무리들을 귀가시키자고 제안했다. 제자들이 전도에 돌아온 날 오후 반나절 동안 말씀으로만 가르친 후였다. 7병2어에선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불러 밥을 먹이자고 말했다.(32절)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나 지났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치면 성령치유 집회를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고 개중에는 갖고 온 음식을 다 먹고 한두 끼 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그 상태로 돌려보냈다간 길에서 기진해 쓰러질까 염려한 것이다.

따라서 7병2어 기적은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유대인과 동일한 은혜와 권능과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즉,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메시아 되심을 보이신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은 사람들 사이에 시기, 미움, 다툼이라곤 없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천국잔치였다.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천국이 어떠한지 이 땅에서 그 맛을 보라는 뜻이었다.  

영화롭게 되는 이방 땅 갈릴리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기에 반드시 죽 연결해서 묵상하고 해석해야 한다. 본문의 치유와 기적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주님이 대화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것이 절대 주님의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제자들이 염려한 것처럼 산헤드린의 예상되는 핍박이 두려워서 이방지역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얼마 전에 다녀온 두로와 시돈에서 흉악한 귀신이 들린 소녀를 말씀 한마디로 치유했다는 소문이 데가볼리까지 이미 전파되었을 것이다. 유대와 가까워서 5병2어 기적 사건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큰 무리가 사흘간의 집회 동안에 환자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던 까닭이다. 예수님께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거나 고쳐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 앞에 내려놓기만 했다. 예수님도 싫거나, 귀찮아하거나, 지친 표정 하나 없이 그저 불쌍히 여기며(32절) 다 고쳐주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된 것이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유대 쪽이 아닌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 즉, 데가볼리 지역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3일간의 이 성령치유집회를 근 7백 년 전에 이사야가 예언했다는 뜻이다. 그가 갑작스레 깊은 깨우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말했을 뿐이다. 성령님의 인도였다면, 이 집회도 성삼위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셨던 일이라는 뜻이 된다. 예수님이 짐짓 가나안 여인을 쌀쌀맞게 대한 것도, 그래서 그녀의 큰 믿음을 제자들 앞에 드러내 보인 일도, 나아가 제자들의 편협한 유대 중심주의의 잘못을 깨우쳐주신 것도 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계획 가운데 있는 그분의 뜻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누구든지 즉,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말고도 그들이 개 같이 멸시하는 이방인이라도 진심으로 주인의 상 곁에만 머물러 주인의 떡 부스러기라도 받아먹기를 원하는 자는 다 당신께 나오라는 것이다. 당신은 절대로 차별하는 분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자는 다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정작 따져보아야 할 이슈가 하나 발생한다. 지금 데가볼리의 이방인들은 초자연적 치유를 경험했고, 주님이 짬짬이 전하는 천국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으며,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신기한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과연 그들이 차별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을까?

기이히 여기는 이방인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7병2어의 표적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낱낱이 살펴보아도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기록은 물론 그런 힌트조차 없다. 물론 그 많은 무리 중에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헌신하여 구원받은 자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 전체의 반응은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그들 중에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 나선 이는 없다. 있었다면 당시로는 엄청난 사건인지라 성경이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예수님이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두 명이 바로 이방인이지 않는가? 이 기사의 결론도 그냥 주님이 그 지역을 떠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예수님이 보이신 “초자연적 능력만 기이하게 여겼을 뿐”이다.(31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도 유대인들이 믿는 신이 자기들의 신들보다 더 큰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한다는 뜻일 뿐이다. 아무도 선뜻 개종(改宗)하려들지 않았다.  

또 마태의 기록대로 환자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두기만 했다. 그들 환자나 가족이 진정으로 예수님께 항복한 것이 아니다. 벙어리가 말하고, 절뚝발이가 걷고, 소경이 보는 그 사실에만 흥분했지 예수님 그분이 누구인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나안 여인처럼 “나를”,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이 전혀 없었다. 그들도 산헤드린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 내 모든 것의 주인, 나의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고 또 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확신은커녕 그런 소망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 날도 사정은 동일하다. 불신자들은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 타종교를 믿는 이도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를 기독교의 기도원에 들쳐 업고 와서 고쳐달라고 간구한다. 또 간절히 기도하면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래서 개종하는 자도 있지만 자기가 속했던 세속으로 그냥 돌아간다.  

교회 구역장들도 종종 비슷한 예를 간증한다. 남편 사업이 부도나려거나, 큰 질병에 걸렸거나, 자식이 대학 입시를 앞둔 이웃에게 전도하면 쉽게 교회로 따라나서며 구역 예배에도 출석해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뜨겁게 합심기도도 한다. 그러다 당면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싶게 교회도 구역도 그만 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능력이 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주 큰 고난도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능력만 기이하다고 여길 뿐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오직 문제와 고난을 통해서뿐이다. 자신과 하나님과 인격적 개인적 친밀한 관계라곤 아예 형성되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의사도 없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단순히 해결사 내지 심부름꾼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이 늦어진 이유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최하 20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 또한 아주 간단하다. 지금도 남자만 사천 명, 다 합쳐서 만 오천 여명의 사람들이 기적을 목격하고 동참하여 주님의 기이한 능력을 체험했다. 그들로선 세상에 지금껏 없었던 일인지라 너무 신기해서 바로 어제 일어난 사건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주님이 감기 몸살 같은 일반적인 병을 치유한 것이 아니었다. 평생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는 불치병을 말씀 한마디로 고쳤다. 예수님에게 신적 권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지 않게 권세가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과 계명이었다. 그 의미가 심오할 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다. 예컨대  지금껏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정당하다고 배웠고 또 실천해왔다. 그런데 주님은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갖다 대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니 그 가르침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경우는 더 그랬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자기들로선 최대한의 지혜를 동원해서 변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시도는  대꾸 한마디 제대로 못해보고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집에 돌아가서 얼마나 곰곰이 되새겨봤겠는가? 예수님과의 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다시 따져보았을 것이니 만약에 나중에 복음서가 그 내용을 조작 내지 잘못 저작했다간 그들부터 나서서 기독교는 사기라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랬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이 예언한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은 충격을 넘어 입이 딱 벌어져 전혀 말도 못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해 단번에 로마 제국을 물리칠 수 있는 분이었는데도 마지막 날 밤에 땀이 핏 방울이 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스스로 십자가로 올라가셨다.

또 당신 말씀대로 스스로 살아나셨다. “이(목숨)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權勢)도 있고 다시 얻을 수 있는 권세도 있으니”(요10:18) 생명을 버리고 얻을 권세를 가진 자라면 바로 하나님 당신이다. 부활 후에도 제자들이 함께 모여 문을 닫고 있는 복판에 홀연히 나타나셨다. 그들이 유령인가 두려워할 때에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었고, 또 떡을 떼고 물고기를 구어 먹으며 교제했다.

바로 그런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가정해보라. 그분의 계명과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하나님 본체이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몸소 섬겨주는 그 자리에 있는데 말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니 인간 세상에선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 않는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고는 스스로 죽고 스스로 부활할 수는 전혀 없지 않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진실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소망할 영원한 진리였다. 그 부활을 목격한 신자들로선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아무리 심한 멸시와 핍박을 받더라도 자기들도 천국 영광 중에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상의 고난, 질병, 가난, 슬픔, 상처, 눌림 등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했었다. 부활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한 신자들도 성령이 임재하자 현실의 자기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 기쁨, 자유가 최소한도 요동치 않는 평강이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오직 예수라는 한 인물에만 모였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 어떤 방해와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기독교의 종교체계, 경전, 교리로 구태여 힘을 보탤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의 경륜이 다 포함되었다. 믿는 자의 이 땅에서의 참 생명과 하늘의 참 시민권이 그 부활 안에 다 숨겨져 있었다. 예수의 부활, 나아가 예수님 그분이 바로 복음이었고 신자의 믿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님은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부정부패를 개혁할 조직체를 결성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서기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모든 가르침과 사역을 일일이 기록하게 했을 것이다. 또 조직체에 대한 규약도 만들고 제자들에게 실천 강령을 주어서 잘 지키는지 여부도 감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모두가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고 나중에는 뿔뿔이 다 흩어졌다. 개중에는 세 번이나 사람 앞에 스승을 부인하는 자도 있었고 심지어 배반하는 자도 나왔지 않는가?

예수님은 요한이 표현한대로, 정확하게 말해서 그가 체험한 그대로 영원히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거룩한 성전이 있는 유대 땅만 아니라, 흑암이 가득한 갈릴리의 사단에게 미혹된 영혼들에게도 본문의 치유와 7병2어 사건을 통해 전파되어졌다. 주님은 하나님의 참 사랑과 긍휼을 모르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만져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태초부터 계신 죄인을 구속하는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오직 예수라는 한 인물에만 주목했었다. 그분의 성품과 권세는 물론 그분 자체 즉, 그분의 그분다우심 앞에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심오한 가르침이나 경건한 계명보다는 바로 그분 당신이었다.

요컨대 예수님은 이 땅의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전부를 주시러 오셨던 것이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길이었다. 예수님 그분이 누구인지, 또 왜 당신의 전부를 주었는지 아는 것이 바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 당신을 누구 같은 자에 주셨는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게 하는 줄도 모르고, 기껏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여부로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다. 또 이방에서 “흑암에 거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게”(사9:2)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완악하기 그지없고 스스로 교만하며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와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본문의 이방인들도 단지 그분의 능력만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다.  

7병2어 기적이 어떤 말씀으로 결말나는가?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셨다고 한다.(39절) 성경에 기록은 안 되었지만 틀림없이 무리들이 치유와 기적의 기이한 능력을 더 보이라고 채근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거룩한 율법을 받았으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유대인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5병2어 기적을 맛본 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풍부하게 책임져 주는 왕으로 억지로 세우려 들었기에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피신했지 않는가?
  
남의 자식과 자기 자식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더 남았다. 이방인 즉 불신자가 예수님을 보는 관점과 예수님이 그들을 보는 관점이 정확히 서로 대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31절), 이방인들은 예수님이 베푸는 초자연적 이적만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32절)고 말씀하셨다.  

무리가 당신에 대한 관심은 전혀 표하지 않고 당신의 능력만 보는데도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방인들은 사단에 미혹되어 있기에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가 그들 영혼에 온전히 비춰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당신께서 아직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이 그들에게 정말로 보여주고 만져주게 하려는 것이 남아 있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그들을 위해 내어놓으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어볼 질문이 하나 생겼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자를 가장 불쌍하게 여길 것인가? 본문의 경우처럼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주심으로 구속 사역을 다 이루셨음을 모르는 자들인가? 물론 그들도 하나님은 당연히 불쌍히 여기지만 사실은 그들보다 더 불쌍히 여기는 자가 따로 있다.

진리를 잘 모르는 자들은 불쌍히 여기기보다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능력이 더 세게 나타난다는 것과 또 예수님 그분은 아주 선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까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 왜 그분이 죽으셔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을 깨우칠 책임은 그 진리를 아는 신자에게 맡겨졌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택하심 밖이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기 전이라 정말로 불쌍히 여겨야만 할 여지가 사실은 없다.

정작 하나님이 가장 불쌍히 여기는 자는 예수님을 알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능력만 기이히 여기는 신자다. 당신께선 당신의 전부를 자기를 위해 주셨는데도 자기의 전부는커녕 극히 일부를 드리는데도 주저하고 초조 염려하는 신자들이다. 남의 자식이 공부 꼴찌를 하면 쯧쯧 혀를 차며 안 되었다고 여기긴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식은 석차가 몇 등만 떨어져도 가슴이 철렁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룬다. 참 부모와 참 자식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물론 신자가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도 광야다. 죄인들로 가득 찬 세상 속에 살아야 하고, 본인에게도 죄의 본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체질도 연약하며 진토 같아 참으로 불쌍하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장 갈급한 골칫거리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 사실을 하나님도 잘 아시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주신다.

그러나 현실의 고난과 문제들은 신자가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도 죽을 때까지 계속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 믿음이 약하거나 하나님의 긍휼이 모자라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는 바람에 사람은 평생에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땅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게 마련이다. 신자라고 고난이 절대 피해가지 않는다. 고난은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고정된 상수(常數)로 따라붙어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용했다면 신자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고난을 없애거나 줄이는 데에 동원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안일하게 무사 형통하는 것이 신앙은 물론 인생의 목적이 절대 아니라고 성경은 아예 창세기의 서두 즉, 시작할 때부터 확실하게 전제한 것이다. 현실적 복락의 풍부함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고 진짜 복락을 누리는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아니 예수님 안에 숨겨진 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이나 교리가 없이도 초대 교인들은 진짜로 예수님을 자기들 안에 보배로 소유했기에, 그분만을 꼭 붙들었기에 산 채로 사자 밥이 되어도 찬양하며 감사했지 않는가?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정말로 예수님만이 자신에게 알파요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 오직 부활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분이 참 생명으로 나와 함께 하기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에 즉, 가나안 여인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을 놓치지 않겠다고 할 때에 인간으로 누려야할 진정한 복락을 얻을 수 있다.  

사나 죽으나 주님께 생명을 바치며 완전히 순종해보라. 정말로 그 분이 가신 길을 따라 그분처럼 살아보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랄 수 있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그분 뜻대로 살아가면 정말로 복되고 복된 인생이 된다. 신자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고,  또 그렇게 하려고 헌신한 적도 아직 없으며, 나아가 그렇게 살려는 소망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복된 삶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정말로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시지 않겠는가?

4/14/2013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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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2
  • 조회 수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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